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공산당 혁명과 가부장
글에 관한 글 2013/02/28 10:58
<밤(夜)>은 중국의 여류 소설가인 딩링(丁玲, 1904~1986)의 작품이다. 수많은 중국 현대문학 작가들 사이에서 특히나 인물의 내면 심리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그녀는, 1948년에 쓴 대표작 <태양이 상깐허를 비추고(太陽照在桑干河上)>로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스탈린상을 거머쥐기도했다. 딩링은 1932년 공산당에 가입해 활발하게 활동했고, 한때 국민당에 의해 3년여 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중국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열렬한 관심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태양이 상깐허를 비추고>는 중국 토지개혁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며, <밤> 역시 1940년대 중국 혁명 당시의 해방구를 배경으로 어느 공산당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약 10페이지 분량의 짧은 소설 <밤>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대략 이렇다. 주인공 허화밍(何華明)은 어느 작은 시골 공산당 마을에서 공산당 간부 일을 맡고 있는 남자다. 허화밍은 공산당 혁명 사업과 그에 관련된 회의 때문에 농사일은커녕 집에 매일 귀가하지도 못하는 처지인데, 집에 기르는 소가 새끼를 낳아야 해서 사나흘 만에 집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밤>은 바로 그 하룻밤동안에 벌어지는 주인공 허화밍의 의식 흐름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정확히 1940년대의 어느 농촌 해방구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 공산당의 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다. 해방구란 당시 중국의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던 마을을 말한다. 소설 속 마을은 아주 작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민이 공산당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스무 가구 중에 무려 스물여덟명이 공산당원이다. 주인공 허화밍 역시 공산당의 혁명 운동에 가담하여 공산당 간부라는 중요한 직책으로 오르게 되었다. 한낱 보잘것없는 농사꾼이었던 그가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화밍은 공산당의 일원으로서는 외적으로는 개화된 듯한 행동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정작 여자를 그저 물건처럼 취급하는 봉건적인 사고를 뿌리 뽑지 못하고 아내에게 막대한다는 점이 문제다. 그는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선진적인 역할을 맡고 있을진대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밤>은 주인공 허화밍을 공산당 간부로서의 잘나가는 모습보다는 가장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품 속에서는 허화밍의 낡은 의식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드러난다.
대문에 서서 앞산에 활짝 핀 복숭아꽃을 보고 있는 칭쯔는 성장이 아주 빨랐다. 분홍 끝으로 묶은 긴 까만 댕기머리를 한 채 까만 조끼 양쪽으로 꽃무늬 소매의 팔을 들고서 대문 문설주에 괴고 있었다. 열여섯 살 아가씨가 이렇게 키가 큰데 법정 혼인연령이 무슨 필요가 있나. 얼른 시집을 보낼 일이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늙은 괴물은 정말 ’물적 토대‘ 구실을 못해. 소도 새끼를 낳는데 저 여자는 뭐야. 완전히 알도 못 낳는 암탉이야.’
허화밍은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을 지주의 딸 칭쯔라는 여자 아이를 보며, 몸이 어른 만큼 성장했으니 아버지가 알아서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딸을 빨리 시집보내지 않고 두는 아버지를 욕한다. 정작 딸이 지금 결혼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녀의 결혼은 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화밍은 자신보다 열 살이 많은 아내(그는 스무 살 때 서른 두 살의 아내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를 속으로 ‘늙은 괴물’, ‘물적 토대 구실을 못 한다’, ‘역겹다’ 와 같은 과한 표현을 할 정도로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과거에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난 지금, 그와 아내는 다시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지만 아내가 아이를 더 이상 낳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아내는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남편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아파 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권의식이 강한 허화밍은 그러한 아내를 그저 고장 나서 못 쓰는 기계마냥 취급한다.
한편, 소설 속 허화밍의 의식과 행동을 잘 살펴보면 평범한 농민이자 가장으로서의 모습과 능력 있는 공산당원으로서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부분도 보인다. 그가 아끼는 회색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저녁밥을 기다리는 모습은 딱딱하고 보수적인 가장의 모습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는 외양간에서 옆집 청년회 주임의 아내이자 공산당 간부인 허우꾸이잉이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지만 그는 유혹을 뿌리치고 그녀를 뒤로한 채 과감히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허화밍은 공산당원으로서 비판받을 것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진정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가정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거부했던 것이다. "우리는 비판받게 될 거야" 라는 그의 대사는 그저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허화밍은 잠자리에 누워 내일이면 또 해야 할 혁명사업 회의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잠이 든 아내의 눈물 한 방울과 자신 곁에서 코를 고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며 집안의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고, 서서히 잠이 든다. 남들이 깨어날 새벽 시간이 되어서야 말이다. 그는 정작 집안일을 하러 집에 왔으면서도 온통 혁명사업 생각만 하다가 하루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소도 돌봐야 할 텐데......” 하지만 그는 소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잠을 자야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을 이루려고 애를 썼지만 회의장이나 군중들만 어른거리고, “선전사업이 부족합니다. '농촌이 낙후되어있어요. 부녀 사업은 빵점입니다......” 같은 말만 들렸다. 그런 것들이 생각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농촌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이곳에는 혁명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어떤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글자도 모른다. 아들조차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향 지도위원이고, 내일 회의가 지닌 의의에 보고를 해야 했다......
<밤>에서 허화밍이라는 남성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출세했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인물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남권의식에 찌든 가장의 모습을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다중적인 모습들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에서처럼, 한 작은 가정을 꾸린 농민이었던 그가 갑자기 공산당의 간부로 일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이렇듯 <밤>이라는 제목은 허화밍이 농민이 아닌 공산당 간부로서의 삶에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공산당 혁명이 번졌던 당시 많은 농민들이 발 벗고 혁명에 가담했다. 소설 내용에도 나와있듯 당시 농민들은 배운 것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글자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산당 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 아마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농민들의 대다수가 허화밍과 같은 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너도나도 혁명에 앞장서서 선진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려하면서도, 보잘것없는 농민으로서의 자기 본래의 모습과 괴리감을 느껴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지극히 봉건적인 의식을 버리지 못한 허화밍이 외부에서 성공하는 공산당 간부의 모습으로 변모할수록 허화밍 아내의 심적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이 부부는 마치 가정 파괴 직전까지 내몰린 것처럼 보인다. 허화밍은 혁명가로서의 의식과 농민으로서의 의식 사이에 갈등하고 혼란을 느끼면서도 아내에게는 결국 예전처럼 대하지 못한다. 혁명이라는 것이 허화밍을 점점 그러한 이중적인 인물로 바뀌게 만들었고 결국 그렇게 새로이 탄생한 인물의 태도는 아내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히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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