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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9일 화요일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아트 전시회 2제








공교롭게 미디어아트 전시회 2건이 비슷한 시기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와 금천문화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다. 또 공교롭게도 두 전시회의 주체는 모두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문화재단이다. 시기와 주제가 다소 겹치기에 두 기관 사이에 모종의 껄끄러움이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올해 내가 본 몇 안 되는 전시중 최고다. 솔직히 리움 10주년 기념전보다 좋았다. 물론 리움도 훌륭했다. 어딘가에 숨겨뒀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미언 허스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면 천박하게 들리겠지만) '돈값'을 한다. 이전에 상설전시돼있던 허스트와 부르주아의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 나온 작품은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는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도 사서 걸어주셨으면 한다. 그만한 돈을 쓸 수 있는 미술관은 리움밖에 없다....) 

모던, 클래식 예술의 정수만을 모아놓은 리움 전시회의 작품들이 눈을 호사롭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기획력의 승리라 할만했다. 기사 마지막에 "여러번 찾으면 좋겠다"고 쓴 것은 빈말이 아니다. 회사 근처이기에 나부터 여러번 찾을 생각이다. 전시회에 가서 영상 작품을 끝까지 본 적은 드물지만, 미디어시티 2014에 나온 작품들은 시간을 내 천천히 볼 생각이다. 

미디어시티서울에 누가 뭐라해도 '작품'이 나온 반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는 그렇게 말하기 머뭇대는 순간이 생긴다. 기사에 쓴대로 어떤 것들은 '직품'이라기보다는 '제품'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느냐고 물었을 때 평론가라면 무언가 기준을 제시하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긴 하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의 작품들은 신기했지만 그 신기함이 어떠한 여운을 주진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언캐니'했던 '살' 정도가 기억에 남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두 전시회 모두 무료다. 서울시민으로서 이런데 쓰는 세금은 더 내라면 내겠다. 





1층에 전시된 양혜규 작가의 작품. 수많은 방울로 이루어져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난다. /미디어시티서울 제공

초현대적인 미디어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한복판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예능보유자 이상순 만신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개막공연을 1일 오후 연 것이다. 

“여기가 원래 재판소 자리라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많아. 오늘 다 극락가는거야. 세월호에 죽은 사람들 원혼도 달래야 해. 서울미술관도 잘 되게 해주시고, 여기 온 분들 모두 재수 좋게 해주시고…”

박찬경 예술감독은 만신에게 손을 조아리며 미디어시티서울의 성공을 빌었다. 외국에서 온 아티스트들은 만신이 건네주는 제주를 음복했다. 구경온 사람들은 쫄깃한 떡을 받아 오후의 허기를 달랬다. 

개막공연으로 굿이 선택된 것은 이번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가 ‘귀신 간첩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의 화두를 ‘아시아’로 잡은 박찬경 감독은 귀신, 간첩, 할머니가 현대 아시아를 돌아보는 세 가지 키워드라고 했다. 귀신은 아시아의 누락된 역사와 전통, 간첩은 냉전의 기억, 할머니는 가부장제 사회를 견딘 여성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는 보이지 않거나 보여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전형적 타자’인 동시, 매혹과 금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에는 17개국 42팀의 작가들이 230여점이 출품됐다. 최원준의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1959년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교시에 의해 설립된 미술 스튜디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료 등으로 구성됐다. 만수대 스튜디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대형 동상, 기념비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공건축물을 지으며 ‘외화벌이’를 한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에티오피아, 세네갈, 토고의 기념비, 건축물에 ‘주체예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4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에 영상 일부가 공개된 바 있다.  


최원준 작가의 작품을 설명중인 박찬경 예술감독(오른쪽 마이크 든 이). 내 사진 올리는 거 별로 안좋아하긴 하지만, 보기 드물게 시건방진 자세로 박 감독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미디어시티서울 제공

<해녀>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미카일 카리키스가 2012년에 3개월간 제주 해녀공동체와 함께 지내며 만들어낸 작품이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가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제주해녀의 숨비소리(해녀의 전통적 숨쉬기 기술)가 들리고, 전면의 영상에서는 노동요를 부르는 해녀들이 보인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카리키스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황폐해져가는 문화는 내 작업의 일반적 주제”라고 설명했다. 

다무라 유이치로는 1928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고등재판소가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는 장소성에 주목했다. 그는 1764년 조선통신사 수행원 최천종이 일본 오사카에서 통역을 맡은 하급무사 스즈키 덴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영상으로 옮긴 뒤 이를 당시 법정을 연상케하는 세트에서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일으켜 가부키 공연 등의 소재로 사용됐으나, 미묘한 국제 문제 때문에 상연이 중지됐다고 한다. 

양혜규의 <소리 나는 보름달> 등 신작들은 방울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스스로, 혹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작품들은 방울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로 공간을 채워 작품이 주문을 외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자오싱 아서 리우의 <코라>는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출발해 에베레스트 산에 이르는 2300㎞의 여정을 고화질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몽환적인 전자음악과 현악기 소리가 숭고한 자연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영적 여정을 안내한다. 

민간위탁사업이었던 미디어시티서울은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미술관 직영사업으로 전환됐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은 “위탁사업일 때는 예술감독의 1회성 이벤트로 끝나 아카이브 구축에 어려움이 있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며 “미술관이 행사를 직영함으로써 정보를 축적하고 예술감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려 한다”고 말했다. 

9월 2일~11월 23일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한국영상자료원 두 군데서 함께 만날 수 있다. 영상 작품들은 2차원의 시각 정보를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고 기발하게 고안된 전시 공간과 어울려 3차원의 감흥을 안겨준다.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하고 풍부한 관점, 정보, 감상을 전하면서도 전시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근처를 지나는 이들은 시간을 내어 들를만하고, 지날 일이 없다면 일부러라도 찾을만한 전시다. 관람에 시간을 요하는 영상 작품이 많은데다가 입장료가 무료라 여러번 찾으면 더 좋겠다.  




김병규의 '에이티필드-마비된 감각'. /서울문화재단 제공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SF작가 아서 클라크는 말했다. 10월 17일까지 서울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2014’(이하 다빈치)를 본 뒤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

금천구 독산동의 금천예술공장은 대규모 인쇄공장을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주변엔 소규모 공업사와 의류공장들이 여전히 밀집해 있다. 개막한 3일 둘러본 ‘다빈치’에는 <해리 포터>의 마술, <스타워즈>의 미래기술로나 구현될법한 아이디어들이 현실의 ‘작품’의 형태로 선보였다. 2010년부터 아이디어 공모전 형태로 열리던 ‘다빈치’는 올해부터 처음으로 페스티벌로 확대됐다. 관람료는 무료다. 

김정환의 ‘이미지-무브먼트’는 멀찌감치 떨어진 피아노와 그 앞을 가로막은 빛의 커튼으로 구성돼있다. 커튼을 가로지르며 손을 저으면 2m 가량 앞에 놓인 피아노의 건반이 눌리면서 소리가 난다. 건반은 다시 허공으로 푸른색 레이저를 쏜다. 

김병규는 두 개의 정육면체 작품을 선보였다. ‘에이티필드’는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보호막에서 이름을 따왔다. 관람객이 커다란 정육면체 안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아무 것도 없던 육면에 레이저 보호막이 쳐진다. ‘살’은 한 손에 잡히는 세 개의 정육면체 실리콘 덩이다. 어떤 것을 만지면 맥박이, 어떤 것을 만지면 체온이 느껴진다. 어떤 것에는 뾰루지까지 나있다. ‘언캐니 밸리’(로봇공학계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인간과 닮았으나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은 로봇이 주는 섬찟함, 혐오감)의 의도적인 구현이라 할만하다. 신승백과 김용훈의 ‘아포시마틱 재킷’은 ‘입는 컴퓨터’다. 재킷에 여러 개의 렌즈가 붙어있어 위급할 때 착용자가 버튼을 누르면 주변을 360도로 찍은 영상을 웹으로 전송한다.

하이테크가 아닌 로우테크(저차원 기술)를 재치있게 사용한 작품들도 있다. 프랑스 작가 조니 르메르시에의 ‘후지’는 벽에 나무, 산을 그린 후, 그 위에 프로젝터로 빛을 쏴 풍경이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한 작품이다. 작품 설치를 위해 방한한 르메르시에는 “어디나 쏠 수 있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스마트폰, 텔레비전 등으로 한정된 스크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다”며 “프로젝터는 낡은 기술이지만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술의 발전은 예술의 개념을 흔들어왔다. 인상주의는 유화와 캔버스의 개발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는 야외에서 들고 찍을 수 있는 경량 카메라의 도입 이후 나타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술에 경도돼 예술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이날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제한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의 엠마 퀸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기술에 지원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청중과 재원을 모을 수 없는 기술에 투자해선 안된다는 점이 밝혀진다면, 다른 예술 단체들이 여기에 돈,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빈치’의 손미미 예술감독은 “테크닉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방법을 연마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면서도 “이는 완성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작가로서 바람직한 집착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우선 작품들에서 국가적·지역적 흥취를 찾기 어렵다. 작품만 봐서는 한국 작가의 것인지, 독일 작가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 손미미 감독은 “디지털 문화에서는 ‘오픈 소스’가 대세”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업 노하우를 감추기보다는 다른 작가도 알 수 있도록 예술가 커뮤니티에 공유한다는 것이다. 김치앤칩스 스튜디오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손 감독은 “개인 작업을 할 때도 기술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면 다른 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며 “인터넷을 통해 국경, 문화의 경계가 사라지다보니 외국 작가와 한국 작가의 작품 경향에도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사회와 역사의 흔적이 희미하다. 작품들은 공시적·통시적 맥락과 소통하지 않고, 현장의 관람객들과만 대화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품’이라기보다는 ‘기발한 전자제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장지대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의 취지 역시 기술, 예술, 산업의 연계임을 강조한다. 손미미 감독은 “미디어아트를 전통적인 예술관으로 정의내리면 오해가 생긴다”며 “미디어아트는 좀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환 '이미지-움직임' /서울문화재단 제공

2014년 9월 7일 일요일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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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들어가기 전에 살펴보기
-세계의 미술사조의 흐름-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Cvqj&imgurl=http://cfile208.uf.daum.net/original/1322160849632FA32AA3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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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조:다리파와 청기사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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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개최된 아상블라주 전시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최된 네오 리얼리즘The New Realists 전시회이다.
윌리엄 사이츠William Seitz가 주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콜라주와 사진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정크조각 그리고 전시장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네오 리얼리즘 전시회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으며, 영국의 피터 블레이크, 프랑스의 아르망, 크리스토, 이브 클랭, 다니엘 스포에리, 장 탱글리, 미국에서는 12명이 참여했고, 라우센버그, 존스, 워홀, 리히텐슈타인, 올덴버그, 짐 다인, 인디애나, 로젠키스트, 조지 시걸, 톰 웨설먼 등이 참여했다.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어 누보레알리즘Nouveaux Realisme(신사실주의)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가 1960년 누보레알리즘 선언문을 발표하며 이 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10월 27일 레스타니는 클랭의 아파트에서 클랭의 학교 친구 아르망, 다니엘 스포에리 등 도시의 쓰레기와 찢긴 포스터를 갖고 작업하던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들에 의해 누보레알리즘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레스타니는 선언문을 통해 “어떤 고귀한 장르와 특히 회화에서의 영원한 내재성”에 대한 믿음에 도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창조되는 세계의 사회학이라고 묘사한, 즉 “찢긴 포스터, 오브제의 흔적, 집안의 쓰레기 혹은 부엌의 잡동사니 등”에 관심을 기울게 했다.
누보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표방한 ‘사실주의자 realiste’는 정직한 재현을 뜻하는 전통적 의미의 사실주의와는 무관하다. 이들은 재현적인 회화와 추상 회화 모두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이젤화를 거부하고 대신 실제 현존하는 가공품 및 광선과 같은 신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종류의 미술품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 이 그룹은 북미의 네오 다다Neo-Dada에 상응하는 유럽의 경향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아방가르드의 주도권을 뉴욕으로부터 탈환해 아방가르드 미술의 온상으로 여전히 여겨지는 파리로 되돌리려는 최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비쳐졌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는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동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과는 구별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런 경향의 미학을 추구한 반면 영국과 미국 예술가들은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팝아트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팝아티스트들에게 제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더러는 네오 다다이스트라고 했고, 신사실주의자라고 한 사람도 있었으며, 공공주의자, 속물주의자Vulgarist, 간판쟁이Sign Painter, 새로운 미국 꿈쟁이New American Dreamer, 대중적 사실주의자Popular Realist, 사실존중주의자Factualist 등으로 부르면서 한결같이 유물론자쯤으로 간주했다. 이탈리아 평론가는 팝아티스트를 복수유물론자Polymaterialist라고 불렀으며, 프랑스 평론가는 신사실주의자라고 불렀다. 다만 영국 사람들만 로렌스 앨러웨이를 좇아 팝아티스트라고 불렀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는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공식화하는 의미를 남겼다.
http://cafe.daum.net/parkphotos/FZZU/64?docid=1KsZo|FZZU|64|20111212124021&q=%B4%D9%B4%D9%C0%CC%C1%F2 = 다다이즘

다다이즘과 네오다다이즘의 차이
네오다다이즘은 새로운 다다이즘이라는 뜻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추진된 전위예술운동.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로 불려졌다.
네오 다다는 형상을 부활시키면서 특히, 국기, 인쇄물, 달력, 사진 등을 그림에 적용함으로
써 주제를 세속화시킨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네오다다이즘은 모든 전통적 가치나 이성의 우위 및 예술의 인습적 형식에 도전해 미의 가치 체계를 바꾸려고 했다.

초현실주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r_kimpo&logNo=110113154812
추상표현주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3396a
앵포르멜 =http://blog.daum.net/boaca/2821231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의 가장 큰 차이점: 앵포르멜은 프랑스, 액션 페인팅은 미국.
비슷한 시기(2차 대전이 끝난 후), 비슷한 성향(자유롭고 즉흥적인 추상화)을 보인다는 점에서 같은 운동의 다른 명칭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차이점들이 있다.
앵포르멜은 기하학적 추상의 냉정함, 차가움에 반대하여 서정적인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추구했다. 자유롭게 선을 그린다든지 재료의 질감을 살린다든지 물감을 뚝뚝 떨어뜨려 어떤 '정형'을 부정하고 무정형(앵포르멜)으로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액션페인팅 또한 물감을 뚝뚝 떨어트리는 등(대표적으로 잭슨 폴록)의 유사한 기법을 보였지만, 액션페인팅에서 중점을 둔 것은 그림이라는 결과보다는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액션)이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절대주의 다다이즘에 대하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inhancolor&logNo=20144703284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http://cafe.daum.net/aigonzi/45d1/174?docid=Ndj6|45d1|174|20030403003202&q=%BE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elemi&logNo=60064237395&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DE%C6%F7%B8%A3%B8%E1

알프레드 바 Alfred H. Barr는 추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을 때 진정한 '추상미술' 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던 칸딘스키는 인간의 내적 필연성,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추상의 도래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연대신에 인간의 사유작용을 표현하는 것이 추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추상미술은 분명히 20세기의 발명이다.

추상은 1914년 제1차대전이 발발할 무렵인 1910-1913년 사이에 유럽에 감돌았던 전쟁의 기운과 함께 탄생되었다. 러시아의 말레비치와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제1차대전보다는 1917년에 봉기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추상회화를 탄생시켰다. 1930년대를 거쳐 형식적으로 관습화된 추상미술은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다.
표현적 추상은 ' 추상표현주의' 라고 명명되면서 미국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창조자에게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고 또한 관람자에게는 창조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절대논리의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의 유래는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추상표현주의' 용어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유럽에서 일어난 표현적 추상인 '앵포르멜' 운동도 포함되고, 더 넓게는 표현적인 느낌을 주는 추상 모두가 추상 표현주의에 해당된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정으로 미국적인 미술사조이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작가 개개인의 작품의 유사성이나 어떤 공통된 프로그램과 특정한 미술개념을 내보이기 위해 집단화된 미술그룹이 아니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선언서를 발표한 적도 없고 행동지침이나 전체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젊은 미술가들은 미국 미술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고 독자적으로 조형적 형태를 발전시켰다.
액션페인팅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캔버스 기능의 새로운 정의를 의미한다. 캔버스는 실재 혹은 허구의 대상을 재창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 각자의 행동을 위해 제공되는 행동의 장이 되었다. 액션페인팅은 신체를 통해 정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폭발하듯 분출되는 감정과 본능적 직관을 신체행위를 통해 캔버스에 표현하는 것을 '액션 페인팅'이라고 명명한다. 1952년 미술평론가이자 시인이었던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고 그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의도를 갖고 화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우연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위해 행동을 결정하고 화면과 관계를 맺는다.
잭슨 폴록이 추상표현주의의 발전에 미친 결정적 영향은 캔버스를 이미지가 탄생되는 '무한한 장'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회화의 공간은 화가, 물감, 캔버스 간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신체의 제스처에 의해 계속적으로 뿌려지는 물감의 분출은 화면을 바탕과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 복합적인 세계로 만든다. 화가는 화면의 구성을 정교하게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자유로운 신체행위 속에 내재된 무의식에 의해 회화의 공간이 결정되도록 내버려 둔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동양미술에 관심이 깊었다. 흑백의 대담한 색조, 여백의 존중, 힘찬 속도로 그어지는 선 등은 외형적으로 동양미술과의 접근을 가능케 했다. 극동의 서체 역시 팔의 힘과 속도감을 중요시 여긴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힘찬 기백을 보여주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에서 새로운 추상의 조형성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폴록의 격렬한 신체행위만큼 강렬하지만 또 다른 방향으로 액션 페인팅을 발전시킨 주요 작가는 네덜란드 태생의 미술가 윌렘 드 쿠닝이다. 그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1916년부터 1925년까지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26년 미국으로 온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자코메티를 연상시키는 인물화, 초상화를 그렸다. 그 후, 고르키의 친구가 되었으며 고르키를 통해 추상표현주의와 연관될 수 있는 젊은 미술가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1950년경부터 회화에서 주제는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다시 구상적 형상을 채택하였다. 그가 채택한 형상의 이미지는 '여인'이다. 쿠닝의 '여인' 연작은 성의 상징이나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여신을 연상시키며 또한 뭉크의 회화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 형상의 여인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추상표현주의자들 개개인의 양식은 독자적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장식용 회화가 아니라 거대한 캔버스을 사용해서 화가, 관람자, 회화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고 또한 벽화와 같은 개념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바라볼 때, 관람자들은 회화에 둘러싸여 마치 어떤 환경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관람자는 회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화면의 애매한 공간으로 인해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이 같은 추상표현주의 특성은 액션 페인팅과 1950년대에 크게 발전하는 색면파 화가들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색면파 화가들은 액션 페인팅 화가들과 달리 화가의 감정 혹은 본능적. 감성적 반응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정화시키고 절제시키면서 철학적 의미를 회화에 부여하였다. 액션 페인팅과 색면파라는 이 두 개념은 추상표현주의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불리던 뉴욕화파의 커다란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액션 페인팅이 신체의 제스처를 가지고 우리를 회화의 세계로 안내하였다면 색면파 회화들은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색면파의 대표적 화가로는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크리포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 아돌프 고틀리브등을 꼽을 수 있다.
http://www.google.co.kr/search?q=%EB%B0%94%EB%84%B7%EB%89%B4%EB%A8%BC&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pDYGT4HvMPCZiQfshv3RDA&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8Q_AUoAQ&biw=1680&bih=855-바넷뉴먼

1960년대에 들어오면 뉴욕 화단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열기는 시들해지고 대중매체를 이용한 새로운 미술사조인 '팝 아트' 가 일어나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신진 세대들이 합류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탐구된다. 후기 회화적 추상화가들은 화면의 공간으로 착각될 수 있는 어떠한 깊이도 용납하지 않았고, 평평한 표면을 지닌 캔버스와 완전하게 일치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완전평면의 형태들을 지닌 자유로운 색채를 강조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를 계승한 제2세대의 아류들은 아니다. 엘즈위스 캘리 같은 화가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평면적이고 명확한 형태들은 몬드리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
전후에 파리 화단을 중심으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비견할 만한 미술운동이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뒤뷔페, 아르 브뤼라고 불리는 코브라 그룹 작가들, 알레친스키 등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본능을 원색과 거친 재료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찾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르통, 슈나이더 술라주, 마디외 등이 신체 제스처를 이용한 표현적인 붓놀림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표현기법에서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정신의 풍요로운 자유와 본능의 자발성에 의한 무정형의 형태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자 하였다. 그들이 탐구한 미술형식에 '앵포르멜', '타시즘', '다른 미술'이라는 용어가 붙었다.
앵포르멜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 추상의 차가운 면에 대응하여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었고,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타피에가 이를 앵포르멜(非定形)이라고 칭했다. 정해진 형상을 부정하고 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의 효과를 살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하였으며, 이후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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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추상미술의 탄생 - 미래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ss003&logNo=1401392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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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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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미술,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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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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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재로 들어가기
1960년대 이후
입체주의
여러 동향의 꼴라쥬
미래주의 행위예술 ........................................
미술작품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다다의 이벤트에 도전, 사진도 하나의 예술매체로 인정됨

1962년 아트포럼에서 열리는 ‘아상블라주미술’기획전의 새로운 예술에 비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과장 레스터 롱맨교수의 견해를 게재하며 비판함. 아래의 작가들의 작품 경향이 점점 주류문화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 바넷 뉴먼(앞장에서 참고), 이브클랭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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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 ‘모노그램’ ‘침대’
세자르의 조각
장탱글리의 조각품
http://www.google.co.kr/search?q=%EC%9E%A5%ED%83%B1%EA%B8%80%EB%A6%AC&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DzwGT46hAauZiAel5tH7Bg&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4Q_AUoAQ&biw=1680&bih=855
앨런 카프로
클레어즈 올덴버그
짐 다인
레드 그룸스 등의 해프닝작품들

-네오다다
로버트 라우센 버그와 제스퍼 존스- 일상에서 주제를 끌어내 특이하게 사용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offjflalfla&logNo=20068333614
그들은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 뒤샹은 그가 선택하고 구입한 미술작품이라 규정했던 대향생산물을 지칭-레디메이드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가장 초기의 레디메이드- 자전거 바퀴, ‘똥개 R. MUTT’라는 서명이 기재된 소변기 샘FOUNTAIN은 최악의 평을 얻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한 목적은 수없이 다양한 작품 들 가운데 미술작품의 고유성이라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술작품에서 찾는 어떤 것인가, 사물에 관련된 작가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아상블라주의 핵심적인 개념 2가지- 어떤 이미지나 사물을 모아 미술작품을 만들어도 원래 속해있는 일상적 속성은 그대로다.
- 작가가 개의치만 않는다면 예술창작과 무관한 재료와 기법들의 자유롭게 사용가능
아상블라주와 레디메이디의 차이
레디메이드는 큐비즘(입체파) 시대에 뒤샹이 도기로 된 변기에 ‘레디메이드’란 제목을 붙여 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이나 장소에서 옮겨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드디어는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만이 남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또는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짐승의 뼈 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으로 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상블라주와 레디메이드의 차이점이라 한다면 둘 다 기성품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아상블라주는 여러 개 잡다한 제품을 한데 모아 작가에 의해 물리적으로 재창조되는 의미가 강하고, 레디메이드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인 기능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정신적인 재창조의 의미다.

1950년대 중반-재스퍼존스의 ‘성조기’ -사물과 상징을 그렸으나 색 선 기하학적 형태의 배열로 봄.
-실제 성조기는 천조각에 여러 색이 칠해진 것으로 존스의 회화보다 더 실제적이거나 3차원적이라 할 수 없다. 사물성을 더 지녔다고 말할 수 없다.
-1950년대 후반
평범한 것에 대한 관심,,우연성을 수용하려는 의지 (인생사는 우연일뿐이라는 인식- 다다이즘의 유산), 시각정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추구 -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라는 두 가지 사조로 이어짐.

-1960년대 초: 라우센버그http://www.google.co.kr/search?q=%EB%9D%BC%EC%9A%B0%EC%84%BC+%EB%B2%84%EA%B7%B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hUAGT9m3KqGTiQfGpu2-BQ&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wQ_AUoAQ&biw=958&bih=847
페인팅작업에 이어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한 이미지+손으로 그린 표시한 연작시리즈 ( 이런 이미지는 미술의 역사, 대중매체로부터 가져온 것, 신문 뉴스의 이미지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됨
팝아트- 1960년대 초엽 인정받는 미술사조
-앤디워홀,
-클레이즈 올덴 버그,
-톰 웨슬리만,
리히텐 슈타인은 만화속에서 하나의 프레임을 선택한 뒤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을 가하여 확대한 다음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하였다. -창조적이기보다 면밀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그려짐. 회화적이고 자유분방한 추상표현주의 방식으로 하지 않고 만화원판에 인쇄된 망점을 캔버스위에 하나하나 옮겨 그렸다. 감정의 배제로 해석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브레드, 나는 네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알고 있다’와 같은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미술에 대한 생각이 확실하다.

--1962년 팝아트 심포지엄
-대중잡지, 클로즈업 영화사진, 빌보드 뮤직쇼 TV를 통해 안방까지 파고든 방송 이미지는 파급효과가 크고 지속적이며 강제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미지로서 사회와 미술가들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
-팝아트가 형식면이나 내용면에서 새로이 이바지한 것이 있는가
-제임스 로젠 퀴스트의 ‘포드와 함께 사랑해’, ‘F-111’에서 보듯이 예술적 상표가 되어 버린 스파게티 통조림은 잭슨폴록의 작품에서 보듯 얽히고 설킨 물감흘리기를 연상한다
-앤디워홀의 수프깡통, 코카콜라 병 화폐 뉴스사진유명인과 같은 모티프의 반복도 존스가 알파벳과 숫자로 이미 시도한 방식이다. 존스는 캔버스의 중심에 핵심이 되는 주제를 위치시키고 나머지는 주변으로 퍼져나가게 놓는 구도대신 캔버스의 모든 부분을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추상표현주의에서 제기된 문제점의 해결책)
-왼쪽모서리부터 오른 쪽 바닥까지 숫자열을 배치하는 방법도 마찬가지
-앤디워홀- P18면의 ‘혼자하세요, 꽃’ 그림은 캔버스 화면을 숫자놀이 세트처럼 그려서 존스를 비꼬았다.
-벽에 걸린 좁은 선반에 켐벨수프깡통을 32개 전시하거나 콜라병, 저금통장용 스탬프 화폐이미지 반복-상품과 같은 미술작품이라는 개념강조 . ‘브릴로 상자’에서 그러한 개념을 확고히 드러냈다.

-1963년 앤디워홀의 인터뷰
죽음에 대한 이미지에 심취되었다 밝힘
-타블로이드판에 실린 재해사진, 자동차사고 희생자, 전기의자, 인종폭동, 북미지역 1급살인 현상수배범, 남편의 사별을 겪은 재클린 케네디의 슬픔, 그 당시 자살한 마릴린 몬로, 그 무렵 몹시 아팠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얼굴은 앤디워홀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이미지였다.
-휴일에 라디오를 켤 때마다 한결같이 400만명이 죽게된 것이라는 식의 소식에 영감이 떠올랐다. 아무리 끔찍한 장면이라도 반복되면 그 장면에 무감각해진다는 것, 반복된 속보는 즉시성이 떨어지고 보도하는 매체로 흡수되어 버린다.
-뉴스와 미디어는 편재하며 평등하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미래에는 누구나 잠깐의 유명세를 누린다.우리 모두는 코카콜라를 마신다. 미국대통령이라 해도 길거리 부랑인보다 더 좋은 코카콜라를 마실 순 없다.
-미술이 수프깡통, 비눗갑, 시리얼 상자와 같이 상품같이 여겨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라 불렀다. 도와주는 조수들을 공장 조업라인에 비유했다.
하지만 리히텐 슈타인처럼 제작방식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행위였다. 이미지 색채선정, 실크스크린인쇄과정에서 나오는 수와 같은 부분을 어떻게 작품 속에서 정확하게 도입시킬까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이는 워홀이었다. 팝아트의 주제가 진부하다는 것은 비평가들에게 하나의 모독이 되었다. 재료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 작품으로 탄생, 미술이 인생에게 주지 못한 것을 준다고 말한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했다.

-팝아트의 형식적 기원-추상표현주의다. 
앞선 동향들과 소통을 위해 앞 세대에 반발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계승하기도하면서 세대간의 긴장관계를 생성해 냈다.
로젠퀴스트의 스파게티 통조림-잭슨폴록 환기
리히텐 슈타인-현대미술의 유산을 재포장하면서 신선함을 재공했다.
http://www.google.co.kr/search?q=%EB%A6%AC%ED%9E%88%ED%85%90+%EC%8A%88%ED%83%80%EC%9D%B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1kMGT_iPI_CSiAf8lpTOCA&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CMQ_AUoAQ&biw=1680&bih=855

-1961년 클레이즈 올덴버그
이전에 상점에 쓰였던 작업실을 다시 상점으로 환원시킴. 철사틀로 토대를 만들고 석고에 적신 모슬린을 붙여 추상표현주의적인 채색모형들을 진열해놓고 그것을 팔았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논의와 조각의 기능성을 논하는 미술동향을 가져왔다. 연재만화를 이용하는 리히텐슈타인도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기존미술의 페쇄된 서술방식을 일상생활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올덴버그 상점에서 팔리는 각각의 품목들은 다루어지는 방식에 따라 올덴버그의 조각작품이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서 집으로 가져갔고 그것들을 마치 조각작품인양 취급했던 것이다. 자잘한 물감얼룩으로 채색된 것이 아니라 색채가 물질 그자체가 되어버린 새로운 조각품들은 그것의 모델이 되는 사물과 실제로 크기도 비슷했다. 그의 실험작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에게도 놀라울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는 외부형태를 꿰매어 만든 다음 그속을 솜으로 채워넣었다. 그결과 전통적인 조각기법이나 조형틀 위에서 모델링하는 기법처럼 바깥쪽에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쪽부터 형태가 만들어졌다. 부드러운 재료르 사용했기 때문에 작품의 최종형태는 작가가 아니라 작품의 무게중심이 결정지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복제물 조각들은 비구성적인 것이었다. 또한 올덴버그는 조각의 부드러운 속성으로 조각에 회화적 요소를 가져왔다. 이는 딱딱한 형태에 희미하게 만들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하기이다.

팝아트는 북미지역의 현상이었다. 일종의 사회적 리얼리티를 다룬다고 볼때 그안의 구성원 그 리얼리티와 함께 전개되는 미국적 세계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팝아트는 미국적이다.
그러나 1950년대 영국에서 이미 사용되던 용어로서 리처드 헤밀턴 에두아르도 파울로치 나이절 핸더슨 피터 블레이크 등의 작품과 연관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에 초점을 두었으나 먼시각에서 미국문화를 바라보고 성찰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미국팝아트의 역동적인 개방성과 비교하여 고루해보인다고 평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업은 팝아트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업들이었다. 그후 영국의 리처드 스미스 애런 존스, 데릭 보시어 , 피터 필립스, 미국출신의 키타이, 데이비드 호크니 등은 매스미디어나 주변도시거리에서 발췌한 조형적 소재를 사용했다.

제니퍼 존스와 데이비드 호크니: 폴 헉슬리 존 호일랜드처럼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동시대 작가들과 가까웠다. 캔버스크기를 최소화할 것을 권장하거나 평면성을 강조한 미국 후기 추상표현주의의 조류에 맞춰 캔버스가 벽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돌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호크니: 추상적 요소와 구상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혼합, 낙서화적인 표시, 십대들의 언어를 이용항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표현했다.-p28 -[서로 달라붙어있는 우리 두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를 통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다녔다.
http://www.google.co.kr/search?q=%EB%8D%B0%EC%9D%B4%EB%B9%84%EB%93%9C%ED%98%B8%ED%81%AC%EB%8B%8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jEQGT6iuIY-hiQf2zMmgDg&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8Q_AUoAQ&biw=958&bih=847
리히텐 슈타인의 [왐wbaam]은 올덴버그의 [상점]처럼 시간과 운동의 문제에 몰두했다. 미사일의 발사와 폭발이 다른 시간대의 사건이나 시간의 이동성이 작품속에서 통합되어 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는 구성주의에서의 일반적인 관심, 나움가보의 초기 움직이는 조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발전했다. 드니르네 화랑을 중심으로 확산, 다양한 문화권의 작가들이 모이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아감,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르 파르크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라파엘소토 스위스의 장탱글리는 동력으로 움직이든 아니든 움직임과 관련된 작품을 제작[p30 –17]. 1950년 말 소토의 [진동구조], 1960년 말 제작된 [모호한 공간을 가진 큐브]에 이르기까지 환경적 영역은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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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컬 아트-옵아트 op옵은 팝아트의 팝pop과 의미상 유사성을 가진다.
패턴으로 된 화면에 대한 관심, 헝가리 출신 빅토르 바사렐리 프랑스인 프랑수아 모렐레, 미국의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치, 뒤샹이 혐오했던 미술, 오로지 망막을 자극하는 미술로 퇴행한 것처럼 보인다. 바사렐리(p30-18의 행성의 민속)의 격자무늬, 라일리의 (p31-19트위스트)작품에서 볼 수 있는 흑백선들에 의한 현란한 효과는 팝아트보다 물리적이다. 옵아트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움직이는 환영이 마치 자신들의 육체적인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키네티즘kinetism 루미니즘luminism은 암스테르담의 헤르만 더프리스, 뒤셀도르트의 하인트 마크, 오토 피에네 귄터 웨케르(p32-20크레이스, 크레이즈)가 속해 있었다.
빽빽하게 못이 박힌 웨케르의 패널작품은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빛이 사라졌다 분산되었다 했다. 이탈리아 루치오 폰타나가 빛과 공간의 예술이라고 정의 내린 전후공간주의 와 유사하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p33-21 두사람)와 마리오 메르츠는 1960년대에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팝아트와 비수하게 거울로 된 평면에 사람들을 콜라주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남자]나 [두사람]과 같은 작품을 볼 때 관람객들은 스스로 묘사된 인물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프랑스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아르망 다니엘 스포에르리 이브클랭, 세자르 니키드 생팔, 장 탱글리의 작업을 영국의 팝아트와 차별화하여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이라고 명명했다. 용어적 구별은 이념적 싸움의 전술이었다. 1950년대 열린 미국 작품 순회전시회들은 뉴욕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이에 레스타니는 팝아트를 포함한 상위개념으로 누보레알리즘이란 용어를 만들어 문화권력의 중심지가 변하지 않았음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의도였다. 그는 심지어 리히텐 슈타인이나 앤디워홀의 눈속임기법을 터무니없는 시도, 용두사미로 끝날 시도라 부르며 2,3년이면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누보레알리즘은 1960년 밀라노전시회를 계기로 생성됨. 탱글리 아르망 클랭, 레옹앵스 자크 드 라 빌글레의 작품들이 생성되었다, 특히 앵스와 드 라 빌글레(p36-24 분노)는 찢어진 포스터 조각으로 꼴라쥬를 제작, 오랜 시간 비바람에 방치된 듯한 흔적을 재생하고자 의도적으로 조작했다. 미국작가와 프랑스작가의 차이는 세자르(p35-23노란색 뷰익)와 존 체임벌린의 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은 모두 낡은 자동차이다. 그러나 세자르는 차량파쇄기를 이용하여 자동차 압축조각을 만들었지만 체임벌린은 쿠화재 혹은 [루시 핑크 양](p35-22 )같은 구부러지고 접힌 철판을 추상조각을 제작하는 데 이상적인 물질처럼 사용하고 있다. 차체금속은 잘 휘어지지만 원형을 유지하며 색깔도 남아 있어 얼마간의 회화적인 효과를 연출해준다.

클랭의 전시회
[텅빔]은 물의를 일으킴, 화랑을 찾은 이들은 텅빈 공간을 직면했다. 2년 후 [꽉참]전시회에서는 유리상자안에 쓰레기를 가득채워 ‘쓰레기통’을 확장하는 의미로 전시장 안에다 여러대의 수레에 담긴 쓰레기를 쏟아붓는 작업을 했다.
다니엘 스포에리의 [다리미]와 같은 아르망의 [덧그림]연작은 위에 쌓인 오브제나 내용물을 그대로 식탁 패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아르망의 많은 아상블라주작품들은 똑같거나 유사한 오브제들로 유리케이스를 채우는 방식이었다.
[아르테리오스 클레오즈p38-26]은 포그와 스푼으로, [철제]는 여러 종류의 가스 버너로 만든 것이다. 야요이 쿠사마의 [항공우편기스티커 p38-25], 워홀의 눈속임기법적인 그림[유리취급주의], 누보레알리즘 작가 마르시알 레스 밈모 로텔라 , 크리스토 잔클로드 의 오브제 포장 작업- 초현실주의 작품의 원형인 맨레이의 [이지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의 맥을 잇는다

-미국에서 해프닝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행위가 환경으로 확장된 것임을 보여준다.

-누보레알리즘에서는 쇼맨십이 강하다. 누보레알리즘에서는 작가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중요하다. 클랭이 특정 푸른 색 안료를 자신의 고유한 색인 인터내셔널 클랭블루라고 지칭한 후 그 푸른 색 물감을 몸에 묻힌 누드여성을 클랭의 지시에 따라 캔버스 면에 몸을 굴리면서 자국을 남기는 작업 [인체 측정학]연작이 있다. 아르망의 분노는 사물이나 도구들이 과격하게 파괴되는 장면을 포착하고자 부수어진 사물의 파편을 화면구성속의 조형요소로 고착시켰다. 폐품기계들로 만든 탱글리의 움직이는 조각은 스펙터클한 효과에 초점을 맞추었고 니키드 생팔은 총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물감을 분사했고 클랭은 불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워 미술가는 자신이 미술가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것이라도 미술로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했던 뒤샹의 주장을 빛내주었다.

피에르만조니모델에 직접서명하여 모델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 자신의 대변을 캔에 담아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판매하기도 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만든 [미술가의 숨결 p39-27]은 유리병을 사용한 뒤샹의 작품[파리의 공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영국의 존 레섬
아르망의 [분노p36-24]에 맞서 스프레이식 분사기에 약한 힘을 가하는 기법으로 순간적인 드로잉작업을 시도했다. 아르망의 작업은 단지 완성된 이미지가 아닌 단지 미니멀리즘적인 사건의 흔적이다. 아르망의 인체측정학을 연상시키는 존 래섬은 책을 사용해 조형구조물과 아상블라주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상불라주 작품의 세부는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여러 형태로 배열할 수 있다. [위대한에스테이트아저씨]는 여러 장의 판으로 이루어진 표면에 책들을 고정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채색된 페이지들이 철사 스프링으로 엮여 넘겨볼 수 있도록 고정되어있어 3가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유동적인 것은 스웨덴의 외빈드 팔스트룀의 ‘다양성의 회화’에서 볼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자석 경첩이 부착된 만화형의 조각들이 표면에서 움직이면서 다른 형태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게임처럼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사항을 팔스트룀은 그림을 만드는 기계장치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우연성과 작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결합시킬 수 있었다.
-팝 아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쓰기 시작하는 데 신문에 실린 재난과 죽음의 기사 화려한 것에 몰두하는 워홀의 태도는 리히터의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 [올림피아 p40-29 ]와 연쇄살인범에 살해된 [8명의 수습간호사]. 리히터와 폴케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아이러니는 독일 미술만의 정치색이 느껴진다.

-독일작가 브레머는
보스텔의 작품과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이미지작품들을 대조하면서 “라우센버그에게 케네디[p13-5]는 얼룩진 색깔뿐이다. 그러나 보스텔의 케네디 [베를린 피베르p45-33]는 정치가이자 정치적 배경속에 자리잡은 인물로 라우센버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라고 말한다.

리히텐슈타인이 피카소와 모네를 시사만화처럼 묘사하고 추상표현주의다운 시도를 할 때 폴케는 [모던 아트 P43-31]를 발표했다. 얼룩과 낙서로 이뤄진 추상적 구성은 흰색의 경계선으로 채색되어 있고 추상화가 아니라 한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그림 맨 밑 부분 가장자리를 따라 작품 제목이 씌어 있다. 작품은 모던 아트임과 동시에 우리가 결국 부딪쳐야할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해주는 소중한 지침이었다. 다양한 천들을 화면에 사용하여 갤러리라는 고상한 공간속에서 감상할 때 실생활을 생각나게 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onodonsu&logNo=100009572474&viewDate=¤tPage=1&listtype=0시그마 폴케

-볼프 보스텔 -
화보잡지에서 사진을 골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기법을 사용했다.[콘트리트스레이브] 정치적으로 분단된 독일과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는 플럭서스 회원이 된다. 그의 [US F-111]은 분단된 정치적 현실을 담은 작품.
나는 일상에서 행동형에 대한 규칙이 어떤 모델의 행동으로부터 얻게 되는지 또 내 안에서 생겨나는 충동이 일상생활에 적용되어 편안함, 어리석음, 억압과 맞설 수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의 전위적인 미술의 한 방향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플럭서스라는 용어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1962년 독일 헤센주(州)의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특히 플럭서스는 처음에는 미술에서 출발하였으나, 곧 예술의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콘서트·이벤트·출판물·선언문 등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脫)장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흐름의 주요 참여자로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등. 미국의 해프닝과 다다이즘의 생각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미술 음악 문확을 넘나들며 작업을 했으며 상황주의 운동과도 긴밀했다. 이사조는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사회적 조건을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의 방법을 꾀했고 자신들의 성격을 드러냈다.
http://www.google.co.kr/search?q=%EC%9A%94%EC%85%89%EB%B3%B4%EC%9D%B4%EC%8A%A4&hl=ko&newwindow=1&prmd=imvns&source=lnms&tbm=isch&ei=LokGT6z3M4idiALC_7RL&sa=X&oi=mode_link&ct=mode&cd=2&ved=0CCEQ_AUoAQ&biw=1280&bih=823요셉 보이스
상황주의 네오다다이즘적인 취지를 담고 있다. 보스텔의 플럭서스활동과 그가 만난 요셉보이스는 노골적인 정치성을 띠고 있다. 리처드 해밀턴은 영국 국내정치를 해부해댔다.

[거대한 런던]은 신문에 실린 믹재거와 마약복용혐의로 체포된 미술상 로버트 프레이저의 사진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과연 그 시기에게 자유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키엔홀츠의 작업은 매춘, 낙태, 궁핍과 같은 생의 어두운 단면들을 중심적인 위치에 가져다 주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ah0502&logNo=130083924014
앤디워홀 [은빛재난: 전기의자 p46-34]에는 단색패널과 이미지를 함께 사용해 추상회화가 계속발전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사회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했다.

모리스 루이스
[펼침]연작에서 느슨한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물감을 대각선방향으로 흘리는 기법을 사용했다. 자르고 펼치는 작업으로 그림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베타엡실론]과 [오미크론 p47-35] 잭슨폴록의 흘리기기법과 색칠을 하지 않는 캔버스에 물감을 침투시킨 얼룩으로 하나의 통합된 평면을 창출해낸 헬렌 프랭컨 탤러의 영향을 받아 철저하게 평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붓놀림이 아니라 중력의 영향으로 물감을 흐르게 하는 기법이기에 내용이 부재한 이미지.http://blog.daum.net/leeys6870/5643307
http://www.google.co.kr/search?q=%EB%AA%A8%EB%A6%AC%EC%8A%A4%EB%A3%A8%EC%9D%B4%EC%8A%A4&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losGT5CZOuWRiQLXgbFR&sa=X&oi=mode_link&ct=mode&cd=2&ved=0CCIQ_AUoAQ&biw=1280&bih=823

케네스 놀런드도 [노래p47-36] 평면효과의 강조를 위해 캔버스에 밑칠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붓질은 보이지 않고 새로 나온 아크릴 물감의 밝고 직접적인 색깔을 사용되었기에 추상표현주의의 행위적 색조와는 차이가 있다. 놀란드의 평면적인 추상화는 모더니즘의 궁극적인 자기실현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회화가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을 실현했다, 그후로 회화는 조각의 특징인 3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앤서니 카로는 쓰레기로 만든다 해도 유럽미술에는 순수하게 미술적인 요소가 있었다. 미술에는 어떤 장벽도 없고 규칙도 없다는 것을 미국미술이 보여주었다.
그는 강철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판과 빔, 막대기, 튜브 등을 용접하여 조각작업[ 대초원 p51- 39]에 들어갔다. 추상작업들이며 각부분의 전체적인 형태안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완성된 조각품을 단색으로 채색하는 기법을 통해 단일 형태 강조

루이스와 놀런드의 뒤를 이은 카로는 다채로운 조각들은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 되었다.
카로의 작품은 같은 현대미술사조인 미니멀아트와 공유되는 점으로 작품을 바닥에 직접 설치했다. 전적으로 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조인 미니멀리즘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다른 수단을 이용한 회화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본테쿠는 사각형의 그림틀을 유지했지만 그틀 안에 금속판과 철사로 테두리를 만든 무제평면들을 구성했다.

엘즈워스켈리의 캔버스는 무광택컬러로 뚜렷하게 구분된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렌지/초록 p48-37] 회화인지 조각인지 모르는 것 대신 조각과 회화를 망라했던 피카소 데이비드 스미스 바넷 뉴먼의 노선을 따랐다.

-미니멀리스트는 주로 도널드 주드 로버트 모리스, 댄 플래빈 칼 앙드레 등을 가르켜 경멸적으로 부른 이름이다. 여기에 로널드 블레이든, 로버트 그로스베너, 래리 벨 쥬디 시카고 토니 드랩드를 포함시킬 수 있다..
뒤샹이 사물을 가르쳐 ‘레디메이드’라 칭한 사건과 러시아의 카시미르 말레비치가 흰배경에 검은 사각형 하나를 전시한 사건이 미니멀리즘의 역사적 축을 이룬다.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거부다. 뒤샹은 미술작품의 유일성과 미술작품이 일상사물과 구분된다는 관념을 거부한 것이고 말레비치는 미술은 복잡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한 것이다.‘
도널드 주드는 [특별한 오브제]라는 평론에서 당시 만들어진 작품들은 회화로도 조각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미술을 3차원 작품이라고 불렀다. 그린버그는 미술가들이 3차원에 몰두하는 것은 3차원이야말로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을 나누는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앞선 세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은 감정적이고 표현적인 내용으로 가득차보였지만 미니멀리즘은 단조로운 색상에 제품을 설계한 듯하고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잭슨폴록이나 웰렘 드 쿠닝의 작품을 가르켜 ‘충만해 있다’고 평가했다면 상대적으로 평평한 사각형합판 한 개가 전부인 모리스의 [무제 p55-41, 42]의 황량함이나 벽돌을 바닥위에 늘어놓는 앙드레의 극단적인 단순함, 나무상자같은 구조물에 자신이 좋아하는 붉은 색을 온통 칠해놓은 도널드 주드의 제목없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투박함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주드는 이런 무미건조한 미술의 외양은 기존의 미학적 관점이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작품이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를 띠는 것은 구성적인 효과를 이용하지 않으려 함이다. 구성을 하게 되면 작품 속 부분들 사이의 내부적 관계가 강조되는 나머지 작품이 전체적으로 갖는 효과가 반감된다. 주드는 [무제]에서 가로놓인 막대와 그 아래 일정하게 달린 물체들을 감상자가 하나의 전체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 {게티의 무덤 p55-43]은 화폭에 그려진 검은 띠 모양의 패턴이 캔버스모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게티의 무덤]을 보면 일단 캔버스의 크기 표식들을 구성하는 원리가 결정되면 그 다음 작업은 붓의 한획 한 획 가지런히 맞추어 그림을 제작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엔 합리적이고 내재해있는 질서가 아니라 순서대로 연속된 무언가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질서인 것이다. http://blog.daum.net/misulmun49/15961489
구성적 효과를 배제하는 것은 그 자체에 유럽적 전통구조 가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와 조각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들을 반복한다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지 최신의 진보된 형태를 개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다.

바넷뉴먼은 단색의 평면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지나가는 줄무늬를 표현한 [하나됨]은 형상과 배경의 관점에서 그림을 보았던 기존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의 짚zip이라는줄무늬는 평면을 분할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줄무늬가 공간성을 지니는 한 그 거대한 물리적 크기는 관객을 압도하게 된다. 6미터에 달하는 작품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p59-44]은 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감상자를 둘러싸는 일종의 채색된 환경을 제공한다. 이런 환경적 특성은 1960년대에 점차 중요성을 띤다.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의 뿌리는 미국의 실용주의 전통이라고 보았다.
찰스 실러나 찰스 더무스의 회화와 사진에서는 미국의 공장풍경이나 가족생활 모습에서 영웅주의를 찾으려는 시도가 드러난다.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기법을 쓴 워홀이나 환영주의를 꺼리는 주드의 성향과 맞물려 있다.
주드는 사실에 대해 충실하다. 실용주의에서 진리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물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거나 지시하여 얼마나 비슷하게 묘사했느냐가 아니라 메타토를 맏고 있지 않으며 어떤 형이상학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무제로 불리는 작품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일단 이름이 붙으면 그 이름에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랭크스텔라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니멀리즘은 비구상적 비지시적 추상성 때문에 종래의 미술감상기법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 삐딱한 묵묵함 뒤에는 다른 요소들이 있었다. 작품에 있어. 주드는 철 강철 구리 알루미늄등으로 얇은 두께로 높은 강도를 유지하여 의도한 모양과 크기로 제작하여 정교하게 만들기도 쉬웠다. [영구설치 작품 p63-46] 이들 재료의 표면은 목재보다 다양한 색깔을 띠거나 입힐 수 있었다. [무제p62-47]에 이용된 호박색 유리는 아예 재료자체가 색깔을 띠고 있어 표면에 색을 입힐 필요가 없었다.

댄플래빈은 어디에도 색깔을 입히지 않았다. 플래빈은 1961년 처음 만든 구조물에서 전기 불빛을 이용했고 형광등을 이용했다. 그는 기존관념에 도전했다. 네온관과 부속품을 구입하여 재료에 작가가 개인적으로 손댄 자국이 전혀 남지 않도록 했다.

작가의 ‘부재’는 주드와 솔 르위트 등에 가서는 아예 작가의 주문대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대신 제작하게 하는 방식에 이른다.
작품자체는 유일하지만 작품을 실제로 만든 사람은 작가가 아니다. 네온관과 부속품 등 물리적인 존재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플래빈의 재료는 이들이 발산하는 여러 가지 색의 빛 그 자체이다.[명목p61-45]에서는 형광등을 수직 배열하여 뉴먼의 zip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품제목을 보면 전체는 필연성 없이는 나누어 질 수 없다라는 철학자의 유명한 면도칼 비유를 이용하여 미술 창작의 문제를 순수하고 추상적인 색채라는 기본요소로 환원시킨다.

미니멀리즘은 카로의 구상적 조각과 많은 점에서 다르나 받침대로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마치 회화에서 액자와 같이 조각의 받침대에서 작품을 고립시키고 작품을 어떤 별개의 미적 공간으로 가져가 그것에서만 감상하게 한다. 바닥위에 놓인 작품은 따로 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감상자의 물리적 공간내에 놓인 여타의 물체와 다른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벽돌 목재 금속 재질의 판으로 구성된 칼 앙드레의 작품은 작품과 바닥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작은 물체들을 단순하고 규칙적인 형태로 배열한 앙드레의 조각은 주드가 ‘단순한 나열’이라고 지칭한 비합리적인 질서의 고전적 형태다. 137개의 벽돌을 바닥 위에 한줄로 나란히 놓은 [지레]에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박자는 주드나 워홀같은 팝아티스트들이 즐겨다루었던 주제다. 워홀은 ‘왜 깡통을 그리느냐 는 질문에 내가 많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이십년 동안 매일같이 같은 메뉴룰 먹었다. 똑같은 것을 매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먹었다.

1961년 앙드레는 폴리스트렌조각들을 이용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조각들은 튼튼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간단한 이음매역할만 하는 것을 끼운 채 고정되어 있었다. 앙드레는 이후에는 구성단위를 나란히 단순배열하는 방법을 취한다. p66-49, p67-50]에는
[37점의 작품p67-50]은 36개의 서로 다른 작품을 한데 모아 37번째 작품을 형성한 것으로 대단한 장고나을 보인다. 작품을 몸전체로 경험할 수 있도록 관람객은 이들 평면위를 걸어보도록 되어 있다. 작품의 촉감 금속의 고유한 밀도 소리 걸을 때의 마찰 등이 모두 작품이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요소다.

뒤샹은 망막적인 시각미술에 대해 비난하였다. 종전에 있던 좋다 나쁘다는 평가도 새로운 기준에 의해 내릴 필요가 있다. 주드는 칸트의 합리주의 전통에 반기를 들며 예술 작품은 재미있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은 tv가 흥미를 관람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가고 있다. 예술은 일상적인 사물을 닮아가야할 뿐아니라 관객이 예술을 구경하는 방식도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
주드가 미술작품을 ‘하나의 것, ’전체의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유사하게 모리스도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조각은 게슈탈트적 사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각은 형태가 단순하여 전체적인 모양을 감상자가 즉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blog.naver.com/sotong/40011748864

그림을 들여다보는 경우 감상자는 작품이 제공하는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을 초월했다거나 시간밖에서 일어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 반면 모리스의 [무제 p68-51]앞에 선 감상자에게는 전혀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주장에 반대한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내부를 구성하는 요소간의 관계를 따질 수 없기에 종래의 예술과 같은 방식으로 작품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프리드가 주드나 모리스의 작품을 무의미하다고 비판한 것도 그 상자같은 공허함 때문이기보다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미닐멀리즘의 경우 관객이 아무리 이작품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작품을 들여다보아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없다.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는 미국 텍사스주 포트아서 출생이다. 1946년 캔자스 시립미술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뒤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48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추상표현과의 영향아래 참신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라우센버그의 예술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은 1949년 Art Student Ceague에 가맹해서 ‘단색회화’를 제작하면서부터이다. 단색회화에는 백색회화(全白色 White painting), 흑색회화(全黑色 Black painting), 적색회화(全赤色 Red painting)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우센버그의 단색회화는 그의 첫 개인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제시했던 <백색회화 White painting>는 추상표현주의의 그림들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당혹감을 주는 것이었다. 앨런 케프로우(Allen kapraw)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표현주의의 떠들썩함과 행위가 지배하던 배경에서 이 그림은 관람자를 침묵이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고요와 직면하게 해준다고 했다. 또한 관람자의 그림자만이 텅 빈 스크린 위에 움직일 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참기 힘들어 불편한 마음으로 어정거리는 그들의 이미지가 백색회화에 반영되고 있다고 한 데서 라우센버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불편한 분위기의 조성은 화가가 그림에 대한 어떤 책임도 포기한 채 관람자와 그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라우센버그의 백색회화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사물에 대한 고유색을 회화적인 색채로 보도록 허락하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적 색채의 선택에 대하여 사물들의 속성인 유동성 없는 색채의 완전무결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화가 아니더라도 사실로서 일상의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다. 죤 케이지가 “백색회화는 빛과 그림자의 미립자를 위한 비행장이다"라고 말했듯이 백색그림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사람의 그림자, 빛과 그늘, 무수히 작은 반사광들에 대한 회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말레비치의 ‘白위의 白’과 같은 미학과는 전혀 상반된 견해로서 생활이 예술 속에 직접 융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한 순수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백색회화에 이어 제작된 <흑색회화 Black painting>는 신문이나 잡지를 뜯어 붙인 콜라주 위에 검정색이 칠해졌다. 작품에 칠해진 검은색 물감의 다양한 농도에 의해서 작품이 결정되어지며 이것은 여러 가지 종이의 다른 질감에 의해 각각의 상태가 독특한 진통을 야기 시키는 광범위한 검은색이었다.
라우센버그는 흑색회화들에 대하여 “자기가 나타내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화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어들이지 않는 위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했다. 黑의 경우에도 白의 경우에도 자기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여기에 예술이 있으며 예술의 공격성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매혹적인 범위의 사물들을 자신의 색깔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은 색의 이념이나 본질로서가 아니라 실제 사물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였다. 그의 <적색회화>(그림15)는 활동적인 콜라주의 모자이크 위에 만들어졌다. 콜라주 위에 강렬한 붉은 에나멜로 칠한 좁고 긴 캔버스인 적색회화는 오목한 거울이 그림의 정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붉은 옷, 흰 셔츠, 반사되는 반경은 공간 위에서 축소되기도 하고 팽창되기도 하면서 포착된다. 또한 대상은 끊임없이 움직임을 지니게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그의 단색회화의 절정이자 추상표현주의와의 결별을 상징하는 행위로 1953년 드 쿠닝의 소묘를 지워 버린 <지워진 드 쿠닝>을 발표 했는데,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지운다는 것은 일종의 반항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삭제할 작품들은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작가의 작품이어야 했으며 그 조건에 가장 적합한 것이 드 쿠닝의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라고 한 그는 한때 약속했던 유토피아적 세계의 해결을 제공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드 쿠닝의 예술을 지움으로써 새로운 예술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단색회화에서 바탕에 깔려있던 콜라주의 요소는 1953~1954년에 이르러 점차 화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1955년에 와서는 출처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확실해지면서 화면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콜라주와 함께 점차 오브제가 등장하고 1955년에 와서 이 두 요소가 완전히 결합된 위에 자유스러운 붓질을 가함으로써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른바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이 탄생하게 된다. 회화와 오브제를 결합한 ‘컴바인 페인팅’ 작업을 발표해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컴바인 아트’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은 ‘회화+조각’ 이라는 2차원과 3차원을 동시에 수용하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탄생시켰다. 이는 그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을 실험해가는 작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1955년 이건갤러리에서 작업실 벽에 더덕더덕 붙여놓은 것 같은 사진, 인쇄물, 신문조각 등의 폐품을 결합시킨 이른 바 컴바인 페인팅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침대Bed, 1955>(그림16)를 들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캔버스 대신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이불 위에 물감을 쏟아 부은 것으로써 그림이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란 추상표현주의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회화와 조각, 실재와 허상 사이를 넘나드는 혼성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침대>는 실제 오브제인 침대의 틀을 얕게 만들고 그 안에 누빈 이불, 침대보, 베개 등을 붙인다. 침대를 수직으로 세워 벽에 걸고 그 위에 물감으로 색칠을 하는데, 마치 드 쿠닝과 폴록을 연상시키는 거친 붓 자국의 흔적들이 아무런 재현이나 표현적 의도와 상관없이 화면에 더해져있다. 그러나 화려한 색감과 거친 붓터치는 침대를 더욱 불결하고 추하게 만들며 동시에 오브제가 가진 원래의 성격을 파기하는데, 추상표현주의의 그 영웅적 붓자국은 더 이상 위대해보이지 않는다. 평소 드 쿠닝과 폴록을 존경해왔다는 라우센버그는 그들의 대표적인 회화의 성과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하고 이러한 시도는 그의 컴바인 페인팅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내 그림은 현실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원근법이 현실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이 환상인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내 컴바인 페인팅은 현실적 사실이다.[...]그림은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다.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 틈바귀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라우센버그는 생활과 예술의 결합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서 결합의 원초적 형태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요소들이 그들의 거대한 화면이 아닌 오브제나 조악한 판넬 위에서는 전혀 미적인 요소로도, 아름답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한 작가 개성의 상징도 아닌 단순한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흔적은 오브제와 평면을 추하고 지저분하게 만들며 통일성과 조화를 방해하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산업사회의 폐기물에서 얻어지는 온갖 오브제들을 텍스트화 하여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수집한 쓰레기를 화면에 ‘컴바인’하면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들을 공시적 입장에서 텍스트화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는 텍스트의 잠재적 구조를 나타낸다. 그는 수집한 오브제를 조합하여 거친 붓자국으로 표현했고, 관객들은 그 작품에서 텍스트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라우센버그가 사용한 오브제들은 화면 안에서 서로 종속적이지 않고 등가의 무게를 가지며 각각 이항대립쌍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다.
1959년에 발표한 <모노그램>은 박제된 염소의 몸통에 폐타이어를 끼우고 바닥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꼴라주 위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자유로운 붓질과 함께 모든 것이 회화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컴바인 페인팅으로서 또 다른 역작의 의미를 준다. 냉정하고 단아한 후기 회화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다양성, 변화, 수용이란 주제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엄숙한 고급미술에 대한 허무주의적 도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단절된 요소들의 이질적 결합은 전통적이고 통일된 과거 미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고, 뒤샹과 다다 작가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컴바인 페인팅은 이후 아쌍블라쥬(Assemblage), 또는 설치(installation)로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겠다.
라우센버그의 독특한 형식적 쟝르는 바로 혼합 회화로 조각도 회화도 오브제도 아닌 새로운 개념의 작품인데, <계곡 Canyon>(그림18), <오달리스크 Odalisque>(그림19)에서처럼 평면과 입체가 고전적 방식에 애매하게 뿌리를 둔 채로 전시된다. 고급미술의 재료와 저급한 재료들이 섞이고 그들 위에 뿌려지고 더해진 거친 붓 자국은 미감에 대한 절대성을 상실하게 하고 공간 안으로 침투한 작품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재료들과 아름답지 않음에 대한 수용으로 혼란스럽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밖에도 <코카콜라 플랜>(그림20), <북미산 사슴>(그림21)에서 의자를 거꾸로 매다는가 하면 팝 아트를 선도한 상품의 과감한 선택과 외곽에 날개를 달아 붙이는 재치를 보인다.

"나는 내 작품을 조합된 것이라고 부른다. 즉 조합된 작품들, 즉 조합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떤 범주 속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다. 만일 내가 내 작품을 그림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조각이라고 했을 것이고 내가 그것을 조각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저부조나 회화라고 불러야만 한다고 나에게 말했을 것이다.[...]다다이스트들에게 있어서는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엄중한 검열이었고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에게 있어서는 어떤 움직임을 포함하는 것, 과거를 현재 속에 도입하는 것, 그리고 순간 속에 전체서열을 도입하는 것이 과제이다. [...]나에게 영향을 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속의 마돈나에는 나무, 바위, 성모마리아가 모두 동시에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거기엔 어떤 계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이 작품에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현재 내가 사용하는 기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하지 않는다. 또한 미술에 반대하는 미술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미술을 할 뿐이지 거기에서 어떤 대의명분도 찾지 않는다. 미술은 생활과 전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1960년대 그가 빈번히 사용했던 루벤 레누스와 존 에프 케네디의 형상들은 실크스크린 기법에 용해되어 다양한 이미지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접근현상이다. 그는 1962년 10월쯤 실크스크린을 작업에 수용한다. 실크스크린은 상업적 용도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인데, 두 달 전 그것을 시도한 앤디워홀에게 어느 정도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워홀과는 달라서 기존의 플레이트를 사용해도 물감을 무작위로 선택하거나 마르기 전에 또 다른 색을 덧칠하여 인쇄하는 등, 가장자리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붓자국 느낌이 강하여 상당히 회화적 감성을 갖게 한다. 워홀이나 팝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분인데, 라우센버그는 자신이 컴바인 페인팅이 서서히 지겨워진 1962년부터 또 다른 새로운 창구로 이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먼저 기계적 재생산을 통한 작품은 사회적 현실의 반영으로, 광고나 매체의 상업성, 잡지의 사진 등에서 보여주는 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견해이자 관념에 대항한 해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작품 <Estate>와 <추적자>를 보면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 자유의 여신상부터 맨하탄의 높은 빌딩들, 혹은 발사대에 놓여있는 로켓트 사진부터 루벤스의 비너스까지 그의 재료들은 사진 매체에 의해 생산되는 다양한 정보들을 의미 없이 배열한다. 그들이 갖는 일관된 메시지나 주제의식, 관념도 없고 아름다움을 위한 작가의 노력도 없다. 라우센버그의 이러한 시도는 다다작가 슈비터스(Kurt Schwitters)에게서 그 선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버려진 사물들을 통한 재료로 물성의 확대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근본적 파괴가 슈비터스에서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도전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작가의 정신도 상당히 뒤샹과 닮았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움에서 요구되던 전통적 요소들이 고의적으로 제거된 듯 하다. 예를 들면 꼴라주 작품 <팩텀II factumII, 1957>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붙여진 이미지들, 그 위에 그어진 붓 자국들이 혼돈스럽게 적용되었다. 원근의 무시와 공간의 파괴를 입체파 꼴라주로부터 일부 이어받았지만, 재료의 일관성과 순수미술(fine art)로서의 특수성이 상실되었고, 조화, 균형, 비례, 통일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화면은 마치 오래된 낡은 집의 벽지를 연상시키고 지저분하며 무의미하다. 이성을 넘어서고 미감을 전복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뒤샹과 다다의 후예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관객을 즐겁고 흥분시키는 새로운 감성을 지녔다. 라우센버그의 앞의 말처럼 반대나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일상과 예술이 합치된, 그럼으로써 과거의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이 조합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추상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적 표면 처리는 말 그대로 예술적 측면의 요소로 등장하지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을지 모른다. 때로는 아주 텍스트적이기 때문에, 때론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관객들을 곤란하게 했던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의 창조성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고 작가와 작품의 위상이 다시 위협 받는 단계를 형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팝을 비롯한 미니멀까지 모더니즘과 다른 계열의 미술을 선도함으로 이후 후기모더니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배제와 도입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의 편견은 때때로 바뀐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이런 것들은 변화한다. 과거의 미술은 거의 항상 풍경화의 연속이었다.〔...〕화가들은 풍경을 그리지 않았다. 다빈치가 그 중 한 예이다. 그의 그림은 생명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내게 충격을 준 것 중 하나는 피렌체에 있는 화가는 탐구자, 끊임없는 창조자, 끊임없는 창조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을 이해하는 것은 능동적인 삶을 매장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다. 무용성이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숭고함이다."

라우센버그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환경에서 파생되는 모든 물질들에 미적인 성질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대도시 소비 환경에 의한 폐기물을 사용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도시 부산물을 새로운 가치의 예술품으로 탄생시켰다. 또한 크기에 있어서도 파편인 듯 부분만을 보여주다가도 전체를 드러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공하여 마치 영화의 몽타주와 같은 특성을 지니게 된다. 케네디 사진, 거울, 전등, 탁자, 다리 등의 전혀 다른 사물의 병치는 순간적인 장면의 교체(flashback), 클로즈업(close-up), 초점이동(The sharp and fuzzy focus), 시간의 불연속성(the broken-time sequence) 등과 같은 영화적 수법을 연상케 한다.
라우센버그는 이질적 요소들을 혼성시켜 결과적으로 다양성과 이질성에 관한 미학으로서의 컴바인 페인팅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연속적 상태를 나타내었다. 또한 오브제 자체도 형식에 중심을 두지 않는 복합물을 제시하였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예술 행위를 곧 그의 생활과 직결시킴으로써 이 두 개의 이질세계간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라우센버그의 복합미술은 일상의 물질과 화가의 개인적 어휘, 표현의 공간 등이 혼성되어 나타났으며, 복합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형태를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출처 : 내마음의 캔버스-그림이야기  |  글쓴이 : 홍순이 원글보기

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14th Hour : Pop Art, Nouveau Realism 팝아트, 신사실주의

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14th Hour : Pop Art, Nouveau Realism  팝아트, 신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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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 Dada

Robert Rauschenberg (1925-2008)                                 Jasper Jones (1930-)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난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들 사이에1차 중동 전쟁이 있었고, 1950-53년에는 Korean War, 1955-75년에는 Vietnam War 가 있었다. 50년대에 추상표현주의가 미국과 전 세계를 휩쓰는데, 이에 반대하는 Pop Art 라는 새로운 paradigm 이 1960년대에 나타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자스퍼 죤스가 주축이 된 신다다 Neo Dada 운동은 팝아트로 넘어가는 다리역활을 한다.  

Rauschenberg, Bed 1955   
 
라우센버그는 자신이 자는 침대와 이불 베개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폴락의 action painting 처럼 물감을 뿌리며 덧 바르는 작업을 하며, 추상표현주의를 parody 한다. 폴락이 물감을 뿌리는 action 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표현한다고 하는데, 라우센버그는 침대 자체를 가져와서 침대만큼 작가의 private life 를 표현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 일상의 물건과 painting 이 합쳐진 combine painting 의 개념을 시작한다.

Rauschenberg, Monogram 1956

라우센버그는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린 다음 염소의 박제와 타이어를 결합시켜 붙였다. 폴락은 바닥에 캔버스를 눕혀 놓고 작업을 하는 이젤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되는데 전시할 때는 캔버스를 벽에 세로로 붙여 다시 세운다. 라우센버그는  폴락과 반대로 바닥에 눕혀서 전시를 하면서, 폴락에게 이젤을 버리는 혁명을 가져온 사람이 전시도 눕혀서 해야지  ‘왜 세워서 전시해?’ 하고 cynical 하게 반문한다. 피카소의 꼴라쥬 혁명과 뒤샹의 readymade 로 인해 painting 장르는 끝이 난 것처럼 보였는데, 폴락이 추상을 통해 painting 의 르네상스를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라우센버그는 painting 과 readymade 를 조합한 combine painting 을 가져옴으로서 그림과 조각의 장르를 흐려놓는다.

Jasper Johns, Flag 1954-5 
 

1954년에 27세 청년 자스퍼 죤스가 Flag 를 그리자 마자 모마의 curator 들은 천재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그의 그림을 구입하기에 바빴다. 왜 그렇게 큐레이터들이 사려고 했을까? 깃발 사이의 흰 색면은 신문지를 바른 꼴라쥬 (피카소처럼) 이며, 그 위에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 느낌을 주도록 (추상표현주의처럼) 밀납 encaustic 으로  발랐다. 전대와 당대의 예술 사조와 dialogue 하는 동시에 질문을 하고 있다. 죤스는 ‘이것이 깃발입니까? 깃발 그림입니까?’ 하고 묻는다.

Clement Greenberg 가 추상표현주의를 극구 칭찬했던 이유는 잭슨 폴락같은 훌륭한 화가를 통해 그림이 더 이상 재현을 하지 않고 그림만이 할 수 있는 완전 추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림이 아무리 잘 그려졌다 하더라도 실물보다 못하다는 혹은 story 보다 못 하다는 열등한 자리에 그림은 역사적으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추상표현주의 운동이 나타나서 이제야 가까스로 그림이 부차적인 역활에서 벗어나 캔버스의 평면성을 살리고 재현이 전혀 없는 회화의 궁극점에 드디어 도달했다고 폴락에게 극찬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런데 새파란 나이의 청년 죤스가 나타나 재현이기도 하고 실물이기도 한 깃발을 보이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는 추상표현주의의 이분법적 사고가 예술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며 질문을 던진다. 화가들이 재현에 대한 강박관념과 complex 를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자신이 내 놓은 Flag 처럼 그림이 될 수도, object 가 될 수도 있는데, 장르를 꼭 구별해야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예술에 적용을 시켜야 하는가를 꼬집는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졌던 그림과 화가의 위치를 뒤집은 것이 20세기의 추상표현주의였다. 그림의 역사 80-100년 동안 화가들은 실물 재현을 않하기 위해 표현으로, 추상으로 부단하게 노력을 해 왔다. 이제 겨우 회화의 최고봉에 도달했는데 그동안 아무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을 죤스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추상표현주의? 그게 과연 최고인가? 하고 말한다. ‘미술이 재현 representation 을 하면 어때서?’라고 공격한다.
Jasper Johns, Target with Plaster Casts 1965
 

라우센버그는 object 와 painting 을 combine 해서 추상표현주의를 parody 했고, 죤스는 그림인 것 같은데, 동시에 과녁이기도 한 것을 내 놓고, 추상표현주의를 정조준하여 재현 대 추상이라는 대립각을 지적하면서 ‘왜 쓸데없는 것에 집착을 하고 그래?’ 하면서 사회에서 한번도 의심않던 질문을 툭 던진다. 100년 가까이 재현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가려고 고민해 왔는데 그게 왜 중요한가 반문하니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맥이 쑥 빠진다. 다다운동은 1차 대전 중에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반예술운동으로 생겼는데, 2차 대전 후에 뒤샹의 readymade 를 도입한 후에 한 차원을 높여 Neo-Dada 라는 이름으로  라우센버그와 죤스에 의해 시작되며 팝아트로 건너가는 bridge가 된다.


Pop Art

Roy Lichtenstein 1923-1997                                                  Andy Warhol 1928-1987
                                                      
리히텐슈타인과 와홀은 추살표현주의를 공격한 죤스에게 충격을 받는다.

Roy Lichtenstein, Whaam 1963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1969년대에 만화책 이미지를 차용하여 만화종이의 Vandyke Dot 의 재질이 그대로 드러나게 그림을 그렸다. 만화는 low culture 와 mass culture 의 대표적 이미지인데 high and elite 예술인 추상표현주의와 대립각을 세운다. 추상표현주의는 Partisan Review 에 실리는 글을 읽는 계층이 감상하는 그림으로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으로 포장된다. 리히텐슈타인은 일부러 잡지, 만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저급문화를 가져와서 high art 와 low art 를 모호하게 하는 전략을 쓴다.

Roy Lichtenstein, The Drowning Girl 1963
 

또한 리히텐슈타인은 대중 문화의 contents 를 교묘하게 parody 한다. 만화책 image 를 똑같이 그대로 깨끗하게 그렸다. 사람들은 값싼 로맨스를 끊임없이 소비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 겁이 나므로 soap opera, TV, 만화책에 마취된다. 현재는 불행해도 happy ending 이다. 대중이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서 오히려 만화 속의 아줌마처럼 거기에 빠져들고 대중 문화에게 먹힌다. 눈물 흘리면서 자신의 stress 를 대중 문화 속에 들어가 잊으려고 한다. 민주주의 가면을 쓴 전체주의 국가 미국은 대중이 민주 국가임을 믿어 의심치 않도록 대중문화 속에 묻혀서 달콤하게 한가지 생각만을 하게 만든다.


Andy Warhol, 210 Coca Cola Bottles, 1962
 

잭슨 폴락은 붓이 캔버스에 닿지 않는 혁명 drip painting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와홀은 아예 붓을 쓰지도 않고 silk screen 기법으로 판화처럼 찍어낸다. 자신의 스튜디오 이름도 ‘The Factory’ 라고 붙이고, 작가가 하지 않고 조수를 시켜 찍어내므로 듀상피엔 Duchampian 하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은 폴락의 그림보다 앤디 와홀의 마릴린 몬로, 재클린 케네디 등의 celebrity 이미지가 더 쉽고 친숙하다고 느낀다.

Andy Warhol, Turquoise Marilyn 1962
 

그런데 문제는 박물관에 와서 몬로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나니 입장료가 좀 아까운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휴일에 일부러 모마에 와서 문화산책을 좀 하려고 했는데, 폴락의 그림을 보고 나면 조금 이해 안 되어도 뭐 좀 본 것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것은 아니다. 와홀은 대수롭지 않은 이미지를 박물관에 걸어 놓으면 대중이 ‘왜 그럴까?’ 하고 낯설게 보고 생각해 보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이 소비하는 상품, 유명인사에 대해 생각 좀 해 보세요’ 하는 의도였지만, 대중은 생각없이 ‘재밌네’ 하고 치워버린다. 대중이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의 이중적 잣대를 지적하며, 대중문화를 parody 하려는 의도이다.


신사실주의 Nouveau Realism

Pierre Restany 1930-2003                                                              Yves Klein 1928-1962                                       
                                                      
Nouveau Realism 은 피에르 레스타니가 신사실주의 선언문을 쓰고 여러 작가들이 공동 서명을 함께 하고 시작한 운동이다. 2차 대전 후 유럽의 추상에 대한 반향으로 나온 운동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케네디 대통렬,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을 무렵에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1954-1962) 을 치룬다. 누보리얼리즘은 알제리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독립전쟁에 2명의 유명 문인이 개입이 되어있다. 노벨상 작가인 알베르 캬뮤 Albert Camus는 알제리 태생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대학을 다녔지만 어머니는 알제리에서 산다. 또 다른 작가는 알제리의 정신과 의사인 프란시스 파농 Frantz Fanon 으로 Black Skin White Mask 라는 책을 썼으며, 알제리 독립 전선을 구축한다. 이 책은 2차 대전 후 아랍 전체의 탈식민화에 중요한 책이 된다. 피부는 검은데 백인의 마스크를 쓴 계층, 소위 식민지 사회의 엘리뜨 계층을 정조준한 책으로 피부가 검은 알제리 사람이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 사고는 프랑스인처럼 한다. 알베르 캬뮤는 ‘왜 알제리가 독립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프랑스 식민지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라고 생각한다. 캬뮤는 알제리아와 프랑스간의 휴전 혹은 프랑스 영에서 자치권을 더 가지자는 입장을 취한다. 파농은 알제리아 사회에서 자본과 힘을 가진 자는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책에 담고 있다. 역사를 결과론적 teleological 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현재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해석한다. 그 당시에 못 살았던 이야기도 지금 잘 살면 향수 nostalgia 로 남아 추억거리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오늘의 한국이 잘 산다는 식민사관도 역사를 결과론적으로 보는 결과이다.
알제리 전쟁을 겪은 샤를 드골 대통령(1890-1970)은 1969년까지 약 10년 간 프랑스 제5공화국을 통치하는데, 역사를 소급해가서 과거에 대한 정리를 확실히 한다. 2차 대전으로 돌아가 나치 협력자를 철저히 찾아낸다. 900개의 언론사 중 700개를 찾아내어 폐간, 재산 몰수를 하며 나치 협력자 20만 명을 감옥에 보낸다. 드골 대통력이 역사의 오점에 대한 정리를 확실히 하였기에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나치와 협력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진다. 여기에 반해 우리나라는 일제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남아있다. 드골은 알제리 독립을 옹호했고, 나치에 협력한 언론을 폐간시켰고, 중공을 인정하였으며, 할 말을 하는 외교 정책을 폈다.
Yves Klein, Blue Monochrome 1961                    
 

Nouveau Realist 들은 거의 painting 은 하지 않는데 이브 클라인은 유일하게 회화를 하는 작가이다. 화면에 파란색으로 칠을 하고 파란색에 대한 특허권을 딴다. 그 당시 추상운동인 앵포르멜이나 색을 가지고 평면성을 살리는 추상표현주의를 parody 하는 작전으로 추상화는 소도비나 부잣집에 걸리는데 나는 아예 색깔에 특허를 낸다. 파란색을 쓰고 싶으면 나에게 허락을 맡어 하는 의미이다. 독특하고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Yves Klein, Leap into the Void, 1960
 

이브 클라인이 공중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인데, 밑에 깔린 매트리스는 편집을 하면서 사진에서 삭제를 하였다. 허공을 나르는 이미지를 조작한 사진이다. Abstract __EXPRESSION__ist 가 만든 stereotype 은 예술가를 천재의 반열, 신적 위치에 올려 놓았다는 점이다. 잭슨 폴락, 로스코가 너무 중요해 그 작가가 아니면 그런 작품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뒤샹이 변기를 들고 나와 예술가의 지위를 강등시켜 놓았는데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예술가를 스타 반열에 올렸다. 이것을 비꼬기 위해 클라인은 ‘나는 신처럼 나른다’ 하면서 추상표현주의자들을 조롱한다. ‘너희처럼 그리는 것보다 나는 더 훌륭한 능력을 가졌다.’

Yves Klein, Shroud  Anthropology 1960
                             
클라인은 action painting 을 보여주겠다면서 관객을 청하는데,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부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첼로 음악이 연주되고 클라인이 누드 모델들과 같이 들어온다. 모델의 몸에 페인트 양동이를 들이 쏟아붓고, 막 끌고 다닌다. 더 할 나위 없는 action 으로 추상표현주의의 action skill 을 parody 한다.

캔버스에 불을 지르고 화염으로 쏘아서 그림을 그린다. CoBrA 코브라의 광기로 그린 그림, 추상표현주의의 action 을 조목조목 집으면서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하면서 조롱한다.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Jean Tinguely 1925-1994                                              
                                                                                           
니키 드 셍팔은 원래 패션모델이었는데, 쟝 팅귤리에와 결혼하고 나서 작가로 활동을 한다.

Jean Tinguely, Homage to New York 1960      
 
쟝 팅귤리에의 performance 이다. 고물 부품을 줏어서 기계 조합을 만들어 MoMA 의 정원에서 잠시동안 보여주더니 조금 있다가 기계가 연기내면서 스스로 부서진다. 작가의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인데, 팅귤리에는 유에서 무로 거꾸로 간다. 그의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으며 여기에 institution critique 이 암시되어 있다. 뒤샹은 object 를 institution 안에 전시했지만 팅귤리에는 1분 동안만 예술이라고 전시하고 끝, 다시 쓰레기로 돌아간다. 뒤샹보다 한걸음 더 나간 생각이다.

Niki de Saint Phalle, Black Venus 1965-67
 
기존의 Venus 는 뽀얗고 하얀 살결을 보이지만 니키드셍팔은 쓰레기 같은 신문을 가져다가 반죽을 빚어 그 위에 물감을 칠해서 커다란 Black Venus 만들고 잡지 광고에서 보이는 듯한 수영복을 입히고 공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백인의 미녀 뷔너스를 절대로 의심 안하는 stereotype 을 꼬집고 있다. 

Niki de Saint Phalle, She: A Cathedral 1966

              
관람객은 굉장히 불편해하면서 성당 안에,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간다. 그 안에 bar 와 영화 감상 공간이 있다. 설치작품으로 엄청난 sensation 을 일으켰다. 여자 도상 icon 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본다. 신사실주의 작가들은 museum, gallery 의 정의를 괴롭힌다. 루브르 박물관도 이 전시를 거부했고 거의 모든 갤러리가 이 전시를 받아주지 않았다. 과연 museum 은 뭐하는 공간인지? 관객은 어떤 기대를 갖고 오는지? 박물관 institution 을 비판의 눈 critique 으로 보자는 의도이다.


Arman, Long Term Parking 1982

폐차된 자동차를 모아서 18 meter 의 높이의 콘크리트로 쌓았다. Nouveau Realist 들은 거의 다 오브제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사회가 뱉어놓은 쓰레기를 가지고 아샹블라쥬를 만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60년대에 Junk Art 를 시작한다.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보다 훨씬 더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social engagement 작업이다.


Christo, Package 1963
 
크리스토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보따리를 싸고, 의자도 싸고 자꾸 싼다. 초기에는 작은 것만 싸다가 나중에는 아예 큰 것을 싼다. 해변가도 싸고, Central Park 도 싸서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아르망이나 니키드셍팔보다 더 파격적이다.

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1972-76
 


Christo and Jeanne-Claude, Wrapped Reichstag, Berlin 1971-1995
 

베를린 국회 의사당을 쌌다. 낯설게 하기 효과이다. 팝아티스트는 대중적인 이미지 low art 를 박물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고, 신사실주의 작가는 이제 박물관은 필요없고, 밖으로 나가는 대지예술  Land Art 을 한다. 늘 보는 쓰레기, 폐차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을 공원에 조성을 하고, 천으로 건물을 싸 놓으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본다. ‘저거 왜 싸 놓았어? 국회의사당이 뭔데?’ 크리스토는 역사의 흔적이 있는 장소를 싼다. 1971년부터 국회 의사당에 작업을 하겠다고 신청했으나, 매년 국회위원들이 부결시켰고, 1989년에 동서의 장벽이 무너지고, 1995년에야 비로소 허가가  떨어졌다. 예술가가 공공의 project 를 하려면 역사적, 국가적 이미지, 정치가 개입이 되고, 그들의 속내가 드러난다. 일종의 collective unconsciousness 를 들추어내는 역활이며, 건물을 싸는 작업을 통해 포장이 띁겨져 나가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Mimmo Rotella,  Marilyn Décollage  
 

데 꼴라쥬는 꼴라쥬의 정반대 technique 이다. 미국 문화가 유럽의 담벼락에 범람한다. 작가들이 박물관이 아닌 파리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덕지덕지 붙은 poster 를 뜯어내면 밑에 또 다른 포스터가 있다. 뜯어내 canvas 에 붙여 작품으로 만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이 아니고 기존에 있던 유에서 포장을 시킨다. 신사실주의는 사회적 공간의 reality 에 들어와서 대중과 같이 소통을 한다.  


Pierre Manzoni, Achrome 1958
 

만조니는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을 보고 ‘색이 왜 필요해?’ 하고 질문하면서 chrome 앞에 a를 붙여 색과 상관이 없다는 뜻의 achrome 이란 단어를 만든다. 흰색 canvas 를 주름 잡아 접어, monochrome 을 twist 시켜 오브제를 만든다. ‘접으면 되는데 색깔에 왜 집착해?’ 과거에 그렇게 고민했던 색깔인데 만조니는 아예 색을 쓰지 않는다. 


Post Painterly Abstract 

Sam Francis, Untitled Mandala 1975
 

Sam Francis, Footprint 1960
 

1960, 70년대에 추상표현주의는 여전히 대세였고. 폴락의 그림을 승계하는 작가들의 그림을 Post Painterly Abstract 라고 부른다. 그린버그가 1964년 모마에서 차 세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새 용어 Post Painterly Abstract 를 만든다. 폴락 이후 세대와 조금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섞어서 그린다.

1960년대에는 Post Painterly Abstract, Fluxus, Pop Art, Minimalism 등 다양한 미술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John Cage, Ono Yoko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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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센버그(Raugschenberg, Robert)의 추상표현주의적 팝아트(Pop Art)

[조인스 블로그] 입력 2013-10-24

그림3.jpg
라우센버그(Raugschenberg, Robert) 작, 추적자, 1963년
 
많은 팝아트 작가들이 상업적인 판화기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라우젠버그는 색상이 선명해 시각적 효과가 좋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고 하죠!
바로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부터 실크스크린기법을 자주 사용했지요.
라우센버그는 신문이나 영화 혹은 복제된 명화 등의 이미지들을 콜라주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다음 그 위에 표현적인 붓질을 하였고..... 그런데.....
화면에 모아진 이미지들은 아주 상이한 원천으로부터 나온 것들이지만 
모두가 우리의 일상 생활의 경험을 환기시키는 재료들이죠
<추적자>는 60대의 민감한 사안이었던 베트남 전쟁을 암시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하는데....
그림 속 내용이나 의미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