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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사주박사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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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다산의 재발견 - 다산 평전

다산 평전

 
2014-06-09 13:24
http://booklog.kyobobook.co.kr/courante24/1360316    
다산 정약용 평전
[국내도서] 다산 정약용 평전
저자 박석무
출판사 민음사 | 2014.04.18
정가 30,000 원 판매가 27,000 원 ( 10% +10% P)
평점 내용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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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산(茶山)에 대해 체계적인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1999년 출간)에 실린 ‘도덕적 주체의 탄생’이란 글을 통해서이다. 이 책이 내게 전해준 문제의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산을 근대성 형성의 중요한 특이점으로 해석했다. 그는 다산의 경학(經學)을 현대인의 형성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학문으로 분류하며 다산을 전통 사회의 완전 폐지나 서구적 형태의 근대성을 주창하기보다 고대의 사유에 기반해 전통 사회의 개혁을 꾀한 인물로 설정했다.


한형조 교수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1996년 출간)의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완고한 성리학적 관념성에서 실천적 학문으로라는 뜻을 담은 이 책 이후 저자는 자신이 다산을 주자학과의 순전한 단절로 읽은 것은 사태의 일면 혹은 표면일 뿐 전모나 심층이라 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으며 이제부터는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을 했다. 박석무 교수는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여긴 다산의 면모를 전한다.(‘다산 평전’ 130 페이지) 관건은 다산 사상에 내재한 창조적 역동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 - 1800, 재위: 1776 - 1800)와 운명을 함께 한 다산은 우리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적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돋보이게 하는 고매한 인품과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실천적 안목을 함께 갖춘 최고의 지식인이다. 다산은 어려서는 영특했고 글을 잘 알았으며 커서는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다산은 자연의 풍광을 읊고 관조하는 것으로 문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에게 사회 비리와 구조악 척결에 관심을 두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경기 북부의 여섯 개 고을을 시찰한 경험이었다.


다산이 보낸 시대(1762 - 1836)는 백성들이 관의 착취와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달라고 함)에 시달리던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가 19 세기 중엽의 지식인에게 큰 관심을 갖는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다. 다산 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교수는 옛날로 회귀하는 것은 과거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진보와 통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은 1표 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으로 대표되는 다산의 학문적 성과와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의 평전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것이 역량 부족 탓이기에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산 평전을 찬양 위주로 썼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다산의 사상을 얼마나 창조적 역동성의 관점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는 다산의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눈다. 수학기(修學期), 사환기(仕宦期),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정리기(整理期) 등이 그것으로 28세까지의 수학기, 10년간의 사환기,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강진에 묶여있던 18년의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그리고 18년의 정리기 등을 계산하면 그가 보낸 파란의 개인사의 연수가 나온다.


다산의 삶은 정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산은 정조와의 만남으로 경학(經學) 공부의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요직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 사후 유배에 오르는 쓰라림을 겪었다. 다산이 정조를 처음 만난 것은 진사과에 합격한 1783년으로 그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다산 평생의 핵심적 신념이자 이념은 공(公)과 염(廉)이었다. 공은 공정, 공평 등을 뜻하고 염은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재물 따위를 탐하는 마음이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정조 이전에 다산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인물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자형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을 통해 성호 이익(李瀷: 1681 - 1763)의 ‘성호사설’을 접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맞은 것이다.


다산은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의 대부분은 성호 선생을 따라 사숙했던 데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썼다. 저자는 이를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싸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96 페이지) 다산은 암행어사 시절 임금의 최측근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사도 강력 처벌을 주장할 정도로 강직했고 타협을 몰랐다. 남인 시파(時派: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인해 빚어진 억울한 일이라 주장하는 세력) 중 신서파(信西派: 조선 말기, 서학을 신봉하거나 두둔하던 세력)에 속했던 다산은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을 섭렵하게 되었지만 쓰라린 유배 생활을 감내해야 했고 고난의 유배기에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저자는 다산의 그런 삶을 인생의 비태(否泰: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라 표현한다.(84 페이지) 다산은 이가환, 이승훈, 이벽 등 당대의 진보적 인사들과 교유하며 “당파나 따지고 주자학에 얽매이고 가문이나 신분을 말하는 세속의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마음을 표명했다. 저자는 다산의 평생에 걸친 경학 연구는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의미심장한 것은 다산이 주자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학 체계로 학문의 방향을 잡고 실질적인 학문인 실학으로 학풍을 일으켜 정립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 예견했다는 대목이다.(119 페이지)


나는 이 대목에서 스님이 되어 걷는 자신의 길을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 표현하며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는 자의 전율”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고 했던 한 스님의 글(‘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55 페이지)을 떠올렸다. 다산은 색다른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천주학을 접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다산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이라는 맹자의 학설에 대해 주자와 달리 측은한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인이 되고, 수오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의가 되며, 사양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예가 되고, 시비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지가 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171 페이지)


다산은 정적(靜的)인 퇴계로부터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무서워하고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한다는 비판을 두렵게만 여긴다면 공부하고 학문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게 아니냐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얻고 감동한다. 다산은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상소문에서 천주교 책에 윤상(倫常)을 헤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늘을 거역하고 귀신을 경멸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천주교를 통해 천문, 역상, 농정, 수리 등의 실용적 기술을 얻고자 했지만 제사를 금지한 교회법을 대하고서는 역적이나 원수로 여기고 완전히 손을 떼고 마음을 끊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집요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다산을 물고 늘어졌고 왕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세력 판도에 눌린 다산은 사직하지만 정조와 남인 영수인 채제공 재상의 연이은 타계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내몰린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정순대비 김씨(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오 할머니)의 수렴청정으로 벽파(辟派)가 득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정순대비가 천주교도들을 역적죄로 죽이라는 법령을 반포했고 다산에게는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몰래 숨어 예전보다 더 깊이 믿었다.”는 혐의가 씌어진다.


다산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은 백성들의 신망과 학자로서 지닌 높은 위신 덕이었다. 다산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의 핵심은 시대와 역사에 대한 변혁 희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교리에 매료되었던 사람들과 서양 과학 사상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다산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스물 일곱의 나이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둘째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모진 고문 후유증과 공포와 불안 등을 견디며 강진에 당도한 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기(저술기)를 보낸다. 저자가 말했듯 공자 같은 성인이나 주자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도 이상과 현실 양면에 역량을 두루 안배했다. 다산의 편견 없는 지혜와 소신 역시 같은 차원의 것으로 관념 유희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학자들에게 다산의 삶과 학문 세계는 그 자체로 경종(警鐘)이었음에 틀림 없다. 처음 장기로 유배된 뒤 7년 20여일만에 서울로 압송된 다산은 감옥에서 그리던 둘째 형을 만난다. 흑산도(黑山島)로 귀양을 간 정약전은 그곳 생활 16년만에 병사한다.


형의 부음을 듣고도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 없었던 유배객 다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억울하고 한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정약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검을 흑 자 쓰기를 두려워했다/ 그에게 黑은 곧 불길함, 죽음의 글자였다/ 흑산을 자산(玆山)이라 했다/ 그는 왜 흑을 두려워 했는가/ 글자가 내뿜는 불안의 냄새를 맡아내는 예민함은 / 그가 밟고 있는 땅 적소(謫所)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黑이란 시를 읽는다. 저자는 “흑산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끔찍하여 내가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편지를 쓸 때마다 현산이라 고쳐 썼는데 현(玆)이란 글자는 검다는 뜻”이란 다산의 글을 소개한다.(444 페이지)


정약용은 정약전을 현산이라 불렀고 정약전은 정약용을 다산이라 불렀다.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가 바른 이름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쓴다.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오직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그것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왜 스스로 포기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길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너희들이 참으로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 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여서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다산이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송강이나 고산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436 페이지) 현산을 두고 나눈 교감을 잇는 형제의 정은 다산의 ‘주역’에 대한 정약전의 평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또한 만족스럽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아! 다산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산은 성선설의 손을 들어줌과 동시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자주지권(자율의지)이 있다는 ”매우 탁월한“ 인간론을 주장했다.(491 페이지)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을 통해 머리털 하나인들 썩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전제한 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다산은 경학(經學: 유학의 경서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은 본론이고 경세학(經世學: 실천적 사회과학)은 각론이라는 입장을 지녔다.(500 페이지) 다산은 유배지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저서들을 해배(解配) 후에 완성했고 유배지에서보다 더 열심히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다산은 자신의 생애를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노라.”고 평했다. 저자가 말했듯 창의적 학자로서의 삶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나온 평가이리라. 다산에 대해 학풍(學風)은 살기(殺機)였으며 주우(主遇)는 화태(禍胎)라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 위당 정인보 선생은 "선생의 학문은 경학이면서 정법“이라고 설명했다.(557 페이지) 그렇기에 경학이 곧 경세학이고 경세학이 곧 경학이라는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당은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615 페이지)


다산의 의도와 심정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라는 제목을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유표(遺表)는 유언으로 남기는 정책 건의서이니 먼 뒷날에라도 그렇게 실현되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는 뜻이며 심서(心書)는 당장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속으로라도 실행하고 싶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유배중이던 다산의 처지가 반영된 말이지만 후세에 큰 귀감(龜鑑)과 동시에 과제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다산의 생생한 경고를 되새기자.(다산의 사상적 한계는 공부가 더 진척된 뒤 행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2014년 9월 9일 화요일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아트 전시회 2제








공교롭게 미디어아트 전시회 2건이 비슷한 시기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와 금천문화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다. 또 공교롭게도 두 전시회의 주체는 모두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문화재단이다. 시기와 주제가 다소 겹치기에 두 기관 사이에 모종의 껄끄러움이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올해 내가 본 몇 안 되는 전시중 최고다. 솔직히 리움 10주년 기념전보다 좋았다. 물론 리움도 훌륭했다. 어딘가에 숨겨뒀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미언 허스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면 천박하게 들리겠지만) '돈값'을 한다. 이전에 상설전시돼있던 허스트와 부르주아의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 나온 작품은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는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도 사서 걸어주셨으면 한다. 그만한 돈을 쓸 수 있는 미술관은 리움밖에 없다....) 

모던, 클래식 예술의 정수만을 모아놓은 리움 전시회의 작품들이 눈을 호사롭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기획력의 승리라 할만했다. 기사 마지막에 "여러번 찾으면 좋겠다"고 쓴 것은 빈말이 아니다. 회사 근처이기에 나부터 여러번 찾을 생각이다. 전시회에 가서 영상 작품을 끝까지 본 적은 드물지만, 미디어시티 2014에 나온 작품들은 시간을 내 천천히 볼 생각이다. 

미디어시티서울에 누가 뭐라해도 '작품'이 나온 반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는 그렇게 말하기 머뭇대는 순간이 생긴다. 기사에 쓴대로 어떤 것들은 '직품'이라기보다는 '제품'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느냐고 물었을 때 평론가라면 무언가 기준을 제시하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긴 하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다빈치 크리에이티브의 작품들은 신기했지만 그 신기함이 어떠한 여운을 주진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언캐니'했던 '살' 정도가 기억에 남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두 전시회 모두 무료다. 서울시민으로서 이런데 쓰는 세금은 더 내라면 내겠다. 





1층에 전시된 양혜규 작가의 작품. 수많은 방울로 이루어져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난다. /미디어시티서울 제공

초현대적인 미디어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한복판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예능보유자 이상순 만신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개막공연을 1일 오후 연 것이다. 

“여기가 원래 재판소 자리라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많아. 오늘 다 극락가는거야. 세월호에 죽은 사람들 원혼도 달래야 해. 서울미술관도 잘 되게 해주시고, 여기 온 분들 모두 재수 좋게 해주시고…”

박찬경 예술감독은 만신에게 손을 조아리며 미디어시티서울의 성공을 빌었다. 외국에서 온 아티스트들은 만신이 건네주는 제주를 음복했다. 구경온 사람들은 쫄깃한 떡을 받아 오후의 허기를 달랬다. 

개막공연으로 굿이 선택된 것은 이번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가 ‘귀신 간첩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의 화두를 ‘아시아’로 잡은 박찬경 감독은 귀신, 간첩, 할머니가 현대 아시아를 돌아보는 세 가지 키워드라고 했다. 귀신은 아시아의 누락된 역사와 전통, 간첩은 냉전의 기억, 할머니는 가부장제 사회를 견딘 여성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는 보이지 않거나 보여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전형적 타자’인 동시, 매혹과 금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에는 17개국 42팀의 작가들이 230여점이 출품됐다. 최원준의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1959년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교시에 의해 설립된 미술 스튜디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료 등으로 구성됐다. 만수대 스튜디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대형 동상, 기념비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공건축물을 지으며 ‘외화벌이’를 한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에티오피아, 세네갈, 토고의 기념비, 건축물에 ‘주체예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4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에 영상 일부가 공개된 바 있다.  


최원준 작가의 작품을 설명중인 박찬경 예술감독(오른쪽 마이크 든 이). 내 사진 올리는 거 별로 안좋아하긴 하지만, 보기 드물게 시건방진 자세로 박 감독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미디어시티서울 제공

<해녀>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미카일 카리키스가 2012년에 3개월간 제주 해녀공동체와 함께 지내며 만들어낸 작품이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가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제주해녀의 숨비소리(해녀의 전통적 숨쉬기 기술)가 들리고, 전면의 영상에서는 노동요를 부르는 해녀들이 보인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카리키스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황폐해져가는 문화는 내 작업의 일반적 주제”라고 설명했다. 

다무라 유이치로는 1928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고등재판소가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는 장소성에 주목했다. 그는 1764년 조선통신사 수행원 최천종이 일본 오사카에서 통역을 맡은 하급무사 스즈키 덴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영상으로 옮긴 뒤 이를 당시 법정을 연상케하는 세트에서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일으켜 가부키 공연 등의 소재로 사용됐으나, 미묘한 국제 문제 때문에 상연이 중지됐다고 한다. 

양혜규의 <소리 나는 보름달> 등 신작들은 방울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스스로, 혹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작품들은 방울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로 공간을 채워 작품이 주문을 외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자오싱 아서 리우의 <코라>는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출발해 에베레스트 산에 이르는 2300㎞의 여정을 고화질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몽환적인 전자음악과 현악기 소리가 숭고한 자연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영적 여정을 안내한다. 

민간위탁사업이었던 미디어시티서울은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미술관 직영사업으로 전환됐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은 “위탁사업일 때는 예술감독의 1회성 이벤트로 끝나 아카이브 구축에 어려움이 있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며 “미술관이 행사를 직영함으로써 정보를 축적하고 예술감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려 한다”고 말했다. 

9월 2일~11월 23일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한국영상자료원 두 군데서 함께 만날 수 있다. 영상 작품들은 2차원의 시각 정보를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고 기발하게 고안된 전시 공간과 어울려 3차원의 감흥을 안겨준다.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하고 풍부한 관점, 정보, 감상을 전하면서도 전시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근처를 지나는 이들은 시간을 내어 들를만하고, 지날 일이 없다면 일부러라도 찾을만한 전시다. 관람에 시간을 요하는 영상 작품이 많은데다가 입장료가 무료라 여러번 찾으면 더 좋겠다.  




김병규의 '에이티필드-마비된 감각'. /서울문화재단 제공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SF작가 아서 클라크는 말했다. 10월 17일까지 서울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2014’(이하 다빈치)를 본 뒤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

금천구 독산동의 금천예술공장은 대규모 인쇄공장을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주변엔 소규모 공업사와 의류공장들이 여전히 밀집해 있다. 개막한 3일 둘러본 ‘다빈치’에는 <해리 포터>의 마술, <스타워즈>의 미래기술로나 구현될법한 아이디어들이 현실의 ‘작품’의 형태로 선보였다. 2010년부터 아이디어 공모전 형태로 열리던 ‘다빈치’는 올해부터 처음으로 페스티벌로 확대됐다. 관람료는 무료다. 

김정환의 ‘이미지-무브먼트’는 멀찌감치 떨어진 피아노와 그 앞을 가로막은 빛의 커튼으로 구성돼있다. 커튼을 가로지르며 손을 저으면 2m 가량 앞에 놓인 피아노의 건반이 눌리면서 소리가 난다. 건반은 다시 허공으로 푸른색 레이저를 쏜다. 

김병규는 두 개의 정육면체 작품을 선보였다. ‘에이티필드’는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보호막에서 이름을 따왔다. 관람객이 커다란 정육면체 안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아무 것도 없던 육면에 레이저 보호막이 쳐진다. ‘살’은 한 손에 잡히는 세 개의 정육면체 실리콘 덩이다. 어떤 것을 만지면 맥박이, 어떤 것을 만지면 체온이 느껴진다. 어떤 것에는 뾰루지까지 나있다. ‘언캐니 밸리’(로봇공학계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인간과 닮았으나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은 로봇이 주는 섬찟함, 혐오감)의 의도적인 구현이라 할만하다. 신승백과 김용훈의 ‘아포시마틱 재킷’은 ‘입는 컴퓨터’다. 재킷에 여러 개의 렌즈가 붙어있어 위급할 때 착용자가 버튼을 누르면 주변을 360도로 찍은 영상을 웹으로 전송한다.

하이테크가 아닌 로우테크(저차원 기술)를 재치있게 사용한 작품들도 있다. 프랑스 작가 조니 르메르시에의 ‘후지’는 벽에 나무, 산을 그린 후, 그 위에 프로젝터로 빛을 쏴 풍경이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한 작품이다. 작품 설치를 위해 방한한 르메르시에는 “어디나 쏠 수 있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스마트폰, 텔레비전 등으로 한정된 스크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다”며 “프로젝터는 낡은 기술이지만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술의 발전은 예술의 개념을 흔들어왔다. 인상주의는 유화와 캔버스의 개발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는 야외에서 들고 찍을 수 있는 경량 카메라의 도입 이후 나타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술에 경도돼 예술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이날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제한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의 엠마 퀸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기술에 지원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청중과 재원을 모을 수 없는 기술에 투자해선 안된다는 점이 밝혀진다면, 다른 예술 단체들이 여기에 돈,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빈치’의 손미미 예술감독은 “테크닉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방법을 연마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면서도 “이는 완성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작가로서 바람직한 집착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우선 작품들에서 국가적·지역적 흥취를 찾기 어렵다. 작품만 봐서는 한국 작가의 것인지, 독일 작가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 손미미 감독은 “디지털 문화에서는 ‘오픈 소스’가 대세”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업 노하우를 감추기보다는 다른 작가도 알 수 있도록 예술가 커뮤니티에 공유한다는 것이다. 김치앤칩스 스튜디오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손 감독은 “개인 작업을 할 때도 기술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면 다른 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며 “인터넷을 통해 국경, 문화의 경계가 사라지다보니 외국 작가와 한국 작가의 작품 경향에도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다빈치’ 출품작에는 사회와 역사의 흔적이 희미하다. 작품들은 공시적·통시적 맥락과 소통하지 않고, 현장의 관람객들과만 대화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품’이라기보다는 ‘기발한 전자제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장지대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의 취지 역시 기술, 예술, 산업의 연계임을 강조한다. 손미미 감독은 “미디어아트를 전통적인 예술관으로 정의내리면 오해가 생긴다”며 “미디어아트는 좀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환 '이미지-움직임' /서울문화재단 제공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생각의 시대’ 발간한 철학자 김용규 - 시·추리소설은 ‘생각의 도구’로 아주 유효”

[저자와의 대화]‘생각의 시대’ 발간한 철학자 김용규

글 정원식·사진 김정근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앞으로 필요한 건 지식 축적보다 사유능력… 시·추리소설은 ‘생각의 도구’로 아주 유효”

“지식의 종말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겁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사유 능력입니다.”

정보혁명으로 지식은 폭증했다. 지식은 지식인과 전문가의 손에서 빠져나와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갔다. 지식이 폭증하고 유통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식의 수명은 단축됐다. 지식이 접속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변하면서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점점 무의미한 일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지식들을 종횡으로 엮어내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1991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중을 위한 철학서를 써온 철학자 김용규씨(62)는 <생각의 시대>(살림)에서 “지식은 늘 새로 생겨나 자꾸 불어났지만 몇 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되어 왔다”며 앞으로의 교육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생각의 도구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사유 능력을 제공해주었던 생각의 도구들, 그리고 이후 2500년 동안 누적된 지식을 만들어온 시원적 도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리스일까. 저자는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그리스에 주목한다. 그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는 이집트인, 고대 바빌로니아인, 수메르인들보다 전반적인 문명의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시기에 ‘생각의 도구들’을 발명함으로써 앞선 그 어느 문명도 도달하지 못한 이성과 합리의 시대를 열었다.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국 문명은 학문보다는 종교적·도덕적 관심사에 집중했어요. 개인의 의견보다는 공동체의 화합을 중시했습니다. 반면 그리스에서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워 논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헤게모니를 잡는 풍토가 생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학문적 지식이 다른 지역보다 잘 발달했습니다.”

김씨가 말하는 생각의 도구란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를 가리킨다. 모두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발명했다. 책에 따르면, 서양의 모든 문명은 이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 역시 이 도구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이 최근의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교육심리학의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생각의 도구들 중에서도 으뜸은 메타포라(은유)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파악함으로써 생겨나는 은유는 사고와 언어의 근간이다. 김씨는 인지과학자 레이코프의 말을 인용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시간은 돈이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 표현에는 ‘시간은 소중하다’는 관념이 들어 있는데 이 관념은 다양한 은유적 문장들로 확장된다.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을 아끼다’ 같은 일상적인 표현들은 모두 은유에 기반하고 있다. 김씨는 은유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를 낭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시를 읽으면 감성을 기를 수 있다고 하지만 시 읽기는 단순한 감성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뇌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시를 암송하면 은유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뉴런 네트워크가 생깁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아르케(원리)는 우리가 자연과 사회 현상들을 예측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학문은 어떤 현상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원리를 찾아내는 훈련이 돼 있어야만 성립한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직각삼각형의 세 변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피타고라스처럼 하나의 정리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김씨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가추법’이다. 가추법이란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어떤 합리적 예측을 내놓는 것이다. 그는 가추법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리소설은 그 자체가 주어진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과 합리적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을 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씨는 생각의 도구를 연마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세 번째 생각의 도구인 로고스(문장)와도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 문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제 결론은 반대로 문장이 정신을 만든다는 겁니다. 한국 교육에서는 시나 추리소설을 공부 방해 요소쯤으로 생각하지만 ‘생각의 도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인 사고력을 기르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글 정원식·사진 김정근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판을 바꿀 한 곡이 없네

대중음악 블라블라


[임진모칼럼] 판을 바꿀 한 곡이 없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82104035&code=990100

며칠 전 몇 명의 음악관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 사람이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대중가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곡은 뭔가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조용필의 ‘바운스’, 아이유의 ‘좋은 날’, 엑소의 ‘으르렁’, 이승철의 ‘마이 러브’, 소유와 정기고의 ‘썸’ 등 제법 많은 곡들이 거론됐다. 누군가가 “그럼 그중 다시 듣고 싶은 노래는?”하고 묻자 곡 숫자는 확 줄었고 다시 그가 “후대에 남을 곡은 뭐죠?”라고 했을 때는 모두들 ‘글쎄’하면서 “생각해보니 정말 곡이 없네!”하고 혀를 찼다.

사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 곡이 후대에 기억될지, 역사에 남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나의 노래가 전설의 위상에 오르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먼저 대중들의 인지도가 있어야 하고 예술성, 화제성,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 전문가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동료 혹은 이후 세대 음악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중요하다. 당대에 크게 히트했다고 명곡으로 남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나도 극소수만 아는 곡은 배제를 당하고 시대정신을 담은 곡이라도 음악성이 떨어지면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 출처 : 경향신문 DB 


발표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후배 가수들이 자꾸 불러 현재시제를 확보한 곡은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는 이수영의 리메이크 히트로 다음 세대에게도 친숙해졌고 최근 아이유가 김창완과 함께 부른 산울림 왕년의 곡 ‘너의 의미’는 지금 음악인구와의 접점을 마련하면서 더욱 생명력을 높였다.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 있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하나 이상의 결정적인 곡을 보유하고 있다. 

신중현 하면 ‘미인’, ‘아름다운 강산’이고, 가왕 조용필은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등 지금도 팬들 기억에 확실히 자리한 대표곡들이 수두룩하다. 존 레넌은 ‘이매진’과 직결되고 이글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노래한 ‘호텔 캘리포니아’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굿 바이브레이션스’를 만들고 나서 “신이시여, 정말 제가 이 곡을 만들었나이까?”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중음악가에게 명곡은 명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곡 하나가 새로운 기원과 흐름을 만든 사례도 많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핫브레이크 호텔’과 함께 어른 주도에 종지부를 찍은 청춘의 로큰롤 시대가 활짝 열렸고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는 대중음악가들로 하여금 고전음악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으로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70년대 후반, 영국의 섹스 피스톨스는 무정부 상태를 갈망한 ‘아나키 인 더 UK’라는 곡으로 음악적 포스트모던의 탄생을 알렸다. 이 때문에 음악관계자들은 판세의 전환을 위해서는 확실한 곡 하나가 요구된다고 입을 모은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예로 들면 누구나 이 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한 국악 밴드의 리더가 지난해 미국을 방문해 한 음반사 간부를 만났다. 그와 대화 도중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느냐고 의견을 구했더니 그는 1초의 주저함이 없이 “원 그레이트 송!” 즉 좋은 곡 하나면 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앨범이 아니라 디지털 싱글이 대세다. 단 한 곡이 중요해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엄청난 수의 싱글들이 공개되고 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곡, 다시 듣고 싶은 곡, 후대에 남을 곡은 별로 없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한철도 아닌 며칠 장사의 풍조에 함몰되어버린 탓이다. 이러니 대중음악을 누가 예술이라고 치장해주겠는가. 서둘러 판세를 바꾸기 위해 작곡자와 제작자는 하나의 좋은 곡 생산을 위해 더 땀을 흘리고 소비자들도 피로감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양질의 곡에는 기꺼이 응답하는 수고가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릴 찰나의 곡들만이 판치는 이 허한 현실을 바꿀 길이 없다. 국면을 전환시킬 ‘원 그레이트 송’을 기대한다.

임진모 | 대중문화평론가

2014년 8월 1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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