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일) 중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진 페이샤오퉁 교수가 타계했다. 이에 『대학신문』에서는 페이샤오퉁 교수의 장례식에 참석한 김광억 교수(인류학과)의 기고를 통해 페이샤오퉁 교수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
지난 4월 24일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학자’였던 페이샤오퉁(費孝通)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서 받은 깊은 인상을 버릴 수 없어 여기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적는다.
페이샤오퉁은 1910년 장수성 우장현의 향신(鄕紳)집안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젊은 시절은 근대라는 폭력을 무기로 삼은 열강의 침략 속에 침몰하는 늙은 제국을 바라보는 울분과 고뇌로 가득찬 시기였다. 당시 둥우대학 의예과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운동을 주도했고 이 일로 퇴학을 당하게 됐다. 원래 그는 학부를 졸업하면 의과대학 본과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이 뛰어난 자질의 젊은이를 너무나 아꼈던 미국인 교장은 그를 옌징대학 사회학과로 편입시켜 주었다. 당시 옌징대학은 서구의 저명한 사회학자와 인류학자들을 초빙하여 한 학기 혹은 일 년간의 강의를 맡겼는데, 그는 이들의 강의를 접하면서 인류학에 눈을 떴고 칭화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인류학을 전공했으며 영국의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말리놉스키 교수를 사사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원래 나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옌징대학에서의 수업은 나로 하여금 의사가 되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5억의 인민을 도탄으로부터 구하는 길은 사회인류학을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옌징대학 사회학과 학생이던 왕통후이(王同惠)와 결혼했고 함께 남부 광시성 산악지대의 야오(瑤)라는 소수민족을 조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당지 사람들이 쳐놓은 호랑이 덫에 걸렸고,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산길을 달려 나갔던 부인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결혼한지 꼭 108일째 되는 날이었다. 젊은 학도가 그 학문적 조사의 첫머리에 당한 비극은 아마도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38년 런던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그가 학술적으로 이름을 붙인 강촌(江村)이라는 한 작은 농촌에서 행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해 작성한 중국 농민의 사회와 생활에 대한 민족지로, 이듬해 영국에서 『Peasant Life in China』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그것은 서구인에게 당시 중국의 현실을 알린 영문으로 된 최초의 책이었다.
전시 중 낮에는 학생들과 농촌 조사 밤에는 공습 피해 동료들과 토론해
1939년 가을 그는 일본과의 전쟁과 국공내전(國共內戰)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나는 지식인이 조국과 인민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라도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윈난성 쿤밍시에 설립된 옌징대학, 칭화대학, 윈난대학의 전시 연합대학에 합류해 낮에는 일본군의 포격 사이로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을 조사하고, 밤에는 공습을 피해 동굴 속에서 호롱불 아래 젊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으로 지새웠다. 토지에 얽매인 가난한 농민의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대한 조사결과는 후에 『Earthbound Chin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우리는 만두 한 개로 하루를 때웠다. 그러나 우리는 조국의 운명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그와 동료들은 국민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격렬히 성토했고 학생들은 강력한 반국민당 시위를 조직했다. 12월 1일 원이둬(聞一多)와 리궁푸(李公撲) 교수가 참살당하고 페이도 암살대상자 명단에 오르자 그는 영국정부의 도움으로 이듬해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1947년 2월 그는 북경으로 귀환해 칭화대학의 교수직을 되찾았으며 이전처럼 민주운동의 지도자적 활동을 재개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생육제도』와 『향토중국』, 그리고 『향토중건』이라는 불멸의 명저를 내면서 폐허만 남은 중국의 거대한 토지 위에서 가난과 낙후와 무기력의 암울한 현실을 신랄하게 분석하면서 미래를 건설할 탁월한 제시를 피를 토하는 웅변으로 설파했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 없는 솔직하고 진실된 자세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황량한 조국과 농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긴 간결하면서도 웅혼한 필치의 문장은 「관찰」이라는 지식인 상대의 잡지를 통해 폭발적인 힘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국의 지식인들이 그의 글을 기다린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모든 정열과 혼을 쏟아서 매주 5~8편의 문장을 발표했다.
지식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공산당이 들어선 중국에 남아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였을 때 많은 동료들이 해외로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남기로 결정했다. 공산당 지배 하에서 비판세력으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스스로 맡기로 한 것이다. 우웬자오, 판광단, 마인추, 첸따 등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경제학자, 노동경제학자들과 하버드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공산당원인 린야오화, 그리고 펑요우란, 우한, 치시안리엔 등의 인문학자들이 그와 뜻을 같이했다.
페이는 민주동맹당을 대표해 정치협상위원으로서 새로운 중국의 국시를 만드는 작업에 힘썼지만 그의 운명은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1952년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은 제국주의 학문이라는 비판과 함께 대학에서 철폐됐고 학자들은 공장 노동자나 외국문서 번역원으로 배치되었다. 페이는 그나마 운좋게 중앙민족학원으로 배치되어 소수민족 조사업무를 맡았다. 베이징대 총장이던 마인추는 마오쩌둥의 인구정책을 비판하다 사라졌다.
1956년 그는 강촌을 재조사했다. 『중방강촌(重訪江村)』이란 보고서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화려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20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사람은 많고 땅은 적은(人多地少) 중국의 현실에서는 농민의 자원과 노동력과 낮은 기술을 안정된 기조에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도록 결합하는 방안이 이데올로기의 순수함보다 더 급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곧 정부로부터 비판이 나왔고 조사 보조원이었던 학생은 그가 서구 제국주의적 학문의 시각과 방법을 가지고 혁명적 현실을 왜곡하도록 학생들의 사상을 ‘오염’시켰다고 고발했다. 페이는 인민일보에 “인민에게 죄를 자복함”이라는 자술서를 발표하고 하방(下放: 강제로 농촌에 보냄)당했다.
그는 그 후에도 줄기차게 강촌을 방문하고 자신의 조사보고문에 대한 비판을 받고 인민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술서를 쓰고 하방당하는 똑같은 일을 9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로서 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개인이 겪어야 할 고통은 현실의 왜곡으로 인해 5억 인민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나는 내 양심을 말할 기회가 주어지는 한 얼마든지 자술서를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57년 마오쩌둥은 백화제방을 외쳤다. 페이는 ‘지식분자의 이른 봄 날씨(知識分子的早春天氣)’라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글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 이런 지식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우리 공산당 안에 이런 인물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과 함께 모든 사람이 그 글을 읽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반년도 못되어 이 글과 『중방강촌』은 반당 반사회주의의 죄로서 지목됐고 그는 우파분자로 몰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그의 모든 저작물은 위험물로 분류됐고 압수됐다. 그는 가끔 영어문서 번역에 동원될 뿐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페이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며칠 전에도 집에 와서 담소를 즐겼던 나의 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또 하나의 연극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연출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거대한 파도를 막을 수가 없으며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다가는 파도에 묻혀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이 거센 파도타기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손수 “자본주의의 개”와 “제국주의의 시녀”, “반당반혁명분자” 등의 죄목을 써서 그 판을 목에 걸고 군중집회에 끌려 나갔다. 길에서 군중들이 “페이샤오퉁을 타도하라”라고 외치면 자신도 따라서 힘차게 그 말을 외쳤다. “많은 자연과학 분야의 친구들이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엄청난 폭력과 타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대중이 어떻게 폭력에 의해 동원되고 조작될 수 있는가, 그리고 역사의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과학자나 법학자보다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바라볼 여유를 축적하고 있었다.”
문화혁명(문혁) 기간 중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그는 후베이성의 어느 간부양성학교의 식당에 잡역부 일을 하도록 배치됐다. 1972년 베이징의 중앙민족학원으로 귀환된 그는 가르치는 대신 영어문서 번역 일을 맡았다. 1975년 닉슨이 방문했을 때미국 측이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페이에 대한 생사 확인이었고 몇몇 학자들이 그를 면담하도록 허용되었다. 레닌복을 입은, 짧은 머리와 검게 탄 얼굴의 65세의 페이는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저간의 삶에 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이전에는 인민의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계급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혁명은 나로 하여금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 혁명이란 것은 곧 사회주의를 말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혁명이란 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혁명이다”라고 답했다. 당신은 이전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잠깐의 침묵 끝에 “개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본인만이 알 뿐이다”라고 짧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문화혁명 이후 활동 재개 사회학의 보급에 힘써
1976년 문혁이 끝나자 페이는 4인방에 대한 재판장을 맡았으며 민주동맹의 당수이자 인민대표대회 상무부위원장으로서 전통적인 학자, 정치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덩샤오핑을 설득해 사회과학원에 사회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북경대학에 사회학[]인류학 연구소를 건립했다. 또 고급사회학 강좌를 조직해 사회학의 보급에 힘썼다. 총서기 후야오방은 페이의 이론을 받아들여 향진기업을 모델로 삼는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했다. 그것은 농촌의 공업화에 집중해 촌락을 하나의 집체적 기업 단위로 만들고 소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 세계를 이룩하는 것인데, 이로써 농민은 외지로 떠나지 않고 사회적 안정과 향상된 경제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책은 1980, 90년대 중국 전역을 풍미했고 현재에도 지역사회 발전의 이론적 기본이 되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전국의 대학생과 지식인의 눈은 모두 페이에게 쏠렸다. 그는 끝내 침묵을 지켰고 실망한 학생들 중에는 그가 명예와 권력에 양심을 판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그 후 서양으로 유학가서 현지인과 결혼했으며 현지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가끔씩 고향을 방문하면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린다. “우리가 고통과 좌절을 대가로 치르면서 줄기차게 염원해온 우리들의 신중국이 이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민에게 봉사하고자 했던 그 일생의 꿈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엄중한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유혈적인 희생도 때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희생을 감내할 진정한 자세이다.” 당시 말을 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반우파 투쟁과 문혁은 그때까지 내가 썼던 모든 글과 자료를 빼앗아 갔으며 나는 그것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옛날에 배웠던 바를 반추해 유용성을 찾아내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인민의 세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조사를 하면서 통합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을 만들었다. 학문적인 바탕이 열악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혼자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과외공부, 즉 푸커(補課)였다.”
그는 젊은이들을 해외에 유학보내는 정책과 방안을 적극 추진했고 전국 대학에 50여 개의 사회학과를 건립했다. 나는 인류학의 재건에 마지막 정열을 쏟던 그를 도와 1994년부터 6년간 여름이면 베이징대학에 ‘사회인류학 고급강습반’을 조직해 전국에서 모인 젊은 교수들을 훈련시켰다.
학자로서 현지 조사 통해 올바른 정책 방향 제시
학자로서 그는 현지조사를 생명으로 삼았다. 학문은 정책을 올바로 세우도록 지식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현지 주민들과 직접 보고 듣고 체험을 하여 실증적으로 문제의 심층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일생동안 견지해 온 자세였고 방법이었다. 그는 강촌을 일생동안 총 23차례나 반복해 방문했다. 한 작은 촌락의 현실을 통해 그는 중국 전체의 과거와 현재를 파악했으며 미래의 방향을 모색했다. 또 그는 중국의 전 지역을 직접 답사하면서 파악한 바를 정치에 반영했다. 그는 자신을 야생마라고 불렀다. “인민을 조금이라도 더 잘 살게 하는 것이 나의 학문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나는 사회인류학이라고 정해놓은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를 변혁하고 인민에게 더 나은 세계를 주기 위해 나는 사회학이건, 경제학이건, 정치학이건 그 담장들을 마음대로 뛰어 넘나드는 학문적 야생마였다. 앞으로도 나는 그럴 것이다.”
일생을 쉬지 않고 탐구하고 현실에 참여한 이 대가는 93세이던 재작년 가을에 신장성 낙후지역에 대한 답사 길에서 걸린 감기가 원인이 된 합병증으로 지난 4월 24일 저녁 눈을 감았다. 60세가 훨씬 지나서 다시 시작된 그의 질풍노도와 같은, 학자이자 정치가로서의 생은 16권의 전집을 남기고 한줌의 재가 되어 빠바오샨 국가영도자 묘역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곧 청조(淸朝)에서 시작해 전쟁과 사회주의 혁명과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의 한 종결이었다. 장례식에는 후진타오 국가 주석을 비롯한 모든 국가 영도자들이 참석해 이 대로(大老)에게 극진한 예를 표했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중앙민족대학을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남겨진 전국의 대학에 빈소가 차려졌으며 전국에서 모인 조문객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러한 모습들에서 중국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로 끝없는 시련과 고통의 여정이었던 그의 생애는 성공적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4월 마지막 떨어지는 꽃잎들 사이로 5월의 싱그러운 초록이 대지를 덮으면서 빛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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