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거인이며, ‘살아 있는 전설’인 바진 (巴金) 만큼 자신의 문학과 삶에 충실했던 작가를 찾기도 힘들다. 문학과 삶에 대한 巴金의 진지한 자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온갖 시련과 굴종에도 불구하고 순수 문학관을 고수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11월 25일을 전후로 중국 내외에서는 바진 (巴金)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었다. 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은 후진타오 총서기와 당 중앙을 대표해서 바진이 입원 중인 상해 璜의원을 방문, 중국 문인에게 부여하는 최고 영예인 '인민작가'의 칭호를 전달하는 의식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내외에서 바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특집 보도가 줄을 이었고, 우리나라 언론도 간략하게나마 바진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사실 바진은 우리에게 그다지 낮 선 작가는 아니었다. 바진의 작품이 많이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바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편소설 <家>가 번역 소개되었고, 또 그 소설의 주제도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것이란 점에서 바진은 우리에게 익숙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바진의 대표적인 <家>는 우리에게 이광수의 <흙>이나 <무정>을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바진은 루신 (魯迅) 등과 더불어 중국의 현대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몇 안 되는 문학계의 거인이며,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신 만큼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 공산당의 관점에서는 존경은 커녕 오히려 경계와 의혹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바진 만큼 자신의 문학과 삶에 충실했던 작가를 찾기도 힘들다. 문학과 삶에 대한 바진의 진지한 자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나름대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며, 동시에 온갖 시련과 굴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녀작인 <滅亡>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순수 문학관을 고수하였다는 것이다.
- 바진의 작품세계는 아래에서 간단히 소개하겠지만, 분량 면에서도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과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처녀작인 <滅亡 (1929)>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출세작인 장편 소설 <家>를 비롯하여 <春 (38)>과 <秋 (40)>로 이어지는 이른바 격류 3부작 등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1930년대 중국의 현대 문학계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러했듯이 이른바 프로 문학을 주장하는 좌익과 예술 문학을 주장하는 우익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휩쓸리게 되는데, 바진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문학에 충실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달랐다. 유명한 루신 (魯迅)이 문학을 통한 혁명과 사회적 진보를 주장하는 상황에서도 바진은 문학을 정치와 사상 투쟁의 도구로서 삼는 것을 거부하였고, 문학을 순수한 자아 발양을 위한 분출구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시종일관 문학을 통해 약간은 허무주의적 색조를 띤 인도주의와 자유주의적 사상성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 바로 이런 바진의 문학적 성향과 배경 때문에 종종 '무정부주의적 작가'라는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하였고,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부르조아적' 또는 '봉건주의적' 성향의 작가라는 혹독한 비판과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진의 진면목은 이념과 시류를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그의 진실된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고 견지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으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오늘날 바진이 재평가되고 있다고 하겠다.
(1) 바진은 누구인가:
- 바진에 대한 간단한 약력 소개는 필자의 홈페이지
중국인물정보란-지식인편 (
중국인물정보-지식인 Ba Jinl)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전재하면 아래와 같다.
Ba Jin: 巴金 (1904- ): 2003년 11월 25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인민작가'로 추대된 현대중국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 ; 중국 작가협회 주석이며 전국 정협 부주석; 무당파그러나 아나키스트 경향성 때문에 비판; 본명 李堯棠; 四川省 출신; 1921년 成都외국어전문학교 수료, 27년 불란서 유학, 귀국 후 상해를 거점으로 창작활동; 처녀작 〈滅亡〉(1929)으로 주목을 받고, <霧 (31년) - 雨 (33년) -電 (35년)>의 애정 3부작, 그리고 장편 소설 <家 (33년)>를 비롯하여 <春 (38)>과 <秋 (40)>로 이어지는 격류 3부작을 발표해 유명 작가로 확립, 건국 후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상해 문학 편집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전쟁 종군, 동구 및 일본 여행등을 했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작가활동 중단되었다 76년에 복권, 78년부터 <수상록> 150편을 집필하면서 모택동 시대의 자신의 문학과 생활을 반성; 83년 이후 현재 중국작가협회 주석, 전국 정협 부주석 역임; 14권의 〈巴金 文集〉과 26권의 〈巴金 全集〉이 출간
(2) 바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대한 인터넷 자료
(3) 바진의 작품세계
長篇小說:《家》(1933年),《春》(1938年) 《秋》(1940年), 《寒夜》(1947年)等;
中篇小說:《滅亡》(1929年),《霧》(1931年),<雨》(1933),
《萌芽》(1933年),《電》(1934年)等;
短篇小說集:《復仇集》(1931年),《 落集》(1936年),《發的故事》(1936年),《小人小事》(1945年),《明珠與玉姬》(1957年)等;
散文集:《生之懺悔》(1936年),《廢園外》(1942年),《贊歌集》(1960年),《 火集》(1979年)等;
雜文集:《隨想錄》第一集,(1979年),《探索集》(1981年),《眞話集》(1982年),《病中集》(1984年),《無題集》(1986年),《再思集》(1995年).
譯著:克魯泡特金著《面包略取》(1927年),高爾基《草原故事》(1935年),普希金《叛逆者之歌》(1938年),德國斯托洛《遲開的薔薇》(1942年),俄國奈米洛夫《哭》(1948年),俄國屠格涅夫《蒲林和巴布林》(1949年),高爾基《回憶托爾斯泰》(1950年),高爾基《回憶屠格涅夫》(1950年),高爾基《回憶契訶夫》(1951年),高爾基 《回憶布羅克》(1952年),與夫人合譯《屠格涅夫短篇小說集》(1959年).
(4) 바진은 무정부주의자인가
- 巴金 이외에도 여러 가지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巴比, 比金, 王文慧, 余一, 余三, 余五, 余七, 毆陽鏡蓉 등 20여개의 필명이 있지만,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필명이 바진이고, 1928년 이후 주요 저작물들은 대부분 바진이란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바진(巴金) 이란 필명 때문에 더욱 그가 무정부주의 작가라는 오해를 받았고, 그렇게 평가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바진이란 필명의 유래에 대한 소문, 즉 바진의 바 (巴)는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巴枯寧)의 <바>에서 따온 것이고, 또한 진 (金)은 역시 유명한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토킨 (克魯泡特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속설 때문에 바진을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런 속설을 부인하였다. 1979년에 바진은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필명 바진이 바쿠닌이나 크로포토킨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1927년경 프랑스 유학시절에 알게 된 동료 유학생 '巴恩波'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金'자는 그저 우연히 생각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 그러나 이런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작품이 특히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1920년대 그는 크로포트킨의 저작물을 중국에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논설들을 여럿 발표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 1929년에 발표된 그의 처녀작 <滅亡>의 주인공인 杜大心의 행적도 당대의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지식인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杜大心은 결국 증오와 미움, 죽음과 허무로 치달아 무정부주의적 테러와 개인적 영웅주의에 매몰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좌파 지식인들은 杜大心=巴金의 '소자산계급의 관렴적 이상주의'를 비판하였다. 다시 말해 작품의 주인공 杜大心은 "소자산계급의 사랑과 정의감의 소유자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낡은 사회의 죄악에 분노하고 반항하고 있지만, 그에게 계급투쟁은 없으며, 오직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미음의 갈등만이 크게 작용할 뿐이며.... 혁명의 목적이나 가치를 소홀히 하고.....실질적 투쟁의 방법을 외면한 관렴적 이상주의자"라는 것이다.
(5) 바진의 대표작 <家>를 통해 본 그의 작품 세계
-1929년 바진은 처녀작 <멸망>을 발표한 이후 <사라진 태양 (死去的太陽): 1930>과 멸망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 新生: 1933>을 발표하였고, 1933년에는 이른바 [愛情 三部曲]이라고 알려진 <안개(霧 :1931)> <비(雨: 1932)> <번개(電:1933)>를 완결하였으며, 또한 1931년부터 써 왔던 <家>를 마침내 탈고하여 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알려진 <春> (1930), <秋> (1940)의 삼부작을 激流三部曲이라 하였다.
- 여기서 바진은 일관되게 사회의 진보와 인간성의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인위적 제도, 인간의 사랑을 파괴하는 모든 구시대적 가치에 대한 저항하면서도 좌절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바진의 대표작 <家>에서도 역시 구시대적 인습에 얽매인 봉건적 가정과 무능하고 부패한 지주나 관료 등의 권위주의에 의해 짓밟히고 억눌리어 마침내 희생되고 죽어 가는 젊은이들을 묘사하면서 낡은 제도에 대한 항거를 하고 있었다.
-四川省 成都에 사는 까오 (高) 가족의 역동과 고뇌를 그린 장편 소설 <家>는 바진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바진은 쥐에신 (覺新), 쥐에민 (覺民), 쥐에후에이 (覺慧) 형제들과 그들의 고종사촌누이 친 (琴) 등을 통해 봉건적 가정에서 어떻게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방황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반항할 힘이 없고, 우유부단한 쥐에신 (覺新)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절충주의로 해결하려고 하다, 결국 봉건주의 중압 밑에서 희생되고, 쥐에민 (覺民)은 봉건주의에 분연히 반항하면서도 그런 대로 절제심을 발휘하고, 성격도 냉정하여 살아 남지만, 쥐에후에이 (覺慧)는 진취적이면서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끝내 집을 나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대도시도 떠나가는 쪽을 선택한다. 여기서 작가는 覺慧를 사랑하고 覺民에 동정하지만 覺新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결국, 바진은 쥐에후에이 (覺慧)와 같이 봉건적 인습과 속박을 벗어 던지고 미래를 향해 떠날 것을 권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광수의 <흙>이나 <무정>의 개몽주의와 이상주의를 연상시킨다고 하겠다.
http://www.suh-china.com/bbs/zboard.php?id=issu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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