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문화유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문화유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9월 21일 일요일

동아시아 100권의 책 - 중국 쪽 선정도서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여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선정한다는 말을 일전에 들었는데 29일에 선정 및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격변기 세계관 바꾼 ‘현대의 고전’ 한겨레
“거대한 독서공동체 복원 첫걸음” 한겨레
한·중·일 이어줄 ‘100권의 책’ 중앙일보
책에서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 찾는다 중앙일보

내가 번역한 책도 후보에 올라와 있어 출간을 약간 미루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선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 명단에 올라와 있던 책들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출판사별로 나눠먹기식이어서 성격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선정된 책들을 보니 나라별로 기준은 다르지만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색깔에 의하면 중국쪽에서 선정한 목록에 내 번역서가 포함되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일 정도이다.

목록만 보면 한국과 일본은 선정기준이 거의 유사하고 출판인회의에서 내세운 취지에 잘 맞는 것 같다. 두 나라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비슷한 역사를 거쳤고 그것을 해결해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학술서"에 보다 치중한 반면 한국은 진보적 시각이 두드러진 책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아니나다를까 선정 기준이 뭐냐고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고([편집자 레터] '한국 대표하는 책' 기준은), 한국일보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저술한 학술서와 고급 교양서"임에 반해 한국은 "정치ㆍ사회적으로 진보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이 눈에 띄어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해외에 소개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끊겼던 맥 다시 잇는다) 한국쪽 선정도서에 대한 견해는 비슷한데, 일본쪽 선정도서에 대해서는 한국일보와 한겨레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어차피 한국사람들에겐 생소한 분야라 신문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 테니까.)

이에 반해 중국쪽은 명확하게 중국 "학술"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야말로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뭐, 그다지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그런 거. 처음 추천후보에 각종 사전류가 대거 포함된 것을 생각해 보면 많이 나아진 거긴 하다. 사전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하긴 할 테지만, 무려 "동아시아 100권의 책"으로 서로 돌려보자는 취지에는? 그걸 어찌 번역해? 후후.
암튼 정리된 최종선정 목록에는 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역사에 관련된 책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중국쪽 매체에서는 거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한국어로 엉성하게 번역된 책 제목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한 목록을 살펴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되어 나오는 건 중앙일보 등이 올초에 제공한 기사의 중문판이 대부분이었다. 혹시 중국 쪽은 발만 슬쩍 담근 형국??


이 중 한국어로 이미 번역된 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
1. 시론, 주광잠(주광첸), 동문선
4. 중국철학약사, 풍우란(펑유란) ; (간명한)중국철학사 / 펑유란 지음 ; 정인재 옮김 형설, 2007
7. 한어사고, 왕리 ; 중국어 어법 발전사 / 王力 著 ; 박덕준 ... [등]역 사람과책, 1997
10. 미의 역정, 이택후(리쩌허우), 동문선

18. 담예록, 전종서(첸중수) ; 하나마나한 번역으로 <중국어문학> 학회지에 완역(미출간).
19. 향토중국, 비효통(페이샤오퉁) ; 중국사회의 기본구조 = Rural China / 費孝通 원저 ; 이경규 역一潮閣, 1995
20. 현대중국사상의 흥기, 왕후이 (출간예정)

대만
3. 중국예술의 정신, 서복관(쉬푸관) ;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權德周 ... [等譯] 東文選, 1990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李鍵煥 譯 百選文化社, 2000
11. 만력 15년, 레이 황


각 신문들의 소개를 보면, 책 제목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사람 이름에서는 오류가 많다. 특히 중국식 병음은 많이 알려져 거의 오류가 없지만(중앙일보 표기는 엉망이다), 대만식 영문표기는 대부분의 신문에서 뒤죽박죽이다. 웨이드식 표기라는 걸 모르면 장광즈(張光直)를 창쾅츠(Chang, Kwang-chih)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심종문(선충원)을 셴콩웬(Shen Congwen)이라고 읽는 건 뭘까? 아마도 홍콩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이번 선정에 한중일 각 26권, 대만이 15권, 홍콩 7권이다. 그러나 대만, 홍콩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책은 한두 권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범중화권으로 묶일 수 있을 성질의 것들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것, 대륙에서 출간하지 않고 홍콩이나 대만에서 출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규모 면에서 한중일이 똑같은 분량으로 했을 때 나오는 불균형을 이런 식으로 메꾼 것으로 보인다만, 대만이나 홍콩 자신의 역사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정련한 책들이 아쉽긴 하다. (이 목록만 보면 이들은 이미 "하나의 중국"이다.)

신문에 소개된 것처럼 차후에 번역이나 후속활동이 계속되겠지만, 이제껏 한중일 삼국이 서로 관심 가는 책들을 번역해서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물론 중국에서의 한국책 번역 비율은 낮다만, 사업 이후에 갑자기 한국책을 많이 번역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사업 자체로 문화공동체 운운하는 건 좀 과장일 듯하다. "같이" 뭘 할 건지에 대한 고민이 든 책은 없고 자국의 특성을 강조하는 책들로 다들 뽑았지 않은가. 게다가 중국 쪽은 동아시아에서 어떤 "공동체"로 묶이는 걸 그닥 바라지도 않지 않나?
http://redology.tistory.com/259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다산의 재발견 - 다산 평전

다산 평전

 
2014-06-09 13:24
http://booklog.kyobobook.co.kr/courante24/1360316    
다산 정약용 평전
[국내도서] 다산 정약용 평전
저자 박석무
출판사 민음사 | 2014.04.18
정가 30,000 원 판매가 27,000 원 ( 10% +10% P)
평점 내용  디자인 
장바구니 담기
내가 다산(茶山)에 대해 체계적인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1999년 출간)에 실린 ‘도덕적 주체의 탄생’이란 글을 통해서이다. 이 책이 내게 전해준 문제의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산을 근대성 형성의 중요한 특이점으로 해석했다. 그는 다산의 경학(經學)을 현대인의 형성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학문으로 분류하며 다산을 전통 사회의 완전 폐지나 서구적 형태의 근대성을 주창하기보다 고대의 사유에 기반해 전통 사회의 개혁을 꾀한 인물로 설정했다.


한형조 교수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1996년 출간)의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완고한 성리학적 관념성에서 실천적 학문으로라는 뜻을 담은 이 책 이후 저자는 자신이 다산을 주자학과의 순전한 단절로 읽은 것은 사태의 일면 혹은 표면일 뿐 전모나 심층이라 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으며 이제부터는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을 했다. 박석무 교수는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여긴 다산의 면모를 전한다.(‘다산 평전’ 130 페이지) 관건은 다산 사상에 내재한 창조적 역동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 - 1800, 재위: 1776 - 1800)와 운명을 함께 한 다산은 우리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적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돋보이게 하는 고매한 인품과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실천적 안목을 함께 갖춘 최고의 지식인이다. 다산은 어려서는 영특했고 글을 잘 알았으며 커서는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다산은 자연의 풍광을 읊고 관조하는 것으로 문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에게 사회 비리와 구조악 척결에 관심을 두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경기 북부의 여섯 개 고을을 시찰한 경험이었다.


다산이 보낸 시대(1762 - 1836)는 백성들이 관의 착취와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달라고 함)에 시달리던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가 19 세기 중엽의 지식인에게 큰 관심을 갖는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다. 다산 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교수는 옛날로 회귀하는 것은 과거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진보와 통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은 1표 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으로 대표되는 다산의 학문적 성과와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의 평전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것이 역량 부족 탓이기에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산 평전을 찬양 위주로 썼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다산의 사상을 얼마나 창조적 역동성의 관점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는 다산의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눈다. 수학기(修學期), 사환기(仕宦期),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정리기(整理期) 등이 그것으로 28세까지의 수학기, 10년간의 사환기,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강진에 묶여있던 18년의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그리고 18년의 정리기 등을 계산하면 그가 보낸 파란의 개인사의 연수가 나온다.


다산의 삶은 정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산은 정조와의 만남으로 경학(經學) 공부의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요직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 사후 유배에 오르는 쓰라림을 겪었다. 다산이 정조를 처음 만난 것은 진사과에 합격한 1783년으로 그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다산 평생의 핵심적 신념이자 이념은 공(公)과 염(廉)이었다. 공은 공정, 공평 등을 뜻하고 염은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재물 따위를 탐하는 마음이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정조 이전에 다산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인물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자형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을 통해 성호 이익(李瀷: 1681 - 1763)의 ‘성호사설’을 접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맞은 것이다.


다산은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의 대부분은 성호 선생을 따라 사숙했던 데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썼다. 저자는 이를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싸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96 페이지) 다산은 암행어사 시절 임금의 최측근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사도 강력 처벌을 주장할 정도로 강직했고 타협을 몰랐다. 남인 시파(時派: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인해 빚어진 억울한 일이라 주장하는 세력) 중 신서파(信西派: 조선 말기, 서학을 신봉하거나 두둔하던 세력)에 속했던 다산은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을 섭렵하게 되었지만 쓰라린 유배 생활을 감내해야 했고 고난의 유배기에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저자는 다산의 그런 삶을 인생의 비태(否泰: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라 표현한다.(84 페이지) 다산은 이가환, 이승훈, 이벽 등 당대의 진보적 인사들과 교유하며 “당파나 따지고 주자학에 얽매이고 가문이나 신분을 말하는 세속의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마음을 표명했다. 저자는 다산의 평생에 걸친 경학 연구는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의미심장한 것은 다산이 주자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학 체계로 학문의 방향을 잡고 실질적인 학문인 실학으로 학풍을 일으켜 정립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 예견했다는 대목이다.(119 페이지)


나는 이 대목에서 스님이 되어 걷는 자신의 길을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 표현하며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는 자의 전율”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고 했던 한 스님의 글(‘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55 페이지)을 떠올렸다. 다산은 색다른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천주학을 접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다산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이라는 맹자의 학설에 대해 주자와 달리 측은한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인이 되고, 수오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의가 되며, 사양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예가 되고, 시비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지가 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171 페이지)


다산은 정적(靜的)인 퇴계로부터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무서워하고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한다는 비판을 두렵게만 여긴다면 공부하고 학문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게 아니냐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얻고 감동한다. 다산은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상소문에서 천주교 책에 윤상(倫常)을 헤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늘을 거역하고 귀신을 경멸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천주교를 통해 천문, 역상, 농정, 수리 등의 실용적 기술을 얻고자 했지만 제사를 금지한 교회법을 대하고서는 역적이나 원수로 여기고 완전히 손을 떼고 마음을 끊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집요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다산을 물고 늘어졌고 왕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세력 판도에 눌린 다산은 사직하지만 정조와 남인 영수인 채제공 재상의 연이은 타계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내몰린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정순대비 김씨(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오 할머니)의 수렴청정으로 벽파(辟派)가 득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정순대비가 천주교도들을 역적죄로 죽이라는 법령을 반포했고 다산에게는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몰래 숨어 예전보다 더 깊이 믿었다.”는 혐의가 씌어진다.


다산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은 백성들의 신망과 학자로서 지닌 높은 위신 덕이었다. 다산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의 핵심은 시대와 역사에 대한 변혁 희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교리에 매료되었던 사람들과 서양 과학 사상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다산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스물 일곱의 나이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둘째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모진 고문 후유증과 공포와 불안 등을 견디며 강진에 당도한 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기(저술기)를 보낸다. 저자가 말했듯 공자 같은 성인이나 주자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도 이상과 현실 양면에 역량을 두루 안배했다. 다산의 편견 없는 지혜와 소신 역시 같은 차원의 것으로 관념 유희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학자들에게 다산의 삶과 학문 세계는 그 자체로 경종(警鐘)이었음에 틀림 없다. 처음 장기로 유배된 뒤 7년 20여일만에 서울로 압송된 다산은 감옥에서 그리던 둘째 형을 만난다. 흑산도(黑山島)로 귀양을 간 정약전은 그곳 생활 16년만에 병사한다.


형의 부음을 듣고도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 없었던 유배객 다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억울하고 한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정약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검을 흑 자 쓰기를 두려워했다/ 그에게 黑은 곧 불길함, 죽음의 글자였다/ 흑산을 자산(玆山)이라 했다/ 그는 왜 흑을 두려워 했는가/ 글자가 내뿜는 불안의 냄새를 맡아내는 예민함은 / 그가 밟고 있는 땅 적소(謫所)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黑이란 시를 읽는다. 저자는 “흑산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끔찍하여 내가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편지를 쓸 때마다 현산이라 고쳐 썼는데 현(玆)이란 글자는 검다는 뜻”이란 다산의 글을 소개한다.(444 페이지)


정약용은 정약전을 현산이라 불렀고 정약전은 정약용을 다산이라 불렀다.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가 바른 이름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쓴다.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오직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그것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왜 스스로 포기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길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너희들이 참으로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 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여서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다산이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송강이나 고산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436 페이지) 현산을 두고 나눈 교감을 잇는 형제의 정은 다산의 ‘주역’에 대한 정약전의 평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또한 만족스럽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아! 다산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산은 성선설의 손을 들어줌과 동시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자주지권(자율의지)이 있다는 ”매우 탁월한“ 인간론을 주장했다.(491 페이지)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을 통해 머리털 하나인들 썩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전제한 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다산은 경학(經學: 유학의 경서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은 본론이고 경세학(經世學: 실천적 사회과학)은 각론이라는 입장을 지녔다.(500 페이지) 다산은 유배지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저서들을 해배(解配) 후에 완성했고 유배지에서보다 더 열심히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다산은 자신의 생애를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노라.”고 평했다. 저자가 말했듯 창의적 학자로서의 삶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나온 평가이리라. 다산에 대해 학풍(學風)은 살기(殺機)였으며 주우(主遇)는 화태(禍胎)라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 위당 정인보 선생은 "선생의 학문은 경학이면서 정법“이라고 설명했다.(557 페이지) 그렇기에 경학이 곧 경세학이고 경세학이 곧 경학이라는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당은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615 페이지)


다산의 의도와 심정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라는 제목을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유표(遺表)는 유언으로 남기는 정책 건의서이니 먼 뒷날에라도 그렇게 실현되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는 뜻이며 심서(心書)는 당장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속으로라도 실행하고 싶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유배중이던 다산의 처지가 반영된 말이지만 후세에 큰 귀감(龜鑑)과 동시에 과제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다산의 생생한 경고를 되새기자.(다산의 사상적 한계는 공부가 더 진척된 뒤 행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2014년 9월 8일 월요일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 (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고유섭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출신지 
  • 성별 
  • 생년 
  • 몰년 
  • 저서(작품) 
  • 대표관직(경력) 
 
 
정의
1905∼1944. 미술사학자.
개설
호는 우현(又玄)인천 출신.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에 입문한 고유섭은 리글학파와 뵐플린학파의 실증적인 학문에 매료되었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중국미술사, 일본미술사 등의 미술사강의를 접하면서 조선미술사 연구에 대한 포부를 키웠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중국, 일본, 인도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한국의 불교조각과 탑 연구, 고구려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유물의 자료수집과 연구, 유적의 답사, 유물의 실견에 매진하였고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 그의 미술사 연구의 초점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석탑에 대한 연구였다. 삼국 중 백제와 신라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였다. 사후 그의 연구결과를 모아 책으로 간행한 것이 『조선탑파(韓國塔婆)의 연구』(1948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造形)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파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자 역작이다.
고유섭은 석탑뿐 아니라 불교미술의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불교조각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1940년 발표한「한국의 조각」에서는 처음으로 조각을 중심으로 미술사적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각 시대별 조각의 양식적 변화와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 1930년경부터 회화사 연구를 시작하여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회화에 관한 문헌을 발췌하는 작업을 5∼6년간 진행하였고, 이는 사후에 『조선회화집성』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사연구는 화론(畵論)의 집성에서 시작하여 안견(安堅)강희안(姜希顔)정선(鄭敾)김홍도(金弘道) 등 화가별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는 한국회화사의 기틀이 되었다. 고려시대 회화에 관한 연구들은 지금도 능가하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2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고유섭은 이밖에도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미술사 기초자료 수집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44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이던 황수영(黃壽永)·진홍섭(秦弘燮)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1963년)·『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1965년)·『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1966년)·『송도의 고적』(1977년) 등으로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우리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고유섭과 한국회화사 연구」(김홍남,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의 도자인식」(장남원,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과 탑파연구」(박경식,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의 생애와 학문세계」(김영애, 『미술사학연구』190·191, 1991)
  • 「고유섭의 생애와 학문세계」(김영애, 『미술사학연구』 190·191, 19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