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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1일 일요일

동아시아 100권의 책 - 중국 쪽 선정도서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여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선정한다는 말을 일전에 들었는데 29일에 선정 및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격변기 세계관 바꾼 ‘현대의 고전’ 한겨레
“거대한 독서공동체 복원 첫걸음” 한겨레
한·중·일 이어줄 ‘100권의 책’ 중앙일보
책에서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 찾는다 중앙일보

내가 번역한 책도 후보에 올라와 있어 출간을 약간 미루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선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 명단에 올라와 있던 책들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출판사별로 나눠먹기식이어서 성격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선정된 책들을 보니 나라별로 기준은 다르지만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색깔에 의하면 중국쪽에서 선정한 목록에 내 번역서가 포함되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일 정도이다.

목록만 보면 한국과 일본은 선정기준이 거의 유사하고 출판인회의에서 내세운 취지에 잘 맞는 것 같다. 두 나라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비슷한 역사를 거쳤고 그것을 해결해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학술서"에 보다 치중한 반면 한국은 진보적 시각이 두드러진 책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아니나다를까 선정 기준이 뭐냐고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고([편집자 레터] '한국 대표하는 책' 기준은), 한국일보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저술한 학술서와 고급 교양서"임에 반해 한국은 "정치ㆍ사회적으로 진보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이 눈에 띄어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해외에 소개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끊겼던 맥 다시 잇는다) 한국쪽 선정도서에 대한 견해는 비슷한데, 일본쪽 선정도서에 대해서는 한국일보와 한겨레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어차피 한국사람들에겐 생소한 분야라 신문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 테니까.)

이에 반해 중국쪽은 명확하게 중국 "학술"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야말로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뭐, 그다지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그런 거. 처음 추천후보에 각종 사전류가 대거 포함된 것을 생각해 보면 많이 나아진 거긴 하다. 사전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하긴 할 테지만, 무려 "동아시아 100권의 책"으로 서로 돌려보자는 취지에는? 그걸 어찌 번역해? 후후.
암튼 정리된 최종선정 목록에는 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역사에 관련된 책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중국쪽 매체에서는 거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한국어로 엉성하게 번역된 책 제목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한 목록을 살펴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되어 나오는 건 중앙일보 등이 올초에 제공한 기사의 중문판이 대부분이었다. 혹시 중국 쪽은 발만 슬쩍 담근 형국??


이 중 한국어로 이미 번역된 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
1. 시론, 주광잠(주광첸), 동문선
4. 중국철학약사, 풍우란(펑유란) ; (간명한)중국철학사 / 펑유란 지음 ; 정인재 옮김 형설, 2007
7. 한어사고, 왕리 ; 중국어 어법 발전사 / 王力 著 ; 박덕준 ... [등]역 사람과책, 1997
10. 미의 역정, 이택후(리쩌허우), 동문선

18. 담예록, 전종서(첸중수) ; 하나마나한 번역으로 <중국어문학> 학회지에 완역(미출간).
19. 향토중국, 비효통(페이샤오퉁) ; 중국사회의 기본구조 = Rural China / 費孝通 원저 ; 이경규 역一潮閣, 1995
20. 현대중국사상의 흥기, 왕후이 (출간예정)

대만
3. 중국예술의 정신, 서복관(쉬푸관) ;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權德周 ... [等譯] 東文選, 1990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李鍵煥 譯 百選文化社, 2000
11. 만력 15년, 레이 황


각 신문들의 소개를 보면, 책 제목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사람 이름에서는 오류가 많다. 특히 중국식 병음은 많이 알려져 거의 오류가 없지만(중앙일보 표기는 엉망이다), 대만식 영문표기는 대부분의 신문에서 뒤죽박죽이다. 웨이드식 표기라는 걸 모르면 장광즈(張光直)를 창쾅츠(Chang, Kwang-chih)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심종문(선충원)을 셴콩웬(Shen Congwen)이라고 읽는 건 뭘까? 아마도 홍콩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이번 선정에 한중일 각 26권, 대만이 15권, 홍콩 7권이다. 그러나 대만, 홍콩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책은 한두 권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범중화권으로 묶일 수 있을 성질의 것들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것, 대륙에서 출간하지 않고 홍콩이나 대만에서 출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규모 면에서 한중일이 똑같은 분량으로 했을 때 나오는 불균형을 이런 식으로 메꾼 것으로 보인다만, 대만이나 홍콩 자신의 역사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정련한 책들이 아쉽긴 하다. (이 목록만 보면 이들은 이미 "하나의 중국"이다.)

신문에 소개된 것처럼 차후에 번역이나 후속활동이 계속되겠지만, 이제껏 한중일 삼국이 서로 관심 가는 책들을 번역해서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물론 중국에서의 한국책 번역 비율은 낮다만, 사업 이후에 갑자기 한국책을 많이 번역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사업 자체로 문화공동체 운운하는 건 좀 과장일 듯하다. "같이" 뭘 할 건지에 대한 고민이 든 책은 없고 자국의 특성을 강조하는 책들로 다들 뽑았지 않은가. 게다가 중국 쪽은 동아시아에서 어떤 "공동체"로 묶이는 걸 그닥 바라지도 않지 않나?
http://redology.tistory.com/259

향토중국 : 중국 사회문화의 원형,페이샤오퉁

중국 사회문화의 원형 

양장본

페이샤오퉁 지음 | 장영석 옮김 | 비봉출판사 | 2011년 11월 20일 출간




<제4화> 『향토중국』(2011년 11월, 費孝通 지음, 비봉출판사) 

♨ 중국 사회를 알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한 중국 사회학자는 도시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의 도시화율이 지난 2011년 처음으로 50%를 넘어섰고 2030년에는 무려 70% 가까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아직도 농촌을 봐야 한다. 중국의 자랑인 만리장성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상징이자 농업과 유목을 가르는 선이었다. 중국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으로는 한없이 뻗어 나갔지만 그렇지 않은 장성 밖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았다. 중국은 자고로 농업국가였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은 모든 중국인의 꿈이었다. 농촌은 바로 중국 문명의 원형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 책은 바로 중국의 향촌사회를 다루고 있다. 1947년 처음 나왔지만 몇 해 전 동아시아 출판인들이 100권의 책을 선정할 때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역작이다. 중국 향촌사회의 인간 관계를 마치 돌 하나를 수면 위에 던졌을 때 형성되는 동심원(同心圓)의 파문(波紋)에 비유한 설명은 중국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주요 대목을 간추려 보았다. 

☞ “농작물을 돌보는 늙은 농민들은 마치 몸의 반(半)이 땅 속에 묻혀 있는 것과 같다” (21쪽) (촌평: 농업에 대한 중국 농민의 애정이 강렬하게 표현돼 있다) 

☞ “중국 농민들이 집촌(集村)을 이루어 거주하는 원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매 가족이 경작하는 토지의 면적이 작은 소농경영(小農經營)이다. 그래서 함께 거주하고, 주택과 농장의 거리가 멀지 않다. 둘째, 수리(水利)가 필요한 지역인 경우 상호 협력할 필요가 있다…셋째, 안전 문제이다. 사람이 많으면 쉽게 보위할 수 있다. 넷째, 토지를 평등하게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형제는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고, 사람들은 한 지역에서 대대로 살게 되어 상당히 큰 촌락을 이루게 된다” (24쪽) (촌평: 중국 농민들이 왜 모여 사는지에 대한 한 해답이다) 

☞ “중국 농촌 공동체의 단위는 촌락(村落)이다. 세 집으로 이루어진 삼가촌(三家村)에서부터 몇 천 호로 이루어진 대촌락(大村落)까지 다 가능하다” (24쪽) 

☞ “향토사회에서는 법률이 발생하지 않는다…향촌사회에서는 낯익은 것에서 신뢰를 얻는다. 그 신뢰는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뢰 그 자체가 가장 근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규칙이기 때문이다” (26쪽) (촌평: 법치사회를 이룩하기 어려운 중국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 “’성명(貴姓大名)’은 우리가 서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친숙한 사람들은 그것이 필요 없다” (34쪽) 

☞ “극단적인 향토사회는 노자(老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회, 즉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는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鷄犬相聞, 老死不相往來)’ 사회다. 개인은 고향을 잘 떠나지 않고 그가 거주하는 곳은 자기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다.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죽는(生於斯 死於斯)’ 결과 각 세대는 밀착되어 있다” (45쪽) 

☞ “각 세대의 생활이 동일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과 같은 사회에서는 역사(歷史) 역시 불필요한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전설(傳說)’뿐이다. 내력을 이야기할 때는 천지개벽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그 다음의 말은 ‘일상적’인 것 밖에 없지 않겠는가” (47쪽) 

☞ “도시 사회에는 이름난 사람(名人)이 있지만, 향토사회에서는 ‘사람은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이 찌는 것을 두려워한다(人?出名 猪?壯)’ ‘다른 사람보다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아야 하며(不爲人先 不爲人後)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循規蹈矩)’” (47~48쪽) (촌평: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 하는 중국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 “중국 농민들의 가장 큰 병폐는 ‘자기만 생각하는 것(私)’이다…‘각자 자기 집 대문 앞의 눈만 치우고 남의 집 지붕 위의 서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各人自掃門前雪 莫管他人屋上霜)’는 속담을 생각하게 된다” (50쪽) 

☞ “서양의 사회는 우리가 논에서 볏단을 묶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몇 포기의 벼를 한 줌(把)으로 묶고, 몇 줌을 한 다발(?)로 묶고, 몇 다발을 한 단(?)으로 묶고, 몇 단을 한 짐(挑)으로 만든다…사회에서 이 단위는 바로 단체이다…그들은 항상 몇 사람으로 하나의 단체를 구성한다. 각 단체는 그 경계가 분명하다” (52쪽) 

☞ “중국의 상황은 한 단 한 단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벼 포기가 아니라 돌 하나가 수면에 던져졌을 때 생겨나는 동심원(同心圓)이 점차 밖으로 퍼져나가는 파문(波紋)과 같다. 각 개인은 모두 그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퍼져나가는 동심원의 중심이다…모든 네트워크는 각기 ‘자기(己)’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각 네트워크의 중심은 전부 다 다르다” (54~55쪽) (촌평: 저자 페이샤오퉁은 중국 향촌 사회의 인간관계를 동심원의 파문으로 비유한다. 돌 하나를 수면에 던졌을 때 생기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나를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나로부터 동심원의 파문이 멀어질수록 인간관계는 약화되는 것이다) 

☞”전통적 구조에서는 각 가족은 자신의 지위를 중심으로 주위를 하나의 테두리로 나누는데, 그 테두리가 곧 ‘이웃(街坊)’이다. 이웃 간에는 기쁜 일이 있으면 불러서 술을 대접하고, 아이를 낳으면 ‘붉은 물감을 들인 달걀(紅蛋)’을 보내고, 상(喪)이 나면 가서 염(殮)하는 것을 도와주고 관(棺)을 들어주는 등 생활상의 상부상조 기구이다. 그러나 이웃은 고정적인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이다. 이 범주의 크기는 중심의 세력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세력이 큰 가족의 이웃은 마을 전체로 확대되고, 가난한 가족의 이웃은 이웃하고 있는 두 세 집밖에 되지 않는다…세력이 변화하면, 나무가 넘어지면 원숭이가 흩어지듯이, 작은 집단으로 수축된다” (55~56쪽) (촌평: 2014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소치로 날아가면서 시진핑이 내세운 이유가 바로 ‘이웃 집에 기쁜 일이 있으면 가서 축하하는 게 중국의 전통’이라는 것이었다. 시진핑의 이 같은 사고 역시 중국 향촌사회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서양사회에서는) 단체에 속한 사람은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자격이 취소되면 곧 그 단체를 떠나야 된다. 그것을 그들의 인심이 쌀쌀하거나 따뜻하다는 그런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다. 서양사회에서 쟁취하려는 것은 권리이지만, 중국 사회는 ‘관씨(關係)’를 맺으려 하거나 ‘교분(交分)’을 쌓으려고 애쓴다” (57쪽) 

☞ “내가 항상 느끼는 것은 ‘중국의 전통사회에서는 한 개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가족을 희생시킬 수 있고, 가족을 위해서는 당을 희생시킬 수 있으며, 당을 위해서는 국가를 희생시킬 수 있고, 국가를 위해서는 천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63쪽) 

☞ “(중국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기준은 결코 작동하지 않고, 대상이 누구인지, 나 자신과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히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어떤 기준을 꺼낼 것인지를 결정한다” (79쪽) 

☞ “서양의 가정이라는 단체에서는 부부가 주축을 이루는데, 부부가 공동으로 출산과 양육을 맡고, 이 단체에서 자녀는 조연 역할을 하며, 성장한 뒤에는 이 단체를 떠난다. 서양에서는 정치, 경제, 종교 등의 기능을 다른 단체가 담당하고 있으며, 가정의 본분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있지 않다. 부부가 주축으로 되고 양성(兩性)간의 애정은 응집의 역량이 된다…중국의 ‘가(家)’는 지속성을 갖는 ‘사업사회집단(事業社會集團)’인데, 그 주축은 부자간이고, 고부간의 관계는 횡적이 아니라 종적이다. 부부는 ‘보조축’이다…여자는 ‘삼종사덕(三從四德)’의 기준을 따라야 하며, 부모와 자식 간에는 책임과 복종을 중시해야 한다…’삼종(三從)’이란,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在家從父),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適人從夫),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夫死從子)는 것을 말하고, ‘사덕(四德)’이란 여자의 말씨(婦言), 솜씨(婦功), 맵시(婦容), 마음씨(婦德)을 말한다…(중국에서) 가족은 동성(同性)을 위주로 하고 이성(異性)을 보조로 하는 ‘단일계통(單一系統)’의 조합이다” (87~97쪽) (촌평: 부부가 중심을 이루는 서양의 가정과 부자가 중심을 이루는 중국의 가정을 잘 비교해 설명하고 있다) 

☞ “지방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부모와 같은 관료(父母官)’가 예치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은 ‘가르치는 것(敎化)’이지 ‘판결하는 것(折獄)’은 아니다” (112쪽) (촌평: 지금도 중국의 관리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이 부모관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人情)을 빚지면 기회를 찾아서 빚진 것 이상의 ‘예(禮)’를 표시해야 한다. 그렇게 가중(加重)하는 것은 자신의 인정에 대해 상대방이 빚지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친밀한 사회 집단에서는 서로 인정을 빚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결산(算帳)’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서로 인정을 빚지지 않으면 상호왕래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결산(決算)‘ 또는 ‘청산(淸算)’은 절교(絶交)의 말과 동일하다. (144쪽) (촌평: 중국인과의 거래에서 꼭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노하우다) 

☞ “향토사회는 전통사회이고, 전통은 곧 경험의 누적이며, 누적될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자연의 선택을 거쳤다는 말이고, 각종 착오, 즉 생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가 도태된 후에 남은 일련의 생활방식이란 것이다” (164쪽) (촌평: 중국의 향촌사회에서 왜 경험이 많은 노인이 존경을 받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유상철 중국 전문기자

페이샤오퉁 교수를 추모하며 -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한 학자의 일생을 반추하다

페이샤오퉁 교수를 추모하며 -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한 학자의 일생을 반추하다김광억 교수(인류학과)
대학신문  |  webmaster@snunews.com

지난 4월 24일(일) 중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진 페이샤오퉁 교수가 타계했다.
이에 『대학신문』에서는 페이샤오퉁 교수의 장례식에 참석한 김광억 교수(인류학과)의 기고를 통해 페이샤오퉁 교수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지난 4월 24일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학자’였던 페이샤오퉁(費孝通)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서 받은 깊은 인상을 버릴 수 없어 여기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적는다.

페이샤오퉁은 1910년 장수성 우장현의 향신(鄕紳)집안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젊은 시절은 근대라는 폭력을 무기로 삼은 열강의 침략 속에 침몰하는 늙은 제국을 바라보는 울분과 고뇌로 가득찬 시기였다. 당시 둥우대학 의예과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운동을 주도했고 이 일로 퇴학을 당하게 됐다. 원래 그는 학부를 졸업하면 의과대학 본과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이 뛰어난 자질의 젊은이를 너무나 아꼈던 미국인 교장은 그를 옌징대학 사회학과로 편입시켜 주었다. 당시 옌징대학은 서구의 저명한 사회학자와 인류학자들을 초빙하여 한 학기 혹은 일 년간의 강의를 맡겼는데, 그는 이들의 강의를 접하면서 인류학에 눈을 떴고 칭화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인류학을 전공했으며 영국의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말리놉스키 교수를 사사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원래 나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옌징대학에서의 수업은 나로 하여금 의사가 되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5억의 인민을 도탄으로부터 구하는 길은 사회인류학을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옌징대학 사회학과 학생이던 왕통후이(王同惠)와 결혼했고 함께 남부 광시성 산악지대의 야오(瑤)라는 소수민족을 조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당지 사람들이 쳐놓은 호랑이 덫에 걸렸고,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산길을 달려 나갔던 부인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결혼한지 꼭 108일째 되는 날이었다. 젊은 학도가 그 학문적 조사의 첫머리에 당한 비극은 아마도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38년 런던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그가 학술적으로 이름을 붙인 강촌(江村)이라는 한 작은 농촌에서 행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해 작성한 중국 농민의 사회와 생활에 대한 민족지로, 이듬해 영국에서 『Peasant Life in China』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그것은 서구인에게 당시 중국의 현실을 알린 영문으로 된 최초의 책이었다.


전시 중  낮에는 학생들과 농촌 조사 밤에는 공습 피해 동료들과 토론해


1939년 가을 그는 일본과의 전쟁과 국공내전(國共內戰)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나는 지식인이 조국과 인민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라도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윈난성 쿤밍시에 설립된 옌징대학, 칭화대학, 윈난대학의 전시 연합대학에 합류해 낮에는 일본군의 포격 사이로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을 조사하고, 밤에는 공습을 피해 동굴 속에서 호롱불 아래 젊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으로 지새웠다. 토지에 얽매인 가난한 농민의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대한 조사결과는 후에 『Earthbound Chin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우리는 만두 한 개로 하루를 때웠다. 그러나 우리는 조국의 운명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그와 동료들은 국민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격렬히 성토했고 학생들은 강력한 반국민당 시위를 조직했다. 12월 1일 원이둬(聞一多)와 리궁푸(李公撲) 교수가 참살당하고 페이도 암살대상자 명단에 오르자 그는 영국정부의 도움으로 이듬해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1947년 2월 그는 북경으로 귀환해 칭화대학의 교수직을 되찾았으며 이전처럼 민주운동의 지도자적 활동을 재개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생육제도』와 『향토중국』, 그리고 『향토중건』이라는 불멸의 명저를 내면서 폐허만 남은 중국의 거대한 토지 위에서 가난과 낙후와 무기력의 암울한 현실을 신랄하게 분석하면서 미래를 건설할 탁월한 제시를 피를 토하는 웅변으로 설파했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 없는 솔직하고 진실된 자세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황량한 조국과 농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긴 간결하면서도 웅혼한 필치의 문장은 「관찰」이라는 지식인 상대의 잡지를 통해 폭발적인 힘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국의 지식인들이 그의 글을 기다린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모든 정열과 혼을 쏟아서 매주 5~8편의 문장을 발표했다.

지식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공산당이 들어선 중국에 남아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였을 때 많은 동료들이 해외로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남기로 결정했다. 공산당 지배 하에서 비판세력으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스스로 맡기로 한 것이다. 우웬자오, 판광단, 마인추, 첸따 등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경제학자, 노동경제학자들과 하버드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공산당원인 린야오화, 그리고 펑요우란, 우한, 치시안리엔 등의 인문학자들이 그와 뜻을 같이했다.

페이는 민주동맹당을 대표해 정치협상위원으로서 새로운 중국의 국시를 만드는 작업에 힘썼지만 그의 운명은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1952년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은 제국주의 학문이라는 비판과 함께 대학에서 철폐됐고 학자들은 공장 노동자나 외국문서 번역원으로 배치되었다. 페이는 그나마 운좋게 중앙민족학원으로 배치되어 소수민족 조사업무를 맡았다. 베이징대 총장이던 마인추는 마오쩌둥의 인구정책을 비판하다 사라졌다.

1956년 그는 강촌을 재조사했다. 『중방강촌(重訪江村)』이란 보고서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화려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20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사람은 많고 땅은 적은(人多地少) 중국의 현실에서는 농민의 자원과 노동력과 낮은 기술을 안정된 기조에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도록 결합하는 방안이 이데올로기의 순수함보다 더 급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곧 정부로부터 비판이 나왔고 조사 보조원이었던 학생은 그가 서구 제국주의적 학문의 시각과 방법을 가지고 혁명적 현실을 왜곡하도록 학생들의 사상을 ‘오염’시켰다고 고발했다. 페이는 인민일보에 “인민에게 죄를 자복함”이라는 자술서를 발표하고 하방(下放: 강제로 농촌에 보냄)당했다.

그는 그 후에도 줄기차게 강촌을 방문하고 자신의 조사보고문에 대한 비판을 받고 인민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술서를 쓰고 하방당하는 똑같은 일을 9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로서 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개인이 겪어야 할 고통은 현실의 왜곡으로 인해 5억 인민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나는 내 양심을 말할 기회가 주어지는 한 얼마든지 자술서를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57년 마오쩌둥은 백화제방을 외쳤다.  페이는 ‘지식분자의 이른 봄 날씨(知識分子的早春天氣)’라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글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 이런 지식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우리 공산당 안에 이런 인물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과 함께 모든 사람이 그 글을 읽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반년도 못되어 이 글과 『중방강촌』은 반당 반사회주의의 죄로서 지목됐고 그는 우파분자로 몰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그의 모든 저작물은 위험물로 분류됐고 압수됐다. 그는 가끔 영어문서 번역에 동원될 뿐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페이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며칠 전에도 집에 와서 담소를 즐겼던 나의 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또 하나의 연극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연출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거대한 파도를 막을 수가 없으며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다가는 파도에 묻혀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이 거센 파도타기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손수 “자본주의의 개”와 “제국주의의 시녀”, “반당반혁명분자” 등의 죄목을 써서 그 판을 목에 걸고 군중집회에 끌려 나갔다. 길에서 군중들이 “페이샤오퉁을 타도하라”라고 외치면 자신도 따라서 힘차게 그 말을 외쳤다. “많은 자연과학 분야의 친구들이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엄청난 폭력과 타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대중이 어떻게 폭력에 의해 동원되고 조작될 수 있는가, 그리고 역사의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과학자나 법학자보다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바라볼 여유를 축적하고 있었다.”

문화혁명(문혁) 기간 중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그는 후베이성의 어느 간부양성학교의 식당에 잡역부 일을 하도록 배치됐다. 1972년 베이징의 중앙민족학원으로 귀환된 그는 가르치는 대신 영어문서 번역 일을 맡았다. 1975년 닉슨이 방문했을 때미국 측이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페이에 대한 생사 확인이었고 몇몇 학자들이 그를 면담하도록 허용되었다. 레닌복을 입은, 짧은 머리와 검게 탄 얼굴의 65세의 페이는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저간의 삶에 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이전에는 인민의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계급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혁명은 나로 하여금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 혁명이란 것은 곧 사회주의를 말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혁명이란 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혁명이다”라고 답했다. 당신은 이전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잠깐의 침묵 끝에 “개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본인만이 알 뿐이다”라고 짧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문화혁명 이후 활동 재개  사회학의 보급에 힘써

1976년 문혁이 끝나자 페이는 4인방에 대한 재판장을 맡았으며 민주동맹의 당수이자 인민대표대회 상무부위원장으로서 전통적인 학자, 정치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덩샤오핑을 설득해 사회과학원에 사회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북경대학에 사회학[]인류학 연구소를 건립했다. 또 고급사회학 강좌를 조직해 사회학의 보급에 힘썼다. 총서기 후야오방은 페이의 이론을 받아들여 향진기업을 모델로 삼는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했다. 그것은 농촌의 공업화에 집중해 촌락을 하나의 집체적 기업 단위로 만들고 소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 세계를 이룩하는 것인데, 이로써 농민은 외지로 떠나지 않고 사회적 안정과 향상된 경제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책은 1980, 90년대 중국 전역을 풍미했고 현재에도 지역사회 발전의 이론적 기본이 되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전국의 대학생과 지식인의 눈은 모두 페이에게 쏠렸다. 그는 끝내 침묵을 지켰고 실망한 학생들 중에는 그가 명예와 권력에 양심을 판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그 후 서양으로 유학가서 현지인과 결혼했으며 현지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가끔씩 고향을 방문하면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린다. “우리가 고통과 좌절을 대가로 치르면서 줄기차게 염원해온 우리들의 신중국이 이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민에게 봉사하고자 했던 그 일생의 꿈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엄중한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유혈적인 희생도 때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희생을 감내할 진정한 자세이다.” 당시 말을 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반우파 투쟁과 문혁은 그때까지 내가 썼던 모든 글과 자료를 빼앗아 갔으며 나는 그것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옛날에 배웠던 바를 반추해 유용성을 찾아내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인민의 세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조사를 하면서 통합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을 만들었다. 학문적인 바탕이 열악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혼자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과외공부, 즉 푸커(補課)였다.”

그는 젊은이들을 해외에 유학보내는 정책과 방안을 적극 추진했고 전국 대학에 50여 개의 사회학과를 건립했다. 나는 인류학의 재건에 마지막 정열을 쏟던 그를 도와 1994년부터 6년간 여름이면 베이징대학에 ‘사회인류학 고급강습반’을 조직해 전국에서 모인 젊은 교수들을 훈련시켰다.

학자로서 현지 조사 통해 올바른 정책 방향 제시

학자로서 그는 현지조사를 생명으로 삼았다. 학문은 정책을 올바로 세우도록 지식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현지 주민들과 직접 보고 듣고 체험을 하여 실증적으로 문제의 심층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일생동안 견지해 온 자세였고 방법이었다. 그는 강촌을 일생동안 총 23차례나 반복해 방문했다. 한 작은 촌락의 현실을 통해 그는 중국 전체의 과거와 현재를 파악했으며 미래의 방향을 모색했다. 또 그는 중국의 전 지역을 직접 답사하면서 파악한 바를 정치에 반영했다. 그는 자신을 야생마라고 불렀다. “인민을 조금이라도 더 잘 살게 하는 것이 나의 학문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나는 사회인류학이라고 정해놓은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를 변혁하고 인민에게 더 나은 세계를 주기 위해 나는 사회학이건, 경제학이건, 정치학이건 그 담장들을 마음대로 뛰어 넘나드는 학문적 야생마였다. 앞으로도 나는 그럴 것이다.”

일생을 쉬지 않고 탐구하고 현실에 참여한 이 대가는 93세이던 재작년 가을에 신장성 낙후지역에 대한 답사 길에서 걸린 감기가 원인이 된 합병증으로 지난 4월 24일 저녁 눈을 감았다. 60세가 훨씬 지나서 다시 시작된 그의 질풍노도와 같은, 학자이자 정치가로서의 생은 16권의 전집을 남기고 한줌의 재가 되어 빠바오샨 국가영도자 묘역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곧 청조(淸朝)에서 시작해 전쟁과 사회주의 혁명과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의 한 종결이었다. 장례식에는 후진타오 국가 주석을 비롯한 모든 국가 영도자들이 참석해 이 대로(大老)에게 극진한 예를 표했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중앙민족대학을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남겨진 전국의 대학에 빈소가 차려졌으며 전국에서 모인 조문객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러한 모습들에서 중국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로 끝없는 시련과 고통의 여정이었던 그의 생애는 성공적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4월 마지막 떨어지는 꽃잎들 사이로 5월의 싱그러운 초록이 대지를 덮으면서 빛나고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불온한 인문학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 문화, 정정훈, 이진경, 손기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06월 27일 출간

책소개

자본과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문학과 싸워라!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불온한 인문학』.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로, 지금의 인문학이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최진석

저자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저자 문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저자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저자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저자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목차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2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3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에 정치다
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4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
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5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6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
'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출판사 서평

국가와 자본,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의 칼날을 예리하게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국가와 자본, 권력에 속박되어 불모의 대지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 위에
다양한 차이들을 가로질러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 이 책의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 이 책의 특징 1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 이 책의 특징 2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