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재(吳敬梓)의 유림외사(儒林外史)
1. 오경재의 생애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1701-1754)는 자를 민헌(敏獻) 또는 문목(文目)이라고 하고 호를 입민(立民)이라 불렀으며 안휘(安徽) 전초(全椒) 인이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원래 대관료 지주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로부터 가정 형편이 기울어져 갔다. 그의 부친 오림기(吳霖起)는 미관(微官)인 강소(江蘇) 교유(敎諭)를 지냈을 뿐이었다. 오림기는 정직하고 명리를 탐내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의 이런 사람됨을 오경재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경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책을 한 번 읽고 모든 내용을 암송할 수 있었다. 13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부친을 따라 장강 남북을 돌아다녔다. 23세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금전과 재산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남 돕기를 즐기며 몇 차례의 향시에 참가했으나 급제하지 못한 그는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정원이 딸린 집과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33세부터 남경으로 이사해서 살았던 오경재를 그의 나이 36세 때 안휘순무(安徽巡撫)가 추천하여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를 치를 수 있도록 했으나 그는 북경에 가서 응시하지 않았다. 41세 후부터는 그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졌다. 그는 글을 써서 팔거나 벗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고’ ‘옷가지는 모조리 전당잡히고’ ‘ 굴뚝에는 연기나지 않는’ 신세로 살면서 엄동설한이면 대여섯 되는 벗들과 함께 달밤을 타서 성밖 수십 리를 돌며 발을 덥혔다. 그는 평생을 곤궁하게 살다가 54세의 나이에 양주(揚州)에서 죽었다.
권문세가 자제 오경재는 부귀공명을 열렬히 추구하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경시하고 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가정의 몰락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추악상과 노동인민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비교적 심각한 인식을 품게 만들었다. 그는 암흑같은 정치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팔고문(八股文) 같은 문장으로 험을 보는 과거제도를 갈수록 멸시하게 되었다. 1749년 남부지역을 순시하는 건륭제를 지방의 문인들이 나가 길에 엎드려 영접했으나 오경재 한 사람만은 누워서 통치자에게 굴복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신계급의 제약성과 봉건 교양의 영향 하에 유가의 윤리도덕을 믿었으며 그것으로써 봉건 말세의 퇴폐한 풍기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근런 이유로 그는 만년에 경학(經學) 연구에 탐닉했다. 오경재의 작품으로 유림외사 외에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12권이 있는데 그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4권뿐이다.
유림외사는 작자가 대략 40세로부터 50세에 이른는 사이에 옴니버스식 소설집이다. 원고는 55회인데 (50회라는 설도 있다.) 작자가 서거한 10여 년 후에 전초(全椒)인 김조연(金兆燕)이 처음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그 책은 없어지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일찍 나온 판본은 청나라 가경(嘉慶) 8년 (1803)에 찍은 와한초당(臥閑草堂) 판본이다. 56회로 되어 있는 와한초당본의 마지막 56회는 후세 사람이 끼워 넣은 것으로 판명되어 지금은 55회 본을 기준으로 한다. 유림외사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당시에 실제 있었던 인물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작자는 청왕조 지배계급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 고의로 명대에 있었던 인물들로 설정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유림외사의 사상과 내용
오경재는 청왕조 정권이 비교적 공고해진 시기에 살았다. 청왕조는 정치, 군사상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한인 문화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청왕조의 집권자들은 문인들에 대해 농락과 고압의 정책을 펼쳤다. 이학(理學)을 선양하고 예교(禮敎)를 숭상하며 과거제도에 팔고문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것 등은 문인들의 사상을 마취시키고 그들을 농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한 문자옥(文字獄)과 같은 사건으로 지식인들을 억누르고 각종 서적들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검사하고 금지하여 없애버린 일 등은 문인들에 대하여 취한 고압정책이었다. 오경재는 풍자소설 유림외사에서 과거제도 및 그것이 문인들의 정신상태에 끼친 엄중한 해독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사상, 문화 분야에서의 청왕조의 통치를 폭로 규탄했다. 노신(魯迅)은 ‘청조의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등의 세 황제 특히 뒤의 두 황제는 문예정책에 대하여 좀 더 크게 말한다면 ‘문화통제’에 매우 큰 노력을 기우렸다.’ 라고 말하고 그런 자료들을 보면 ‘우리는 그런 책략의 방대함과 신랄함을 알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이 남겨 놓은 노예적 근성의 유래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유림외사는 우리들이 봉건사회의 문화통치의 일부 특색들을 연구하며 그것이 후세에 남긴 영향을 없애는 데 대하여 도움을 준다.
오경재는 유림외사에서 우선 과거제도가 문인들의 정신을 부식한 엄중한 폐해를 지적했다. 그 시기의 선비들은 대부분이 부귀공명에 눈이 어두워 과거시험에 열중했으며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과거시험 한 가지 뿐이었다. 등장인물 중 가중 두드러진 전형적 인물은 주진(周進)과 범진(范進)이다. 그들은 2회와 3회에서 차례로 등장한다. 주진은 60여 세가 되었어도 수재(秀才)에 뽑히지 못한 동생(童生)이었다. 그는 산동 연주부(兗州府) 문상현(汶上縣) 설가(挈家) 촌의 농촌 학당에서 아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갖은 멸시를 받아가며 살았지만 결국 아둔하다는 이유로 학당에서 쫓겨났다. 매부의 소개로 상인들 밑에서 회계장부를 맡아보게 된 주진은 장사꾼들을 따라 성도(省都)에 갔다가 수리를 위해 공사 중에 있는 과거시험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시험장에 가지런하게 차려 놓은 시험생들을 위한 책상과 걸상을 본 그는 눈꼴이 시어 탄식하더니 상에 머리를 찧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정신을 차린 주진은 시험생들을 위한 책상을 보자 다시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는다. 재차 정신을 차린 그는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입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대성통곡했다. 같이 갔던 상인들이 주진의 태도를 보고 불쌍히 여겨 과거시험을 보도록 비용을 대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즉시 일어나 땅에 머리를 으며 상인들을 향해 자기를 다시 낳아준 부모와 같다고 ‘재생부모(再生父母)’라고 하면서 ‘ 나귀가 되고 말이 되어서라도 그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경사에 올라가 마침내 진사에 급제한 주진은 벼슬길에 나서 3년 사이에 어사(御使)로 승진하고 다시 광동(廣東)의 학도(學道)에 임명되어 마침 범진이 보는 과거시험의 시험관을 맡게 되었다. 한편 범진도 54세까지 동생(童生)으로 지낸 늙은이였다. 그는 20세부터 시험을 보기 시작해서 54세에 이르도록 20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시험관 주진 앞에 범진은 반백의 수염에 누렇게 뜬 얼굴로 겨울임에도 낡은 두건을 쓰고 남루한 삼베 장삼에 추워서 몸을 웅크린 채 제자리에 찾아가 앉았다. 범진의 누추한 몰골을 본 주진은 자신의 옛날신세를 회상하며 지금 자기 몸에 걸치고 있는 붉은 비단옷과 허리에 띠고 있는 황금색 인수를 내려다 보고 연민의 정을 느낀 나머지 빔진을 일등으로 급제시켰다.
합격자 발표를 위한 방을 붙이던 날 아침거리가 없어 한창 알을 낳는 암탉을 팔려고 품에 안고 장에 나갔던 범진은 처음에는 자기가 급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 너털웃음을 웃더니 ‘오, 그렇지! 내가 급제했단 말이지!’고 소리를 치며 기쁨에 못 이겨 미친 듯이 뛰었다. 작자는 주진과 범진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후의 희극과 비극을 통해 과거제도에 함몰된 그들의 정신적 면모를 그려냈다. 그들은 과거제도와 부귀공명이 문인들에게 전염시킨 일종의 ‘전염병’에 걸린 것이다. 과거제도는 무엇 때문에 문인들을 그처럼 크게 유혹할 수 있는가? 과거제도는 무엇 때문에 문인들의 사상을 미칠 정도로 함몰시킬 수 있었겠는가? 작자는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았다. 작품에 나오는 마이(馬二) 선생도 누차 과거시험을 쳤으나 거인(擧人)에 뽑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팔고문 숭배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거업(擧業)은 옛날부터 반드시 해야 할 일로 되어있다. 본 왕조에 와서 문장으로 관리를 뽑는데 이것은 더없이 좋은 법칙이다. 공부자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도 문장을 읽으려고 할 것이며 틀린 말은 적게 하고 후회할 행동은 적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날마다 틀린 말을 적게 하고 후회할 행동을 적게 하기에 주의한다고 하여 누가 그대에게 벼슬을 주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 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일시에 신세를 고칠 방법은 없다. 책 속에 황금으로 지은 집이 있고 천 종의 양곡이 있고 옥같은 미인이 있다.(人生世上, 除了這事, 就沒有第二件可以出頭, 書中自有黃金玉 書中自有千種粟, 書中自有顔如玉)’
주진과 범진이 과거에 급제한 후 그들의 행활에 일어난 변화는 마이 선생의 말이 옳다고 증명되었다. 선비들이 과거에 열중하는 이유는 바로 지배 계급의 지위에 올라 벼슬을 하고 돈을 벌며 인민의 고혈로 복을 누리고 권세를 부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진은 과거에 급제하자 벼슬을 하게 되었고 그가 벼슬을 하게 되자 친척이 아니던 사람도 친척이라고 찾아왔고 왕래하지 않던 사람들도 찾아왔다. 주진을 ‘작은 벗’이라고 조롱하던 매구(梅玖)는 자기가 주진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제자라고 자청했다. 더욱이 신선보(申禪甫)라는 사람은 설가촌에서 돈을 모아 예물을 사가지고 축하하러 왔다. 그를 쫗아내기까지 했던 학당에서는 ‘주나으리’의 ‘장생록위패(長生祿位牌)’까지 내걸었으며 그가 예전에 쓴 주련(柱聯)을 뜯어내어 다시 표구했다. 범진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이 마을에 알려지자 달걀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고, 술을 받아오는 사람도 있었으며, 쌀을 한 말씩 지고 오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닭을 두세 마리씩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범진이 장마당에서 밀쳐나자 그의 신을 찾아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의 가슴을 문질러주고 등을 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향시에 참가하러 가겠다고 하니 욕설을 퍼붓던 장인 호백정도 그에게 백방으로 아첨했고 종래 왕래가 없던 장향신(張鄕紳)은 금은과 집, 심지어 노복까지 주어 친근하게 굴었다. 범진은 과거에 급제한 지 2-3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밭과 가옥, 노복과 시녀들을 구비하게 되었다. 과거제도에 함몰된 사람은 주진과 범진 뿐이 아니었다. 마이 선생은 원래 농촌 청년 광초인(匡超人)을 만나자 과거를 보아야 출세하여 조상을 빛낼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병상에 누워있던 광초인의 부친도 아들의 팔고문 읽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열리고 아픔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헤어질 때 마이 선생은 광초인에게 과거볼 때 쓸 경비를 대주었고 자기 서가에서 책도 몇 권 골라주었다. 집에 돌아간 광초인은 과거 준비에 마음이 팔려 부친이 병상에 누워 대소변을 보아야하는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에 그는 명사(名士)로 나타나서 도박장을 벌려 구전을 받아먹고 남의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쳐주고 가짜 문서를 꾸미고 신분을 속이는 등 염치를 모르는 건달이 되었다. 예(倪)나리는 37년 동안 수재로 있으면서 가산을 다 날려먹고 마지막에는 악기를 수리하는 일로 연명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편수(魯編修)와 그의 딸도 팔고문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었다. 노소저의 경대 위와 뜨개질하는 상머리에는 팔고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후에 그는 시집을 갔는데 남편은 팔고문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에 온 종일 상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고 긴 탄식을 하던 노편수의 딸은 자기의 네 살난 아들에게 밤이 새도록 팔고문을 가르치고 외우게 했다. 여기서 작자는 과거제의 해독은 여성과 어린아이네게까지 미쳤다는 것을 폭로했다.
유림외사는 또한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이 벼슬을 하면 탐관오리가 되고 마을에 남아있으면 토호열신(土豪列紳)이 되는 것을 통하여 과거제도 인해 발생하는 폐해와 관리들의 부패상을 폭로했다. 거인(擧人) 왕혜(王惠)가 남창태수가 되어 부임하자 이 고장 사람들에게 ‘무엇을 낼 수 있으며, 소송 안건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얻어먹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청렴한 지부라도 3년을 하면 눈꽃같은 은 10만 냥을 얻을 수 있다(三年淸知府, 十萬雪花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아문에서는 언제나 ‘저울 다는 소리, 주산 놓은 소리, 매질하는 소리’가 들려나왔고, ‘ 성안 사람치고 태수가 사납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들은 꿈속에서도 태수를 두려워했다.’ 풍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이런 와예가 태수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강서에서 지일 능력있는 관리라고 ‘영광스럽게’ 지부의 상급기관인 도대(道臺)로 승진했다. 고요현(高要縣)의 지현(知縣) 탕봉(湯奉)은 밭갈이소를 잡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마침 회족 한 사람이 청탁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쇠고기 50근을 들고 왔다. 자기는 뇌물을 받지 않는 청렴한 관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게 30대의 곤장을 때리게 하고 큰 칼을 씌어 현청 앞에 세워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 칼 위에는 50근 되는 쇠고기까지 올려놓아 고기를 가져온 사람은 칼이 목에 조여드는 바람에 두 눈만 멀건이 뜨고 하릴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틀 만에 칼 위의 쇠고기에서는 구대기가 생기고 사흘만에 결국 그 사람은 죽고 말았다. 팽택현(彭澤縣) 지현은 소금 실은 배가 자기 현 관내에서 도적 맞았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현을 잘 다스려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소하러 온 뱃군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20대의 곤장을 때려서 내쫓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은 가운데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이 공생(貢生), 감생(甘生) 등의 특권을 이용하여 관부와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고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며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들은 인색하고 악독했다. 작자는 엄(嚴)씨 형제들을 그 예로 들었다. 엄공생(嚴貢生)은 이웃집 돼지를 가두어 놓고 오히려 돼지 주인더러 돈을 갖고 와서 돼지를 찾아가라고 했다. 또한 배를 타고도 뱃삯을 물지 않고 오히려 뱃사공을 도적이라고 모함했으며 심지어는 자기 제수씨의 재산까지 빼앗았다. 엄감생(嚴甘生)은 인색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는 집에 10여 만 냥의 은자를 두고도 부인을 시켜 고리대를 놓게 했다. 해마다 전당포에서 보내오는 이윤만 해도 300냥 은자에 달했다. 그는 가슴이 아픈 병에 걸렸으나 약값을 아까워하며 매일 새벽 3경까지 기를 쓰며 장부를 결산했다. 그는 죽을 때에야 손을 이불 밖에 내놓고 두 손가락을 곧게 펴고 무엇인가 가리키며 숨을 거두지 않았다. 두 조카와 집안 람들이 모두 그의 앞에 와서 두 친척을 아직 보지 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돈에 대한 두 가지 일을 똑똑히 분부하지 않아 그러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물었으나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저을 뿐이었다. 이때 그의 첩 조씨가 여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서며‘ 나리님, 저만이 나리의 마음을 알 수 있지요. 나리님께서는 저 등잔 심지 둘에 불을 켰다고 마음을 좋지 못하시는 것이지요. 기름을 허비한다고 말이예요. 제가 심지 하나를 뽑아버리지요.’라고 말하더니 재빨리 등잔불 곁으로 가서 심지 하나를 뽑아버렸다. 그러자 엄감생은 머리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고 숨을 멈추었다.
유림외사는 또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한 자태를 꾸며대며 제 스스로 고고하다’고 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그들은 대부분이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로써 엉터리 시문이나 몇 마디씩 지어가지고 풍류명사로 자처하면서 지주와 관료들의 식객질을 했고 이르는 곳마다 허세를 부리며 뽐냈다. 루부(婁府) 형제에게 기식하던 양집중(楊執中), 권물용(權勿用), 호삼공자(胡三) 등의 세 공자와 다시 세 공자에게 붙어살던 경란강(景蘭江), 포묵경(蒲墨卿) 등은 모두 이런 염치없는 인물들이다. 심지어 처와 선향 가게방을 꾸리고 있던 우포랑(牛浦郞)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우포의(牛布衣)의 시고(詩稿)에서 ‘상국 모 대인에게 드림이란 글자’를 보고 ‘시 두세 구절만 지을 수 있다면 학고에 가지 않고 과거를 보지 않아도 그런 나리님들과 왕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포의가 죽은 후 우포의가 남겨 놓은 시를 도적질하여 가지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우포의로 가장하고 허세를 부리며 사기를 친다. 작자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봉건 문인들의 다른 생활 한 면을 반영하면서 과거제도가 사회에 끼친 좋지 않은 영향을 고발했다.
팔고문은 사서에 대한 주희의 주해를 조요 내옹으로 삼았다. 유림외사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적발하면서 정주이학(程朱理學)에 대해서도 맹렬히 공격했다. 정주이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을 버릴 것(存天理 去人慾)’을 주장하며 ‘굶어죽는 것은 극히 잘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극히 큰일(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라고 했다. 작품에 나오는 왕옥휘(王玉輝)는 정주이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셋 째 딸이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니 ‘그것은 청사에 이름을 남길 일이니 나도 말리기 어렵다. 너는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 딸은 아버지의 부추김을 받아 8일 동안 굶고 죽었다. 딸이 죽자 왕옥휘는 크게 웃으며 ‘ 잘 죽었다1’ 고 말했다. 그러나 마누라가 술픔에 잠겨있는 것을 본 그는 참을 수 없어 외지로 떠나간다. 소주에 이른 그는 흰옷을 입고 배 위에 있는 젊은 부인을 보자 딸 생각이 나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천리(天理)로 눌러버리려던 인욕(人慾)이 되살아난 짓이었다. 정주이학은 인욕을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했으나 정주이학에 젖은 왕옥휘도 천리로 인욕을 철저히 내리누르지는 못했다. 작자는 왕옥휘의 형상을 통하여 천리로 사람을 죽이는(天理殺人) 유가의 죄악을 폭로 규탄했다.
작자는 유림외사에서 유학계의 추악한 군상 외에 자기의 이상을 대표하는 긍정적 인물의 형상도 부가했다. 작품의 첫머리에 나오는 원대 말엽의 시인 왕면(王冕)은 작자가 자기 이상에 의하여 부각시킨 인물이며 작품에 나오는 기타 인물들을 평가하는 표준으로 부각해낸 인물이다. 왕면은 천문지리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의 학문에 정통했으나 빈천한 생활에 안착하여 그림을 그려 팔아 연명했다. 그는 ‘이 법을 잘못 정했다. 서생들은 이 제도에서 출세의 길이 있게 되니 문행 출처마저 경시하게 되었다.(這個法却定的不好, 將來讀書人旣有此一條榮身之路, 把那文行出處都看經了)’라고 과거제도를 비난했다. 작자는 문인들을 왕면처럼 ‘문행출처(文行出處)’를 중시해야 부귀공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으뜸가는 품격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문행출처에서 문(文)이란 책에서 배운 지식이고 행(行)이란 도덕상의 규범이며 출(出)이란 벼슬길로 나아감이고 처(處)란 은퇴해서 머무는 곳이다. 유림외사 제11화에서는 이 말에 대해 ‘마을에 머물러 있으면 진짜 유학자가 되기를 잊지 않고 나가서 벼슬을 하면 왕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작자는 팔고문 시험을 쳐서 벼슬을 하려고만 생각하는 서생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문행출처를 서생들의 행동의 준칙으로 제기했다. 이런 방법은 당시의 현실에서 일정한 비평적인 의의를 갖고 있으었으며 또한 작자가 봉건적 전통사상에서 완전히 해탈하지 못했다는 것도 설명해 준다. 두소경도 작자의 이상을 나타내는 긍정적 인물이다. 그는 귀공자였으나 어느 정도 반역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과거제도를 반대하고 팔고문을 쓰는 서생들을 멸시했으며 사람들이 자기보고 벼슬을 하라고 권하거나 자기에게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는 순무(巡撫)가 서울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라고 추천해 주는 것도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그는 늘 돈을 내서 남을 도왔다. 그러다보니 밭과 재산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글을 지어 팔아서 살아갔다. 그는 자기의 관점으로 시경(詩經)을 해석하였으며 주희(朱熹)의 경서 해석에서의 정통적인 지위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걸어다녔다. 당시의 사람들을 두소경의 그런 행동을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도 못했다. 그는 한 사람이 여러 첩을 두는 것도 반대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 두소경은 어느 정도 정통적인 유가사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반역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각 개인의 해방을 요구한 인물이었다. 왕면, 두소경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외에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시정의 소백성(市井小民)’들도 위인명사들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작자가 희망을 기탁한 인물들이다. 시정의 소백성이란 거리에 사는 네 명의 기인 즉 절에서 자랐고 글쓰기에 능한 고아 계하년(季遐年), 화지통(火紙筒)을 파는 장기선수 왕태(王太), 차물을 팔면서도 그림 그리기와 책읽기를 즐기는 개관(蓋貫), 거문고를 탈 줄 아는 재봉사 형원(荊元) 등이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색은 노동으로 살아가며 권세가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공명과 이록(利祿)을 탐내지 않는 마음이다. 작자는 현인명사들에게서 실망을 느낀 나머지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희망을 기탁한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제 힘으로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거문고, 장기, 그림 그리기, 책읽 등을 즐기는 당시 사회 문인들의 특색을 부여함으로써 기인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는 작자의 사상적 편견에서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림외사는 청조의 통치자들이 과거제도를 통하여 문인들을 농락하고 그들의 사상을 부식시키는 일면도 폭로했지만 문인들에 대한 그들의 고압적인 일면도 폭로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문자옥이다. 오경재는 문자옥이 심한 시대에 살았다. 옹정제(雍正帝)가 통치한 13년 동안 즉 오경재 나이 23세부터 35세가 되기까지의 기간만 해도 적지 않은 문인들이 해마다 자기가 쓴 글 때문에 필화를 입었다.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오경재도 직접 내놓고 청조가 실시하는 고압정책- 문자옥을 적발 폭로할 수는 없었지만 우회적인 방법으로 함축성 있는 내용으로 묘사했다. 예를 들어 35회에서 노신후(盧信侯)는 집에 고청구문집(高靑邱文集)을 보존해 둔 탓으로 금서(禁書)를 사사로이 감추어 두었다는 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된다. 노신후의 이야기는 오경재 생전에 실제로 있었던 유저(劉著)의 일을 반영한 것이다. 유저는 방여기요(方輿紀要)를 보관해 둔 탓으로 모함을 받아 옹정 7년(1729)으로부터 건륭 원년(1736)까지 옥에 갇혀있었으나 사실은 방여기요는 당시에 금서도 아니었고 정치서적도 아니었다.
3. 유림외사의 예술성
유림외사는 여러 면에서 예술상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심각한 풍자다. 퐁자예술은 중국 소설 발전사에서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선진 시기의 우화와 진당(晉唐) 소설 가운데서 풍자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명대 이후에는 풍자 수법이 널리 운용되었다. 예를 들면 서유기, 서유보(西游補), 요재지이(聊齋志異), 종규착귀전(鐘馗捉鬼傳) 등 작품에는 의미심장한 풍자적인 부분이 있다. 유림외사는 그 전시기 풍자소설의 경험을 섭취하고 새로운 창조를 한 기초 위에서 중국 고전 풍자 소설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다. 노신 선생은 <차개정잡문이집(且介亭雜文二集)>에서 ‘풍자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름과 같이 말했다. ‘ 풍자의 생명은 진실이다. 거기에 쓰인 내용은 공개적이며 늘 보는 것이며 따라서 누구도 주의를 돌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일은 그때에는 벌써 불합리하고 가소롭고 비열한 짓이며 심지어 가증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렇게 행동해왔고 그렇게 습관 되었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도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지금 특별히 재기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것이다.’ 유림외사는 바로 이런 풍자 예술의 특색을 갖춘 작품이다. 민주주의적인 사상 요소를 갖고 있었던 작자는 사실주의적인 창작 방법으로 당시 사회, 특히 서생, 유학자, 관리, 명사 등에게 존재하는 추악한 현상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괄하고 집중하여 신랄하게 풍자했다. 유림외사의 사실주의의 심각성은 풍자당하는 매개 인물의 사상적 품격을 그 개인의 선천적인 것이거나 변할 수 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시 의 사회적 환경에 연관시켰고 과거제도가 조성한 것이라고 명확히 지적한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주진과 범진은 장기적으로 공명에 열중했으나 등과하여 벼슬을 하지 못했음으로 반백이 넘도록 경서를 읽고 팔고문을 짓는 사이에 케케묵은 유학자로변하고 만 것이다. 노소저가 부친 노편수의 영향 하에 팔고문을 미친 듯이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다든가 광초인 우포랑이 빈곤한 청년으로부터 사기꾼으로 타락했다든가 왕마임의 벼슬하는 남편을 얻을 생각만 한다든가 기생 빙랑(聘娘)이 관청에 부임하러 가는 진사(陳四) 나리를 따라가는 꿈을 꾼다든가하는 등등은 당시의 좋지 못한 사회적 환경에 부식된 인간들의 영혼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현실에 대하여 비교적 명석한 인식을 갖고 있던 작자는 풍자당하는 인물에게서 그 어떤 값싼 웃음거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아주 엄숙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풍자적인 웃음 뒤에는 동정 혹은 분노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풍자당한 인물이 상함에 따라 또는 풍자당하는 인물의 전후 변화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면 장정재(張靜齋). 엄공생(嚴貢生), 왕덕(王德), 왕인(王仁), 호삼공자(胡三) 등에 대해서는 웃음 속에 분노를 담고 있다. 주진과 범진에 대해서는 그들이 갖은 멸시를 받으며 고생할 때는 동정을 표시했으나 등과하여 벼슬이 높아진 후에는 그들의 무지함과 도덕상의 타락을 날카롭게 조소했다. 마이 선생과 노소저 같은 인물둘에 대하여 작자는 웃기는 했으나 깊이 탄식하였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웃은 후에 눈썹을 찌푸리고 괴로운 감을 느끼게 한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작자는 풍자예술이라는 날카로운 비수로 여러가지 인물들을 해부함으로써 그들의 뼛속에까지 침투된 과거제도와 봉건사회의 죄악을 밝혀냈다. 그런 이유로 노신은 유림외사는 ‘공정한 심리로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했다’라고 찬양했다.
오경재는 유림외사에서 완곡하고 함축된 풍자수법을 채용했다. 그는 자기의 시비 관념과 애증의 감정을 직접 토로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 현상 자체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통하여 나타냈다. 예를 들면 범진과 엄감생 등 인물들에 대하여서는 전형적 의의가 있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엮어 나감으로써 그들의 내심 세계를 한층 한층 까내어 깊이 밝혀냈다. 범진이 처음 과거 시험장에 나타났을 때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야윈 늙은 동생(童生) 신분이었다. 시험관으로 나타난 주진은 범진의 초라한 몰골을 보자 그가 바로 자기가 겪은 것과 같은 쓰라림을 겪고 있음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그후 장인인 호벽정이 향시(鄕試)에 참가하러 갈 노자를 대주지 않는다든지 아침거리가 없다든지 장거리에 닭 팔러 간다든지 하는 것들은 뜻을 이루지 못한 때의 범진이 당하는 고통을 기술했다. 후에 와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미쳐 날뛴다든지 상복을 입은 기간에 외직에 나가 돈을 걷어 들인다든지 학도(學道)가 되어서도 송대의 대시인 소식이 어떤 사람인가를 모른다든지 하는 것을 통하여 그의 허위적이고 우매하며 케케묵은 유학자로써의 물골을 나타냈다. 또한 엄감생은 인색한 인물이다. 그는 엄공생의 소송 안건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헛되이 썼고, 정실부인 왕씨가 죽자 몇 천 냥의 돈을 써서 조씨를 정실로 들어앉히기도 했다. 그 때문에 가슴앓이를 앓았지만 그는 매일 새벽 3경까지 장부를 결산한다. 죽을 때에도 등잔 심지 둘에 불을 켜서 기름을 허비한다고 차마 숨을 거두지 못한다. 작자는 이와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들로 인색한 사람으로써의 엄감생의 영혼을 보는 듯이 그려냈다. 작자는 그밖에 팽구, 호성, 왕덕, 왕인 들에게 대해서는 그들의 한 인물 혹은 한 사건에 대한 전후 모순되는 태도를 통하여 그들의 비열한 정신 상태를 퐁자했다. 매구는 주진이 급제하기 전에는 그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조소했으나 후에 주진이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된 후에는 비굴하게 자기는 그의 학생이라고 자칭한다. 호백정은 범진이 급제하기 전에는 그를 ‘뾰족한 주둥이에 원숭이 턱을 가졌다’고 오만무례하게 욕설을 퍼부었으나 그가 급제한 후에는 그를‘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고 풍모가 좋아 성안의 장부(丈夫)와 주부(州府) 나리들 가운데도 나의 사위와 같이 잘난 사람은 없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왕덕, 왕인은 매부 엄감생이 조씨를 정처로 들여앉히려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엄감생이 보낸 돈을 받자 빨리 그렇게 하라고 독촉한다. 엄공생에 대한 풍자에서는 거의 말과 행동의 모순을 통하여 퐁자 효과를 높인 것을 볼 수 있다. 즉 엄공생이 장정재 등에게 방금 ‘이 동생은 솔직한 사람이라 마을에서 종래로 실 한 오라기 쌀 한 알이라도 남의 것을 자치한 적이 없소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집 종에 의해 엄공생이 바로 그날 아침에 남의 집 돼지 한 마리를 가두어 넣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유림외사의 언어는 남방 민간 구두어를 기초로 사용했다. 그리고 작중 인물들의 신분에 맞는 말을 쓰기 위하여 문어와 다른 행업에서 쓰는 직업적인 언어도 적지 않게 씌어졌다. 이런 언어의 주요한 특색은 소박하고 정확할 뿐만 아니라 명쾌한 유머가 되었다. 간결한 몇 마디 말로써 한 개 장면, 혹은 인물의 특색을 그려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말들 같지만 실제상으로는 함축되었고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진이 광동 시험장으로 간 후의 한 단락의 묘사의 기타 여러 장면들에서 상술한 언어의 특색들을 찾아볼 수 있다. 유림외사의 구성은 주요인물이나 중심되는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큰 관계가 없는 인물과 독립성이 강한 이야기들로 맞물려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에게 주요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은 바뀌면서 상이한 계층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물과 다른 사건들은 작품의 주제사장의 수요에 의하여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내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유림외사는 과거제도 하의 지식인들의 생활을 제재로 한 이전 작품과 풍자문학 잪뭉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작품으로써 후세의 문학, 특히 후세의 풍자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만청(晩晴) 시기에 나온 견책(譴責) 소설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와 ‘20년 동안 목도한 기괴한 현상[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은 유림외사의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문학사(청년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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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외사(儒林外史)
1. 유림외사<儒林外史>란?
<儒林外史>는 18세기 중국 소설계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중국소설 역사상 불후의 풍자소설로서 오경재 만년의 작품이다.
<儒林外史>는 이전의 중국소설들이 현실적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귀신이야기, 호걸들의 초인적인 활약, 재자가인들의 달콤한 사랑 등이 고사로 동원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자 자신의 시대사회 및 가정생활을 소재로 하여 작자의 독창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작품에는 작자의 세계관과 창작태도가 매우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비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붕괴기 중국봉건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소설로 이야기 구성방식에 있어서 독특한 면을 보인다. 고정된 주인공이 없이 각각의 단편적 이야기 여러 개가 모여서 이야기 전체를 이루는 옴니버스 형태의 구성을 띄고 있다. 여러 이야기가 모여이야기 전체를 만들었지만, 모든 이야기가 지식인 사회의 어두운 면이라는 중심을 향한다는 점에서 장편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2. 작자 오경재(吳敬梓)
<儒林外史>의 작자는 오경재(吳敬梓,1701-1754)로서 자가 민헌(敏軒)또는 문목(文木)이라 하고, 호를 입민(粒民)이라 불렀으며 안휘성 전초(全椒)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원래 대관료 지주 가문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로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갔다. 그는 13세에 어머니를 잃고 부친을 따라 장강남북을 돌아다녔다. 23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에 따를 재산분배 문제로 친척 간에 다툼이 벌어졌으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을 친족에게 빼앗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금전과 재산을 중히 여기지 않고 남을 돕기를 즐기며 몇 차례의 향시에 참가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다. 옹정11년(1733) 33세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남경으로 이사했으며 36세 때에 박학홍사과 성시에 참가하도록 추천을 받았으나 그는 병을 구실로 북경으로 가지 않았다. 41세 후에 그의 생활은 더욱 빈곤하게 되었고, 그는 54세에 양주에서 서거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세가자제인 오경재는 점차 부귀공명을 경시하고 멸시하게 되었다. 가정의 몰락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상류계층의 추악상과 국민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비교적 심각한 인식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부패한 정치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팔고문과 그것으로써 시험을 치는 과거제도를 갈수록 멸시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신분에 의한 제약성과 당시의 사회풍토의 영향 하에 유가의 윤리도덕을 믿었으며 그것으로써 봉건말기의 퇴폐한 풍기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며, 실제 저작으로 전하는 것은 <유림외사>와 <문목산방집> 12권 중에 4권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3. <儒林外史>의 창작배경
1) 정치적 배경 : 팔고문(八股文)을 통한 과거제도
청대는 중앙집권을 계승하고 강화시켜 전제군주제도를 확립한 시기여서,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세력이 강성하였지만 실제로 일반 백성이 받는 압박과 착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관리의 횡령과 가혹한 세금 수탈 또한 끊이지 않았다. 그 중 지식인에 대한 강경책으로 文字獄을 실시하였으며, 그에 대한 과거제도의 일환이 팔고문으로 인재를 선발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지식인의 시야를 <오경> <사서>에 두도록 하여 지식인들을 학문이 얕고 견문이 좁은 사람들로 만들었다.
2) 경제적 배경 : 경제구조 변화로인한 무질서와 혼란
이 시기는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산업구조가 대규모 상업경제로 성장하면서 자작농이 적어지는 대신 상인이나 관료가 대지주로 바뀌고 농촌사회가 몰락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로 상업자본과 부의 집중 현상을 초래하여 생산을 직접 담당한 평민세력이 부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했고 고리대금업 등이 흥행했으며 상업에서의 이러한 횡포는 날이 갈수록 경제를 무질서와 혼란 속에 빠뜨렸다.
3) 사상적 배경 : 봉건통치에 반하는 진보적 사상의 출현
사상적으로는 진보사상가들인 고염무, 왕부지, 황종의 등이 나와 명왕조가 망한 후 민족적 압박과 봉건 독재를 반대하는 반청투쟁을 전개한다. 그들은 봉건 통치 특히 명 왕조통치의 폐단에 대해 심각한 비평을 가하면서 민주 사상에 기초한 정치적 주장과 개량 방법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진보적 사상은 민족 압박에 반항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런 사상가들은 전통적인 정주이학을 반대하였으며 이것을 삶을 구속하는 족쇄로 생각했다. 또한 진보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당시 사회의 모순과 과거제도의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4. <儒林外史>의 구성
<儒林外史>는 소설 전체를 통하여 중심인물이 없을 뿐더러 계통적인 이야기 줄거리도 없다. 수많은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했다가는 사라지면서 그때그때 짤막한 삽화 같은 것을 계속 얘기해 준다. 즉, 하나하나의 단편소설을 연결시킨 장편이요, 비록 장편이라지만 단편의 체형을 지닌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설자(楔子)와 결미(結尾)를 제외하면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설자(楔子) : 독립적이면서 특별한 서사공간으로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제시해준다. (작품 전체의 축소판에 해당)
제 2회부터 30회까지의 제 1부: 과거제도와 이학에 오염된 유림들에 의한 부패, 착취, 위선 등의 행위가 중심
31회부터 46회까지의 제 2부: 제 1부에 등장하는 오염된 유림의 파멸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각성과 실천의 노력이 묘사
47회부터 55회까지 제 3부: 이러한 이상 실천의 노력이 실패하면서 더욱 타락해 가는 현실을 보여 주는 인물과 사건들이 중심
결미(結尾): 이상을 점검하면서 미래에 대한 탐색으로 마무리
5. <儒林外史>의 등장인물
1)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 (노편수 부녀, 주진,범진 형제, 왕옥휘의 딸..등)
노편수 부녀는 과거 제도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노편수는 아들이 없어서 딸을 아들로 여기고 5~6살부터 선생을 불러다가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봉건사회 속에서 여자 아무리 재능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시험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으므로 단지 좋은 신랑을 만나 그 신랑이 급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공명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어 크게 상심한다. 그러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희망을 나이 어린 자식에게 기탁한다. 영문을 모르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는 온 종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서를 읽고 외우면서 새벽 세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게 된다. 이 두 부녀는 출세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과거 시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부패한 탐관오리상과 악덕지주 비판 (왕혜, 엄공생, 엄감생 형제)
엄공생은 농민을 착취하는 악덕지주이다. 그는 매우 비열하고 저속한 인물로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들게 한다. 그는 불량배들이나 사용하는 수단을 써서 인근의 가난한 농부의 돼지를 약탈하려 다가 주인이 찾아와 항의하자 적반하장 격으로 돼지주인을 구타하여 그이 다리까지 부러뜨린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배를 타고 가다가 배 삯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꾀를 내어 과자를 옆에 두고 자는 척한다. 그는 선원이 그것을 몰래 먹자 비싼 보약이라 우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배 삯도 주지 않고 오히려 몇 푼의 손해배상까지 뜯어내는 악한 행동을 일삼는 저질적인 인물이다. 엄감생 또한 그의 많은 재산은 모두 농민의 피와 땀, 그리고 뼈골이 부서지도록 일하게 하여 얻은 결과물이다. 그는 자기의 이익과 자신의 체면과 관련된 돈은 아낌없이 쓰지만, 그 이외의 돈을 쓰는 데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다.
이러한 악덕지주들의 착취로 농민은 농사를 지어 보았자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되어 ‘빈익빈, 부익부’라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기존 여권에 저항의식을 가짐 (현실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두소경과 침경지)
두소경은 작품 속의 작가 자신의 화신으로 봉건사회와 기존 여권에대한 비판의식을 과감하고 확신 있게 나타내고 있다. 그는 시경해석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주희의 관점을 탈피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나타내었다. 또한 그가 남경으로 내려갈 때 술을 준비하고 처자와 함께 청량산에서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봉건사회에 있어 평일에 부녀자들의 문밖출입도 금했는데, 하물며 함께 노닐었다는 것만 보아도 두소경이 사회의 풍습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생활 정신은 미신타파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끼쳤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하여 부창부수는 인생의 행복이며 즐거운 가정이라 하였고, 첩을 두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픈 천리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청렴한 관리와 이상적인 평민 지향(우육덕, 소운선 등의 이상사회 지향인물)
우육덕는 비록 가난하지만 청렴결백한 인물이다. 그는 실학을 존중하며, 부귀공명을 경시하였고, 영리과 권세를 멸시하면서 백성들의 고통까지 동정해 주는 인물이다. 그는 박식하여도 박식한 티를 내지 않고, 진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진사의 티를 내지 않는 아주 인품이 훌륭한 이상적인 관리상을 보여준다.
소운선 또한 이상적인 관리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그동안의 관리들이 황하의 치수관리를 소홀히 하여 이주민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는 백성을 위해 성을 쌓고 치수를 관리한다. 그는 진정한 관리라면 백성을 위해 애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백성을 위해 교육에 앞장서는 이상형 관리의 인물을 보여준다.
6. <儒林外史>의 사상 및 풍자성
중국의 풍자소설이 일반적으로 사회현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상세계를 찬양하는 두 가지 태도로 나누어지듯이 <儒林外史>에서는 이 정․반인물을 통해 사회폐단을 비판하고 작자자신의 이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1) 과거제도에 대한 풍자
청대의 과거제도는 팔고문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했다. 이는 청 왕조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해줄 수 있는 지식인을 배양하고 민족적 대립감정에 의한 반항정신을 진압시키기 위해 시행한 것으로서, 개인의 사상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통치자 계급에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작자는 <儒林外史>를 통해 이러한 과거제도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에 있어 팔고문이라는 제한된 형식을 두어 응시하는 지식인들에게 사고의 범위를 제한하고 사상의 획일화를 가져온 것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한편 부귀공명과 명예에만 집착하는 무지한 지식인의 위선적 모습을 폭로하고자 하기도 했다. 즉 팔고문 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에 대한 지나친 중시로 인하여 획일화된 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던 지식인, 팔고문 외에 다른 학문과 생활에 대해서는 무지무능한 지식인, 그리고 지식과 실천이 분리된 채 단지 개인의 부귀공명에만 관심을 가져 점점 도덕성을 잃어가는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다.
2) 사회병폐에 대한 풍자
지식인들은 학문이 아닌 과거시험에만 열중하고, 관직에 오르면 명예를 쫒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추악하고 악랄한 부패행위를 서슴없이 하게 된다. 또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시골 향민위에 군림하는 지주들도 직접적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압박하고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부와 내통하여 평민들을 못살게 구는 악덕지주가 된다. 이처럼 <儒林外史>는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백성들을 유린하고 괴롭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탐관오리를 비판하며 당시 정치의 부패함을 폭로하였다.
3) 봉건사상의 탈피와 진보사상의 추구
<儒林外史>는 단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만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 인물상을 통해 작가의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개선 방안과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를 교화하고자 하였다.
오경재는 소위 ‘작가자신의 화신’이라 하는 ‘두소경’이라는 인물을 빌어 자신의 이상세계를 제시하고자 했다. ‘두소경’은 현실세계와 대립하며 반항정신이 강한 인물로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의 학설에 너무 얽매여 있는 학문의 풍조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형식에만 치우친 예교를 무시하며 당시의 예법과 세속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부일처제를 주장하여 부부의 화애를 ‘인생의 행복이며 즐거운 가정’으로 느꼈으며 당시의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다. 두소경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당시 일반 지식인들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각종 비방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예교가 삼엄하고 남녀의 경계가 요구되는 봉건사회에서 두소경의 구 예교에 대한 비판, 남녀평등사상 제시 등을 통해 작자의 이상적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심옥지’란 인물을 통하여 기존 여권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나타내어 주었다. 그녀는 수를 놓고 시문을 팔며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여성을 단지 남성의 한 부속품처럼 여기던 당시의 봉건사회의식에서 벗어나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사회의 봉건문화를 반대하며 자유와 평등의 신 관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봉건적인 예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억압된 굴레로 작용하였다. 작가는 예교에 얽매여서 진실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허황된 모습을 그리고, 또한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인간상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6. <儒林外史>의 특징
1) 생동감있는 백화문의 사용
<儒林外史>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등의 장편소설과 달리 각 단편의 이야기와 인물을 통하여 ‘유림’ 즉 지식인의 사상과 생활을 반영하였다. <儒林外史>이전에도 ‘재자가인소설’ 들에서 지식인의 형상들이 나타나 있지만 그것들은 개성이 선명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 사상 수준도 높지 못하여 주인공의 대부분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이었고 그 이야기도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다. 그러나 <儒林外史>는 특히 당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폭로하되 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확하고 고상한 백화문을 사용하여 생활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웃기는 일이나 비열한 일들을 교묘히 구성, 백화의 수법과 질박하고 생동적이며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작중인물의 품성과 정신면모를 남김없이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생생한 입체감을 준다.
2)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진지한 풍자
<儒林外史>는 그 이전 시기 풍자소설의 경험을 섭취하고 새로운 창조를 한 기초 위에서 중국 고전풍자소설의 초고봉에 올랐다. <儒林外史>의 사실주의적 심각성은 풍자 당하는 매개 인물의 사상품성을 그 개인의 선천적인 것이거나 변할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연계시키고 과거제도가 조성한 것이라고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 작자는 풍자 당하는 인물에게서 그 어떤 웃음거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매우 엄숙한 태도를 취하였는바 작품에서는 풍자적인 웃음 뒤에 동정과 분노가 감추어져 있고 풍자 당하는 인물의 차이에 따른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완곡하고 함축된 풍자
<儒林外史>는 또한 완곡하고 함축된 풍자수법을 사용하였는바 자기의 시비관념과 애증감정을 직접 토로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 현상 자체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통하여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가소롭거나 가증스럽거나 한 것을 독자들은 주로 작중인물 자신의 행동과 언어로부터 느끼게 된다. 작자는 묘사 역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단지 객관적으로 사실인 것처럼 써 내려가며 독자 자신이 스스로 발견하고 판단하도록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부정적인 뜻을 가진 말이나, 나쁜 의미의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신랄하고 날카로운 풍자로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노신은 <儒林外史>는 “공정한 심리로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라고 찬양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1. 오경재 저, 최승일외 공역, <<유림외사>>, 여강출판사
2. 김학주 저, <<중국문학사>>, 신아사 , 1990
3. 허세욱 저, <<中國古典文學史(下)>> 법문사
4. 서경호 저, <<중국소설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5. 그 외 인터넷 검색 (empas, naver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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