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 (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고유섭
정의
1905∼1944. 미술사학자.
개설
호는 우현(又玄). 인천 출신.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에 입문한 고유섭은 리글학파와 뵐플린학파의 실증적인 학문에 매료되었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중국미술사, 일본미술사 등의 미술사강의를 접하면서 조선미술사 연구에 대한 포부를 키웠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중국, 일본, 인도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한국의 불교조각과 탑 연구, 고구려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유물의 자료수집과 연구, 유적의 답사, 유물의 실견에 매진하였고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 그의 미술사 연구의 초점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석탑에 대한 연구였다. 삼국 중 백제와 신라, 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였다. 사후 그의 연구결과를 모아 책으로 간행한 것이 『조선탑파(韓國塔婆)의 연구』(1948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造形)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파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자 역작이다.
고유섭은 석탑뿐 아니라 불교미술의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불교조각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1940년 발표한「한국의 조각」에서는 처음으로 조각을 중심으로 미술사적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각 시대별 조각의 양식적 변화와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 1930년경부터 회화사 연구를 시작하여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회화에 관한 문헌을 발췌하는 작업을 5∼6년간 진행하였고, 이는 사후에 『조선회화집성』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사연구는 화론(畵論)의 집성에서 시작하여 안견(安堅), 강희안(姜希顔),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등 화가별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는 한국회화사의 기틀이 되었다. 고려시대 회화에 관한 연구들은 지금도 능가하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2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고유섭은 이밖에도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미술사 기초자료 수집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44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이던 황수영(黃壽永)·진홍섭(秦弘燮)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1963년)·『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1965년)·『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1966년)·『송도의 고적』(1977년) 등으로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우리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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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월요일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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