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는 미국 텍사스주 포트아서 출생이다. 1946년 캔자스 시립미술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뒤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48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추상표현과의 영향아래 참신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라우센버그의 예술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은 1949년 Art Student Ceague에 가맹해서 ‘단색회화’를 제작하면서부터이다.
단색회화에는 백색회화(全白色 White painting), 흑색회화(全黑色 Black painting), 적색회화(全赤色 Red
painting)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우센버그의 단색회화는 그의 첫 개인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제시했던 <백색회화 White painting>는 추상표현주의의 그림들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당혹감을 주는 것이었다. 앨런 케프로우(Allen kapraw)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표현주의의 떠들썩함과 행위가 지배하던 배경에서 이 그림은 관람자를 침묵이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고요와 직면하게 해준다고 했다. 또한 관람자의 그림자만이 텅 빈 스크린 위에 움직일 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참기 힘들어 불편한 마음으로 어정거리는 그들의 이미지가 백색회화에 반영되고 있다고 한 데서 라우센버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불편한 분위기의 조성은 화가가 그림에 대한 어떤 책임도 포기한 채 관람자와 그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라우센버그의 백색회화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사물에 대한 고유색을 회화적인 색채로 보도록 허락하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적 색채의 선택에 대하여 사물들의 속성인 유동성 없는 색채의 완전무결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화가 아니더라도 사실로서 일상의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다. 죤 케이지가 “백색회화는 빛과 그림자의 미립자를 위한 비행장이다"라고 말했듯이 백색그림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사람의 그림자, 빛과 그늘, 무수히 작은 반사광들에 대한 회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말레비치의 ‘白위의 白’과 같은 미학과는 전혀 상반된 견해로서 생활이 예술 속에 직접 융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한 순수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백색회화에 이어 제작된 <흑색회화 Black painting>는 신문이나 잡지를 뜯어 붙인 콜라주 위에 검정색이 칠해졌다. 작품에 칠해진 검은색 물감의 다양한 농도에 의해서 작품이 결정되어지며 이것은 여러 가지 종이의 다른 질감에 의해 각각의 상태가 독특한 진통을 야기 시키는 광범위한 검은색이었다.
라우센버그는 흑색회화들에 대하여 “자기가 나타내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화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어들이지 않는 위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했다. 黑의 경우에도 白의 경우에도 자기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여기에 예술이 있으며 예술의 공격성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매혹적인 범위의 사물들을 자신의 색깔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은 색의 이념이나 본질로서가 아니라 실제 사물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였다. 그의 <적색회화>(그림15)는 활동적인 콜라주의 모자이크 위에 만들어졌다. 콜라주 위에 강렬한 붉은 에나멜로 칠한 좁고 긴 캔버스인 적색회화는 오목한 거울이 그림의 정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붉은 옷, 흰 셔츠, 반사되는 반경은 공간 위에서 축소되기도 하고 팽창되기도 하면서 포착된다. 또한 대상은 끊임없이 움직임을 지니게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그의 단색회화의 절정이자 추상표현주의와의 결별을 상징하는 행위로 1953년 드 쿠닝의 소묘를 지워 버린 <지워진 드 쿠닝>을 발표 했는데,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지운다는 것은 일종의 반항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삭제할 작품들은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작가의 작품이어야 했으며 그 조건에 가장 적합한 것이 드 쿠닝의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라고 한 그는 한때 약속했던 유토피아적 세계의 해결을 제공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드 쿠닝의 예술을 지움으로써 새로운 예술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단색회화에서 바탕에 깔려있던 콜라주의 요소는 1953~1954년에 이르러 점차 화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1955년에 와서는 출처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확실해지면서 화면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콜라주와 함께 점차 오브제가 등장하고 1955년에 와서 이 두 요소가 완전히 결합된 위에 자유스러운 붓질을 가함으로써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른바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이 탄생하게 된다. 회화와 오브제를 결합한 ‘컴바인 페인팅’ 작업을 발표해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컴바인 아트’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은 ‘회화+조각’ 이라는 2차원과 3차원을 동시에 수용하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탄생시켰다. 이는 그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을 실험해가는 작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1955년 이건갤러리에서 작업실 벽에 더덕더덕 붙여놓은 것 같은 사진, 인쇄물, 신문조각 등의 폐품을 결합시킨 이른 바 컴바인 페인팅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침대Bed, 1955>(그림16)를 들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캔버스 대신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이불 위에 물감을 쏟아 부은 것으로써 그림이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란 추상표현주의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회화와 조각, 실재와 허상 사이를 넘나드는 혼성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침대>는 실제 오브제인 침대의 틀을 얕게 만들고 그 안에 누빈 이불, 침대보, 베개 등을 붙인다. 침대를 수직으로 세워 벽에 걸고 그 위에 물감으로 색칠을 하는데, 마치 드 쿠닝과 폴록을 연상시키는 거친 붓 자국의 흔적들이 아무런 재현이나 표현적 의도와 상관없이 화면에 더해져있다. 그러나 화려한 색감과 거친 붓터치는 침대를 더욱 불결하고 추하게 만들며 동시에 오브제가 가진 원래의 성격을 파기하는데, 추상표현주의의 그 영웅적 붓자국은 더 이상 위대해보이지 않는다. 평소 드 쿠닝과 폴록을 존경해왔다는 라우센버그는 그들의 대표적인 회화의 성과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하고 이러한 시도는 그의 컴바인 페인팅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내 그림은 현실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원근법이 현실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이 환상인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내 컴바인 페인팅은 현실적 사실이다.[...]그림은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다.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 틈바귀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라우센버그는 생활과 예술의 결합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서 결합의 원초적 형태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요소들이 그들의 거대한 화면이 아닌 오브제나 조악한 판넬 위에서는 전혀 미적인 요소로도, 아름답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한 작가 개성의 상징도 아닌 단순한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흔적은 오브제와 평면을 추하고 지저분하게 만들며 통일성과 조화를 방해하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산업사회의 폐기물에서 얻어지는 온갖 오브제들을 텍스트화 하여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수집한 쓰레기를 화면에 ‘컴바인’하면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들을 공시적 입장에서 텍스트화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는 텍스트의 잠재적 구조를 나타낸다. 그는 수집한 오브제를 조합하여 거친 붓자국으로 표현했고, 관객들은 그 작품에서 텍스트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라우센버그가 사용한 오브제들은 화면 안에서 서로 종속적이지 않고 등가의 무게를 가지며 각각 이항대립쌍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다.
1959년에 발표한 <모노그램>은 박제된 염소의 몸통에 폐타이어를 끼우고 바닥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꼴라주 위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자유로운 붓질과 함께 모든 것이 회화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컴바인 페인팅으로서 또 다른 역작의 의미를 준다. 냉정하고 단아한 후기 회화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다양성, 변화, 수용이란 주제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엄숙한 고급미술에 대한 허무주의적 도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단절된 요소들의 이질적 결합은 전통적이고 통일된 과거 미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고, 뒤샹과 다다 작가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컴바인 페인팅은 이후 아쌍블라쥬(Assemblage), 또는 설치(installation)로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겠다.
라우센버그의 독특한 형식적 쟝르는 바로 혼합 회화로 조각도 회화도 오브제도 아닌 새로운 개념의 작품인데, <계곡 Canyon>(그림18), <오달리스크 Odalisque>(그림19)에서처럼 평면과 입체가 고전적 방식에 애매하게 뿌리를 둔 채로 전시된다. 고급미술의 재료와 저급한 재료들이 섞이고 그들 위에 뿌려지고 더해진 거친 붓 자국은 미감에 대한 절대성을 상실하게 하고 공간 안으로 침투한 작품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재료들과 아름답지 않음에 대한 수용으로 혼란스럽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밖에도 <코카콜라 플랜>(그림20), <북미산 사슴>(그림21)에서 의자를 거꾸로 매다는가 하면 팝 아트를 선도한 상품의 과감한 선택과 외곽에 날개를 달아 붙이는 재치를 보인다.
"나는 내 작품을 조합된 것이라고 부른다. 즉 조합된 작품들, 즉 조합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떤 범주 속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다. 만일 내가 내 작품을 그림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조각이라고 했을 것이고 내가 그것을 조각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저부조나 회화라고 불러야만 한다고 나에게 말했을 것이다.[...]다다이스트들에게 있어서는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엄중한 검열이었고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에게 있어서는 어떤 움직임을 포함하는 것, 과거를 현재 속에 도입하는 것, 그리고 순간 속에 전체서열을 도입하는 것이 과제이다. [...]나에게 영향을 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속의 마돈나에는 나무, 바위, 성모마리아가 모두 동시에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거기엔 어떤 계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이 작품에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현재 내가 사용하는 기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하지 않는다. 또한 미술에 반대하는 미술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미술을 할 뿐이지 거기에서 어떤 대의명분도 찾지 않는다. 미술은 생활과 전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1960년대 그가 빈번히 사용했던 루벤 레누스와 존 에프 케네디의 형상들은 실크스크린 기법에 용해되어 다양한 이미지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접근현상이다. 그는 1962년 10월쯤 실크스크린을 작업에 수용한다. 실크스크린은 상업적 용도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인데, 두 달 전 그것을 시도한 앤디워홀에게 어느 정도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워홀과는 달라서 기존의 플레이트를 사용해도 물감을 무작위로 선택하거나 마르기 전에 또 다른 색을 덧칠하여 인쇄하는 등, 가장자리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붓자국 느낌이 강하여 상당히 회화적 감성을 갖게 한다. 워홀이나 팝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분인데, 라우센버그는 자신이 컴바인 페인팅이 서서히 지겨워진 1962년부터 또 다른 새로운 창구로 이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먼저 기계적 재생산을 통한 작품은 사회적 현실의 반영으로, 광고나 매체의 상업성, 잡지의 사진 등에서 보여주는 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견해이자 관념에 대항한 해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작품 <Estate>와 <추적자>를 보면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 자유의 여신상부터 맨하탄의 높은 빌딩들, 혹은 발사대에 놓여있는 로켓트 사진부터 루벤스의 비너스까지 그의 재료들은 사진 매체에 의해 생산되는 다양한 정보들을 의미 없이 배열한다. 그들이 갖는 일관된 메시지나 주제의식, 관념도 없고 아름다움을 위한 작가의 노력도 없다. 라우센버그의 이러한 시도는 다다작가 슈비터스(Kurt Schwitters)에게서 그 선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버려진 사물들을 통한 재료로 물성의 확대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근본적 파괴가 슈비터스에서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도전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작가의 정신도 상당히 뒤샹과 닮았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움에서 요구되던 전통적 요소들이 고의적으로 제거된 듯 하다. 예를 들면 꼴라주 작품 <팩텀II factumII, 1957>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붙여진 이미지들, 그 위에 그어진 붓 자국들이 혼돈스럽게 적용되었다. 원근의 무시와 공간의 파괴를 입체파 꼴라주로부터 일부 이어받았지만, 재료의 일관성과 순수미술(fine art)로서의 특수성이 상실되었고, 조화, 균형, 비례, 통일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화면은 마치 오래된 낡은 집의 벽지를 연상시키고 지저분하며 무의미하다. 이성을 넘어서고 미감을 전복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뒤샹과 다다의 후예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관객을 즐겁고 흥분시키는 새로운 감성을 지녔다. 라우센버그의 앞의 말처럼 반대나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일상과 예술이 합치된, 그럼으로써 과거의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이 조합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추상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적 표면 처리는 말 그대로 예술적 측면의 요소로 등장하지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을지 모른다. 때로는 아주 텍스트적이기 때문에, 때론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관객들을 곤란하게 했던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의 창조성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고 작가와 작품의 위상이 다시 위협 받는 단계를 형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팝을 비롯한 미니멀까지 모더니즘과 다른 계열의 미술을 선도함으로 이후 후기모더니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배제와 도입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의 편견은 때때로 바뀐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이런 것들은 변화한다. 과거의 미술은 거의 항상 풍경화의 연속이었다.〔...〕화가들은 풍경을 그리지 않았다. 다빈치가 그 중 한 예이다. 그의 그림은 생명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내게 충격을 준 것 중 하나는 피렌체에 있는 화가는 탐구자, 끊임없는 창조자, 끊임없는 창조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을 이해하는 것은 능동적인 삶을 매장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다. 무용성이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숭고함이다."
라우센버그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환경에서 파생되는 모든 물질들에 미적인 성질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대도시 소비 환경에 의한 폐기물을 사용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도시 부산물을 새로운 가치의 예술품으로 탄생시켰다. 또한 크기에 있어서도 파편인 듯 부분만을 보여주다가도 전체를 드러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공하여 마치 영화의 몽타주와 같은 특성을 지니게 된다. 케네디 사진, 거울, 전등, 탁자, 다리 등의 전혀 다른 사물의 병치는 순간적인 장면의 교체(flashback), 클로즈업(close-up), 초점이동(The sharp and fuzzy focus), 시간의 불연속성(the broken-time sequence) 등과 같은 영화적 수법을 연상케 한다.
라우센버그는 이질적 요소들을 혼성시켜 결과적으로 다양성과 이질성에 관한 미학으로서의 컴바인 페인팅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연속적 상태를 나타내었다. 또한 오브제 자체도 형식에 중심을 두지 않는 복합물을 제시하였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예술 행위를 곧 그의 생활과 직결시킴으로써 이 두 개의 이질세계간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라우센버그의 복합미술은 일상의 물질과 화가의 개인적 어휘, 표현의 공간 등이 혼성되어 나타났으며, 복합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형태를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가 처음으로 제시했던 <백색회화 White painting>는 추상표현주의의 그림들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당혹감을 주는 것이었다. 앨런 케프로우(Allen kapraw)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표현주의의 떠들썩함과 행위가 지배하던 배경에서 이 그림은 관람자를 침묵이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고요와 직면하게 해준다고 했다. 또한 관람자의 그림자만이 텅 빈 스크린 위에 움직일 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참기 힘들어 불편한 마음으로 어정거리는 그들의 이미지가 백색회화에 반영되고 있다고 한 데서 라우센버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불편한 분위기의 조성은 화가가 그림에 대한 어떤 책임도 포기한 채 관람자와 그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라우센버그의 백색회화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사물에 대한 고유색을 회화적인 색채로 보도록 허락하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적 색채의 선택에 대하여 사물들의 속성인 유동성 없는 색채의 완전무결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화가 아니더라도 사실로서 일상의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다. 죤 케이지가 “백색회화는 빛과 그림자의 미립자를 위한 비행장이다"라고 말했듯이 백색그림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사람의 그림자, 빛과 그늘, 무수히 작은 반사광들에 대한 회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말레비치의 ‘白위의 白’과 같은 미학과는 전혀 상반된 견해로서 생활이 예술 속에 직접 융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한 순수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백색회화에 이어 제작된 <흑색회화 Black painting>는 신문이나 잡지를 뜯어 붙인 콜라주 위에 검정색이 칠해졌다. 작품에 칠해진 검은색 물감의 다양한 농도에 의해서 작품이 결정되어지며 이것은 여러 가지 종이의 다른 질감에 의해 각각의 상태가 독특한 진통을 야기 시키는 광범위한 검은색이었다.
라우센버그는 흑색회화들에 대하여 “자기가 나타내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화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어들이지 않는 위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했다. 黑의 경우에도 白의 경우에도 자기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여기에 예술이 있으며 예술의 공격성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매혹적인 범위의 사물들을 자신의 색깔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은 색의 이념이나 본질로서가 아니라 실제 사물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였다. 그의 <적색회화>(그림15)는 활동적인 콜라주의 모자이크 위에 만들어졌다. 콜라주 위에 강렬한 붉은 에나멜로 칠한 좁고 긴 캔버스인 적색회화는 오목한 거울이 그림의 정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붉은 옷, 흰 셔츠, 반사되는 반경은 공간 위에서 축소되기도 하고 팽창되기도 하면서 포착된다. 또한 대상은 끊임없이 움직임을 지니게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그의 단색회화의 절정이자 추상표현주의와의 결별을 상징하는 행위로 1953년 드 쿠닝의 소묘를 지워 버린 <지워진 드 쿠닝>을 발표 했는데,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지운다는 것은 일종의 반항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삭제할 작품들은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작가의 작품이어야 했으며 그 조건에 가장 적합한 것이 드 쿠닝의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라고 한 그는 한때 약속했던 유토피아적 세계의 해결을 제공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드 쿠닝의 예술을 지움으로써 새로운 예술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단색회화에서 바탕에 깔려있던 콜라주의 요소는 1953~1954년에 이르러 점차 화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1955년에 와서는 출처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확실해지면서 화면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콜라주와 함께 점차 오브제가 등장하고 1955년에 와서 이 두 요소가 완전히 결합된 위에 자유스러운 붓질을 가함으로써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른바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이 탄생하게 된다. 회화와 오브제를 결합한 ‘컴바인 페인팅’ 작업을 발표해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컴바인 아트’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은 ‘회화+조각’ 이라는 2차원과 3차원을 동시에 수용하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탄생시켰다. 이는 그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을 실험해가는 작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1955년 이건갤러리에서 작업실 벽에 더덕더덕 붙여놓은 것 같은 사진, 인쇄물, 신문조각 등의 폐품을 결합시킨 이른 바 컴바인 페인팅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침대Bed, 1955>(그림16)를 들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캔버스 대신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이불 위에 물감을 쏟아 부은 것으로써 그림이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란 추상표현주의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회화와 조각, 실재와 허상 사이를 넘나드는 혼성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침대>는 실제 오브제인 침대의 틀을 얕게 만들고 그 안에 누빈 이불, 침대보, 베개 등을 붙인다. 침대를 수직으로 세워 벽에 걸고 그 위에 물감으로 색칠을 하는데, 마치 드 쿠닝과 폴록을 연상시키는 거친 붓 자국의 흔적들이 아무런 재현이나 표현적 의도와 상관없이 화면에 더해져있다. 그러나 화려한 색감과 거친 붓터치는 침대를 더욱 불결하고 추하게 만들며 동시에 오브제가 가진 원래의 성격을 파기하는데, 추상표현주의의 그 영웅적 붓자국은 더 이상 위대해보이지 않는다. 평소 드 쿠닝과 폴록을 존경해왔다는 라우센버그는 그들의 대표적인 회화의 성과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하고 이러한 시도는 그의 컴바인 페인팅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내 그림은 현실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원근법이 현실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이 환상인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내 컴바인 페인팅은 현실적 사실이다.[...]그림은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다.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 틈바귀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라우센버그는 생활과 예술의 결합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서 결합의 원초적 형태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요소들이 그들의 거대한 화면이 아닌 오브제나 조악한 판넬 위에서는 전혀 미적인 요소로도, 아름답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한 작가 개성의 상징도 아닌 단순한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흔적은 오브제와 평면을 추하고 지저분하게 만들며 통일성과 조화를 방해하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산업사회의 폐기물에서 얻어지는 온갖 오브제들을 텍스트화 하여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수집한 쓰레기를 화면에 ‘컴바인’하면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들을 공시적 입장에서 텍스트화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는 텍스트의 잠재적 구조를 나타낸다. 그는 수집한 오브제를 조합하여 거친 붓자국으로 표현했고, 관객들은 그 작품에서 텍스트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라우센버그가 사용한 오브제들은 화면 안에서 서로 종속적이지 않고 등가의 무게를 가지며 각각 이항대립쌍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다.
1959년에 발표한 <모노그램>은 박제된 염소의 몸통에 폐타이어를 끼우고 바닥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꼴라주 위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자유로운 붓질과 함께 모든 것이 회화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컴바인 페인팅으로서 또 다른 역작의 의미를 준다. 냉정하고 단아한 후기 회화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다양성, 변화, 수용이란 주제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엄숙한 고급미술에 대한 허무주의적 도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단절된 요소들의 이질적 결합은 전통적이고 통일된 과거 미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고, 뒤샹과 다다 작가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컴바인 페인팅은 이후 아쌍블라쥬(Assemblage), 또는 설치(installation)로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겠다.
라우센버그의 독특한 형식적 쟝르는 바로 혼합 회화로 조각도 회화도 오브제도 아닌 새로운 개념의 작품인데, <계곡 Canyon>(그림18), <오달리스크 Odalisque>(그림19)에서처럼 평면과 입체가 고전적 방식에 애매하게 뿌리를 둔 채로 전시된다. 고급미술의 재료와 저급한 재료들이 섞이고 그들 위에 뿌려지고 더해진 거친 붓 자국은 미감에 대한 절대성을 상실하게 하고 공간 안으로 침투한 작품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재료들과 아름답지 않음에 대한 수용으로 혼란스럽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밖에도 <코카콜라 플랜>(그림20), <북미산 사슴>(그림21)에서 의자를 거꾸로 매다는가 하면 팝 아트를 선도한 상품의 과감한 선택과 외곽에 날개를 달아 붙이는 재치를 보인다.
"나는 내 작품을 조합된 것이라고 부른다. 즉 조합된 작품들, 즉 조합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떤 범주 속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다. 만일 내가 내 작품을 그림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조각이라고 했을 것이고 내가 그것을 조각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저부조나 회화라고 불러야만 한다고 나에게 말했을 것이다.[...]다다이스트들에게 있어서는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엄중한 검열이었고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에게 있어서는 어떤 움직임을 포함하는 것, 과거를 현재 속에 도입하는 것, 그리고 순간 속에 전체서열을 도입하는 것이 과제이다. [...]나에게 영향을 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속의 마돈나에는 나무, 바위, 성모마리아가 모두 동시에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거기엔 어떤 계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이 작품에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현재 내가 사용하는 기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하지 않는다. 또한 미술에 반대하는 미술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미술을 할 뿐이지 거기에서 어떤 대의명분도 찾지 않는다. 미술은 생활과 전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1960년대 그가 빈번히 사용했던 루벤 레누스와 존 에프 케네디의 형상들은 실크스크린 기법에 용해되어 다양한 이미지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접근현상이다. 그는 1962년 10월쯤 실크스크린을 작업에 수용한다. 실크스크린은 상업적 용도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인데, 두 달 전 그것을 시도한 앤디워홀에게 어느 정도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워홀과는 달라서 기존의 플레이트를 사용해도 물감을 무작위로 선택하거나 마르기 전에 또 다른 색을 덧칠하여 인쇄하는 등, 가장자리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붓자국 느낌이 강하여 상당히 회화적 감성을 갖게 한다. 워홀이나 팝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분인데, 라우센버그는 자신이 컴바인 페인팅이 서서히 지겨워진 1962년부터 또 다른 새로운 창구로 이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먼저 기계적 재생산을 통한 작품은 사회적 현실의 반영으로, 광고나 매체의 상업성, 잡지의 사진 등에서 보여주는 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견해이자 관념에 대항한 해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작품 <Estate>와 <추적자>를 보면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 자유의 여신상부터 맨하탄의 높은 빌딩들, 혹은 발사대에 놓여있는 로켓트 사진부터 루벤스의 비너스까지 그의 재료들은 사진 매체에 의해 생산되는 다양한 정보들을 의미 없이 배열한다. 그들이 갖는 일관된 메시지나 주제의식, 관념도 없고 아름다움을 위한 작가의 노력도 없다. 라우센버그의 이러한 시도는 다다작가 슈비터스(Kurt Schwitters)에게서 그 선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버려진 사물들을 통한 재료로 물성의 확대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근본적 파괴가 슈비터스에서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도전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작가의 정신도 상당히 뒤샹과 닮았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움에서 요구되던 전통적 요소들이 고의적으로 제거된 듯 하다. 예를 들면 꼴라주 작품 <팩텀II factumII, 1957>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붙여진 이미지들, 그 위에 그어진 붓 자국들이 혼돈스럽게 적용되었다. 원근의 무시와 공간의 파괴를 입체파 꼴라주로부터 일부 이어받았지만, 재료의 일관성과 순수미술(fine art)로서의 특수성이 상실되었고, 조화, 균형, 비례, 통일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화면은 마치 오래된 낡은 집의 벽지를 연상시키고 지저분하며 무의미하다. 이성을 넘어서고 미감을 전복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뒤샹과 다다의 후예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관객을 즐겁고 흥분시키는 새로운 감성을 지녔다. 라우센버그의 앞의 말처럼 반대나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일상과 예술이 합치된, 그럼으로써 과거의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이 조합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추상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적 표면 처리는 말 그대로 예술적 측면의 요소로 등장하지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을지 모른다. 때로는 아주 텍스트적이기 때문에, 때론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관객들을 곤란하게 했던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의 창조성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고 작가와 작품의 위상이 다시 위협 받는 단계를 형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팝을 비롯한 미니멀까지 모더니즘과 다른 계열의 미술을 선도함으로 이후 후기모더니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배제와 도입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의 편견은 때때로 바뀐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이런 것들은 변화한다. 과거의 미술은 거의 항상 풍경화의 연속이었다.〔...〕화가들은 풍경을 그리지 않았다. 다빈치가 그 중 한 예이다. 그의 그림은 생명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내게 충격을 준 것 중 하나는 피렌체에 있는 화가는 탐구자, 끊임없는 창조자, 끊임없는 창조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을 이해하는 것은 능동적인 삶을 매장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다. 무용성이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숭고함이다."
라우센버그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환경에서 파생되는 모든 물질들에 미적인 성질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대도시 소비 환경에 의한 폐기물을 사용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도시 부산물을 새로운 가치의 예술품으로 탄생시켰다. 또한 크기에 있어서도 파편인 듯 부분만을 보여주다가도 전체를 드러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공하여 마치 영화의 몽타주와 같은 특성을 지니게 된다. 케네디 사진, 거울, 전등, 탁자, 다리 등의 전혀 다른 사물의 병치는 순간적인 장면의 교체(flashback), 클로즈업(close-up), 초점이동(The sharp and fuzzy focus), 시간의 불연속성(the broken-time sequence) 등과 같은 영화적 수법을 연상케 한다.
라우센버그는 이질적 요소들을 혼성시켜 결과적으로 다양성과 이질성에 관한 미학으로서의 컴바인 페인팅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연속적 상태를 나타내었다. 또한 오브제 자체도 형식에 중심을 두지 않는 복합물을 제시하였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예술 행위를 곧 그의 생활과 직결시킴으로써 이 두 개의 이질세계간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라우센버그의 복합미술은 일상의 물질과 화가의 개인적 어휘, 표현의 공간 등이 혼성되어 나타났으며, 복합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형태를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출처 : | 내마음의 캔버스-그림이야기 | 글쓴이 : 홍순이 원글보기 |
좋은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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