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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1일 일요일

욕망과 서사: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론 (이경덕-글)

욕망과 서사: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론 (이경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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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프로이트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 바가 있지만, 자신이 혹은 타인이, 나아가 한 계급 내지 집단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막다른 골목을 암시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요컨대 단적으로 말해 '욕망'이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제기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일정한 인간본질을 상정하고 그 본질에 바탕한 욕망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었던 시대가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 항상 지배계급이 자기중심적으로 형성해놓은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면 피지배계급이나 소외된 다수는 그 인간의 범주에서 알게 모르게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명한 욕망을 지닐 권리도 없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욕망논의의 주된 정치적 함의라면 인간의 주체와 본질을 상정할 때에 소외되었기 때문에 욕망에서도 소외된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기획(project)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욕망이란 본래적으로 그 자체의 속성상 그 욕망의 대상에는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거나,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체제가 만들어내며 그 체제의 유지에 도움을 줄 뿐이라는 관점은 해방에 기여한다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의 편입을 낳을 수도 있다. 또한 이와 함께 일부 행복감에 도취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편입 자체를 편안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비역사성을 보이고 있다면, 앞으로 살펴보게 될 제임슨은 어디까지나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힘을 가진 것으로서의 욕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제임슨에 의하면, 욕망은 역사 속에서 항상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싸움과 관련하여 일정한 역사적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으며, 서사는 그 욕망의 역사가 드러나는 장이다 (여기서 서사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일정한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언어로 표현된 인간정신의 모든 소산을 말한다. 따라서 이 언어에는 영화언어, 건축언어, 미술언어도 포함된다). 즉 욕망은 억압된 현실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향하여 형성되어, 한편으로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내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유토피아를 그려낸다. 서사는 이러한 욕망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이 드러나는 곳이다.

현재의 욕망의 형식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도한 일반화나 추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욕망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제임슨의 언명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영원한 현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정한 단계 즉 다국적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문화적 논리라는 인식과 정식화는 그에 앞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로 다시 이끌리면서 그 연구를 통해 보완이 되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욕망문제에 있어서도 제임슨은 리얼리즘론을 통하여 자본주의 발생기의 욕망은 어떠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조감하게 만들고 다시 미래의 형식을 예감하게 한다. 이러한 제임슨의 관점과 태도가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와 논의방식을 통해서, 즉 욕망의 철저한 역사화에 의해서 욕망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포스트맑스주의의 담론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와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우리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그 용어를 영원히 쓰지 않음으로써 그 용어에 포함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부분까지 덮어버리게 되는 위험을 방지하게 해주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 발생기만 해도 욕망의 대상이 재화라던가 지위, 권력 등과 같이 분명했고 그를 위한 투쟁과정에서 그 추구의 대상이 희소하거나 수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상승기의 부르주아는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당대 부르주아의 의식이 진보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구조가 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투명성의 수사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르주아는 자리를 굳히면서 자신의 대립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억압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부르주아 계급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계급간의 경계를 지키기 위하여 계급투쟁과 계급상승을 욕망하는 것 자체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대신 박애주의나 인민주의(populism)로 보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자신의 욕망 자체를 억압하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그 전형을 빅토리아사회의 위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선이란 그래도 자기의식이 가능한 상황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치유법이다. 문학으로 보면, 당시의 인민주의가 자연주의를 낳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듯이 보인다. 요컨대 인민주의란, 부르주아가 우월한 입장에서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전체 민중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되 그들 자신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자연주의 묘사는 그러한 부르주아의 태도로 비참한 민중을 그리되 새로운 역사적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마르쿠제가 [문화의 긍정적 성격에 관하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진보적 부르주아가 부르주아 체제에 대하여 위선을 대신하여 취한 반항의 형식은 정신의 자유라는 것이었다. 물질적 추구로부터 자유롭고, 험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보존될 수 있는 정신과 상상력의 자유라는 개념은 밀등의 자유주의와 낭만주의 사상의 핵심이 된다. 낭만주의의 경우 프랑스혁명이라는 대격변과 관련이 있었고, 이 당시만 해도 자유라는 추상화된 말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했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 추상성은 사실 현실 속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구체적인 기획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이 부르주아 체제의 공고화와 함께 부르주아계급이 보수*반동화됨으로써 이후 내용을 상실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추상화되는 만큼 대상과의 일치는 문제적인 것이 되고 급기야는 대상이 아니라 추구 자체에 의미를 두는 과정의 미학(추구하는 것은 아름답다)이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서 현실은 갈수록 투명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체의 논리를 감추려는 자본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즉 현실은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도록 급격하게 복잡해지는 반면 개인의 일상은 단조로와지고 개개인이 서로 분리되어 단자화된다. 모더니즘은 현실을 투명하게 그리고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기획을 버리고 파편화된 감각들의 강렬화를 통해 그것을 대신하고자 한다. 랭보의 시에서 보이는 시각과 청각의 계발, 콘래드에서 보이는 인상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모더니즘 서사에서 적극적인 해방과 자유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들의 욕망은 욕망이 부정된 현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형식으로 즉 부정의 부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역사현실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방식으로 혹은 굴절된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모더니즘에 있어서 제국주의 현실에 대한 반발은 문화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서 자기표현을 얻었는데, 이때 문화는 사회에 대한 비판력을 가진 독립된 영역으로서 조야한 상업주의로부터의 자유를 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대중과 유리된 엘리트들만의 자유였다는 사실은 명확한 한계로 남아있다. 예컨대 모더니즘 옹호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있어서 문화 일반은 모더니즘과 같은 것이었고 대중문화는 그 타락한 형태였다.

전세계적으로 60년대는 해방과 자유의 외침이 일어났던 때이다. 제3세계의 식민지들은 해방과 독립을 요구했고 제1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거기에 동조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의 해방투쟁일 것이다. 제1세계 내부의 식민지들, 억압되고 소외된 집단들 또한 목소리를 드높였다. 여성들, 흑인들(베트남전에 동원된 비율만 하더라도 백인보다 훨씬 높았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장받고 자신들의 욕망을 가시화하고자 하였다. 프란츠 파농의 {비참한 대지}는 억압된 주체의 의식화라는 기획에 있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모더니즘이 한때의 전위적이며 혁명적인 기운을 상실하고 기존의 문화체제에 편입되어 정전화되는 현상에 대한 반발이 대항문화 혹은 반문화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히피 혹은 비틀즈 그리고 알렌 긴즈버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60년대는 욕망이론에 있어서 억압과 해방의 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제임슨에 의하면 이러한 억압과 반항이라는 틀은 욕망의 해방과 리비도적 변형이라는 궁극적인 유토피아적 비전을 지닌 맑스주의 전망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 나 60년대의 운동이 자유주의의 한계, 그리고 다원주의 내지 무정부주의의 한계를 안고 자본에 대항한 총체적이고 중심있는 운동의 창출에 실패한 것, 그리고 해방된 식민지가 다국적 자본에 의해 다시 침식되어 신식민지가 되어가는 과정은 자본주의의 공고성에 대한 인식을 깊이 심어주었다.

60년대 이후 서구맑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 자본의 공고성과, 다른 한편으로 스탈린주의하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환멸에 직면하여 장구한 혁명 내지 문화혁명 혹은 진지전이라는 새로운 전략으로써 대처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전략수정은 서구좌파들로 하여금 문화심급의 중요성을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조하게 하였고, 제임슨 역시 문화혁명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노선과는 달리 맑스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프랑스의 반프로이트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에는 두 가지 경향이 존재한다. 먼저 들뢰즈, 가타리와 리오타르는 억압과 해방의 틀 속에 있지만 뚜렷한 방향성이 없이 무한히 자기생산하는 욕망이나 리비도 경제의 개념을 내세웠다. 이들에게 있어서 욕망은 그 주체도 대상도 없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취해야 할 대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소멸되어 버린다. 즉 더 이상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억압의 기제 혹은 욕망하는 기계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한다고 하기보다는 전체 사회가 억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캉의 영향을 받은 욕망이론이 욕망과 대상의 불일치라는 사실에 강조를 두면서 욕망이 기표체계에 의하여 계속 미끄러져 나가는 현상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들에게 있어 특수한 점은 욕망이 '부정할 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욕망은 순수한 에너지 그 자체로서, 장벽에 부딪히면 반발을 일으키면서 변형된다. 라캉식의 논의가 욕망을 그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기제를 강조하면서 욕망의 궁극적 실현 불가능성을 말하는 비관주의를 가져온다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은 역사를 변형시키는 혁명적 에너지와의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다른 한편 푸코는 {성의 역사} 같은 곳에서 60년대적인 억압과 해방의 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애초에 억압이라는 것은 있지 않았으며 무한히 자기생산하는 권력의 그물망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해방의 가능성도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나 그의 추상적 이론화와는 달리 대담 같은 데에서는 게릴라적인 수법에 의한 체제파괴의 가능성을 비추기도 하였다. 사실 푸코나 들뢰즈, 가타리의 실제 역사분석에는 맑스적인 요소가 없지 않지만 그들의 개념화는 대단히 형이상학적이어서 모든 것이 권력이라던가 모든 것이 욕망이라는 식의 전일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들뢰즈, 가타리나 리오타르의 경우 욕망의 무한한 분출 자체를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부정할 줄 모르는' 욕망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다 부정적인 것이 된다. 여기에서는 모든 거대체계가 다 억압적이기 때문에 체계들 사이의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지고, 새로운 체계에 대한 구상 또한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와 더불어 일정한 방향성을 전제로 하는 거대서사도 부정되는 듯이 보인다.

제임슨은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 혹은 '리비도 장치'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개념은 일단 프로이트적인 개인 주체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인 주체의 심리에 추상하여 나름의 실체와 자율적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사의 계기 내지 "심급"을 구성하는 독립된 환상구조(욕망의 표현 형태)를 부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나 제임슨은 리오타르처럼 욕망의 분출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욕망의 흐름이 가로막힌다는 사실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욕망이 그 욕망 대상과 관련되는 방식, 즉 집중(investment)과 절합의 방식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리비도 장치의 사회적*역사적 가능조건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지 않을 경우, 욕망의 분출과 저지라는 단순한 도식에 머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서문에서, 제임슨은 리오타르의 혹은 들뢰즈, 가타리의 소서사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에 대한 분석은 사실상 그것들을 자본주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한 분석 자체가 현실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는 또 하나의 서사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들의 방식은 '서사 자체에 의하여 서사 없이 살아나가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서사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거대)서사의 종언을 말하는 것도 하나의 서사, 서사의 가능조건에 대한 자기의식으로서의 서사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가능조건에 대한 의식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왜곡된 형식으로나마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서사는 '인간 정신의 중심적 기능이며 심급'이며 ' 동체의 운명에 관한 상징적 숙고'로서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서사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소서사란 항상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숙고(비판)인 거대서사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거대서사 속에서 재서술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제3단계 즉 다국적자본주의 단계는 가장 순수한 자본주의 단계, 말하자면 이전의 봉건관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인간이건 외부자연이건 자연이라는 것이 사라지는 단계로서 이 단계에 이르면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은 아예 문제 밖의 것이 될 만큼 현실은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이런 맥락하에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이 공유하는 인식론에 대한 거부와 폐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는 총체적인 어떤 구조나 실체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이 소실되어 버리는데, 이에 따라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보하는 모더니즘적 문화도 거부된다. 대항문화 혹은 반문화의 가능성도 부정된다. 차라리 이제는 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도 없으며 경제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모두 문화 속에 흡수된다. 제임슨은 이를 문화의 편재성(omnipresence)이라 부른다. 인 고유의 의식영역마저도 자본에 의하여 침탈되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가지고 그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어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이란 것도 체제에 의해서 산출되고 체제의 유지에 도움이 될 뿐이다. 60년대의 억압과 해방의 틀을 전제로 한 욕망이론도 이 시점에서는 유효성을 상실하는 듯이 보이는데,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길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제임슨의 1971년도 저작 {맑시즘과 형식}을 통해 욕망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Cornel West)는 욕망의 이론화에 있어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욕망을 플라톤적(형이상학적인) 현전에의 의지(will to presence)로 보고 있는 반면 제임슨은 욕망의 개념을 정치화하고 욕망을 자유에의 의지(will to freedom)로 파악하고 있다고 요약한 적이 있다. 정 한 설명은 되어있지 않으나 리오타르나 들뢰즈, 가타리에 있어서 욕망은 오로지 드러내고 분출하는 것이 문제인 반면, 제임슨에게 있어서는 내용과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한 전자에 있어서 욕망은 보다 균질적인 것이고 오로지 그 흐름을 고정시키느냐 아니냐가 문제시될 뿐인데 반해 제임슨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욕망과 사이비 욕망 사이에 질적인 구별이 가능하다. 제임슨은 역사란 '필연에서 자유로의 거대한 흐름'이라는 맑스적 명제 위에서 자유란 불행한 현재를 지각하면서 그 현재를 불행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보다 유토피아적인 상태를 바라보는 형식이라고 본다. 불행한 현재가 자본주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총체성을 상실한 상태라면 자유란 그 총체성의 다른 이름이다. 말하자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시적인 것, 객관성과 주관성, 사회와 개인 단자들이 통일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를 실증적으로 구체화할 수는 없다. 루카치의 그리스 시대처럼 과거에 그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 그리고 앞으로 와야할 것으로서 단지 현재를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유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추상성은 나름의 힘이 있다. 자본주의는 개개인을 즉각적인 현실대상에 매몰시키고 전체를 바라볼 힘을 상실케 하는데 흔히 물화의 과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것을 물신화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추상으로의 움직임이 오히려 해방으로 다가올 수 있다. 자 는 자본주의 현실이 시장체제의 거대한 사이비 충족망을 강요할 때 진정한 욕망으로서 나타난다. 이 충족망이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때, 진정한 욕망은 소비욕을 넘어서서 욕망 그 자체, 욕망 일반으로 나타난다.

모더니즘이 자본주의 현실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욕망 일반이 나타났을 때이다. 모더니즘이 스타일에의 의지 혹은 방법에 의하여 굳어지기 전의 랭보의 시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그러하다. 초현실주의는 욕망의 표현 형태인 꿈과 백일몽(day-dream), 그리고 환상(fantasy) 자체를 표면으로 이끌어내어 그림 자체가 자신의 환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욕망의 자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초기 리얼리즘에서 욕망이 서사의 추진력이면서도 그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의식을 추방함으로써 깊이를 상실했다면 초현실주의 예술은 욕망의 소멸 혹은 소비욕구로의 대체에 대한 항거로서의 자의식이며 징후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초현실주의에서 보이는 이미지 대상들은 아직 완전히 산업화되지 않은 경제의 산물,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고호의 구두그림에서 발견하고 있듯이 그 인간적 기원 즉 그것들을 산출해낸 작업과 산물들과의 관계가 아직 완전히 은폐되지 않은 상태의 것이며 아직 인간의 주관성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따라서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신비롭고 표현적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몸짓이었다. 그 한 사물은 그 사물의 사물다움을 드러내는 한편, 욕망 그 자체, 욕망 일반을 일깨우는 힘 또한 가졌다. 즉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소유 욕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상태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팝 아트의 오브제와 옾 아트의 시각적 오브제, 그리고 번들거리는 잡지사진들로 점철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비인격적인 이미지대상들은 이러한 잠재력과 깊이를 상실했고 따라서 욕망 자체를 일깨울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극사실주의 회화나 조형 그리고 누보로망의 사물화한 문장들은 우리를 대상 너머로 인도하지 못하며 따라서 리비도의 흐름을 차단한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정신분열증에서처럼 기표의 사슬이 끊어진 채 대상에의 즉각적인 몰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임슨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거리없이 이론화하는 것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징후이다. 보드리야르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소비사회}에서 그는 우리의 모든 욕망이 소비사회의 기제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나아가서는 이른바 '생산의 거울'을 배격한 데 이어 욕망의 거울 또한 넘어서자고 한다. 또 욕망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푸코의 이론, 모든 욕망은 체제내적이어서 체제의 재생산에 도움을 줄 뿐이며 부정이나 전복성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신역사주의의 관점은 새로운 것을 환기할 수 있는 욕망의 힘 그리고 자유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마도 "자본주의는 자체가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와 욕망을 일깨움으로써 어떻게든 스스로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1960년대의 주된 정치적 입장들에 대한 묘비명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이들의 비판에서 추론해보자면, 1960년대의 욕망 개념은 억압과 해방의 틀, 다시 말해서 욕망은 반드시 그것을 억압하는 체제의 존재를 상정하되 우리는 그 바깥에 있을 수 있어서 부정하고 위반하고 전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부정과 전복의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그 대상이 되는 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다면 욕망이란 언제나 시간 밖에, 그리고 '서사 밖에' 있게 되고 따라서 '내용이 비어'있어서 그 출현의 순환계기들 가운데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해석상의 문제는 그 분출의 문맥, 그리고 특정한 역사적 억압의 기제를 명세화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 한 판단은 들뢰즈, 가타리나 리오타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의 욕망 개념은 '현전에의 의지'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 잠재와 분출의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내용이 비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철저한 내재성과 유명론에 입각한 신역사주의 역시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체제가 위반과 전복을 체제내로 흡수한다고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전제 자체가 푸코에게 영향을 받아 아무 것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체적인 권력그물망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또한 상동성의 원리에 의하여 역사적 자료들간의 위계질서를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결혼과 사랑과 노예제도와 의술과 돈이 동일한 시장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단초로부터 시작되는 초월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제임슨이 보기에는, 보드리야르 그리고 신역사주의 또한 깊이와 거리의 상실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임슨은 이에 대해 체제는 변화하는 것이며 그 안에 초월의 계기를 반드시 내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자체내에는 사회주의로의 경향이 이미 내재해 있으며, 이는 다시 자본주의를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고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만드는 정신적 지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 초월이라는 것이 반드시 체제 밖에 서서 완벽한 시나리오를 작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를 세운 다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해있는 초월의 계기들을 해방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므로 현실 속에서 형성되는 욕망은 그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충동을 낳으며 서사는 이데올로기의 한계, 다시 말해서 욕망의 한계점을 드러내면서도 그 한계점 자체가 바로 현실을 보고 그것을 초월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따라서 심지어는 깊이를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도 나름대로 인민주의적*민주주의적 욕망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최소한 과거 모더니즘의 고급예술을 선호하는 엘리트주의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또 신역사주의는 이제까지 주변적이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몫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60년대의 욕망이론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약점은 그 무정부성과 다원적 주체간의 통일성 결여이다. 그러나 신사회운동에서와 같은 소집단 운동만 하더라도 이전의 시장 개인주의를 넘어선 것만은 사실이며 앞으로의 집단적 주체를 낳는 전초단계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제임슨은 근본적으로 현단계를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요구하며, 현재의 문화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인식적 지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그는 60년대의 맑스주의적인 억압과 해방의 틀을 버리기보다는 재활성화를 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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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제임슨의 욕망이론을 살펴보았는데 이 장에서는 그의 욕망이론의 실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는 발자크론을 살펴볼까 한다. 리얼리즘은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비교의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는 데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던져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리얼리즘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욕망의 산물이면서도 그 시대를 넘어서 욕망 일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서사라는 말은 반영이라던가 재현이라는 골치아픈 용어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잇점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재 이나 반영이 정적인 대상의 정적인 묘사가 아님을 강조하더라도 여전히 인식론적인 논쟁거리가 된다면 그 용어를 피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대표적인 반영론자인 루카치 자신의 입을 빌어 반영이라는 개념의 함의를 재정식화해 보기도 한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고와 존재는 그것들이 서로 "상응"한다거나, 혹은 서로 "반영"한다는 의미나 그것들이 서로에게 "평행한다"거나 혹은 서로 "일치한다"는 의미(이 모두가 엄격한 이원성을 감추고 있는 표현들이다)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동일성은 그것들이 동일한 현실의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의 측면들이라는 사실에서이다.



제임슨은 이 모델이 동일성이라는 말의 헤겔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주체와 객체가 서로 "재현"함이 없이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총체성 속에 관여함으로써, 즉 역사의 현재에 공동 관여함으로써 상호관련되는 형식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말해 객관존재와 서사, 서사와 욕망 그리고 서사와 이데올로기는 서로 상응한다기보다는 하나의 현실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지만 상호관련되어 있다고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상호관계는 어느 시대의 어떤 서사형식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리얼리즘은 현실과의 관계가 의도적인 면을 보더라도 우선적이기 때문에 현실규정력을 강조하는 맑스주의자로서는 설명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제임슨은 {맑스주의와 형식}이 출간된 1971년 이래로 꾸준히 발자크론을 써왔으며 그 글들이 1981년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리얼리즘과 욕망: 발자크와 주체의 문제]라는 장으로 집약된다.

제임슨은 리얼리즘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는데 하나는 주관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현실을 파기하고 새로운 현실을 생산한다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해서 주어진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은 자본주의 문화혁명 혹은 부르주아 문화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는 생산관계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신성시되었던 모든 봉건적 후광을 벗겨내었고, 질을 수량화했으며, 고립되고 단자화된 주체를 만들어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과 의미로 가득 차있던 자연 대신에 수량화되고 비인격적인 공간을 산출했다. 리얼리즘은 이러한 과정의 시발로서 기존의 주체를 탈기획(de-programming)하고 새로운 주체를 기획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공간을 창출하고 주체를 거기에 익숙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것은 결국 모더니티의 문제인데, 자본주의의 발전단계가 고도화됨에 따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 모더니티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상상적 해결방식들이다.

제임슨은 발자크의 {노처녀}(La Vieille Fille, 1839)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문화혁명의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알 송 지방의 부유한 집안의 노처녀 코르몽을 사이에 두고 앙시엥 레짐의 귀족이었으나 왕정복고를 거치면서 세속화된 부르주아의 측면 도 갖게 된 돈없는 슈발리에와 치부한 부르주아 뒤 부스퀴에의 경쟁이 일어난다. 제임슨은 (바르트의 {S/Z}에서와 유사하게) 세 가지 약호를 추출한 다음 앙시엥 레짐의 약호가 새로운 부르주아의 약호에 의하여 탈약호화(decoding)되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귀족적인 매너라는 약호가 성적 에너지(나폴레옹적 에너지)라는 약호에 의해서 손상당하고 (귀족적 우아함이 유약성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돈이라는 부르주아의 약호에 의해서 무참하게 탈신비화된 결과, 귀족이 부르주아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약호의 성질을 볼 때, 매너나 성적 에너지는 사이에 중간항을 둘 수 있지만 돈이라는 약호는 있음과 없음, 양자가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전의 아날로그(analog)의 체계로부터 디지탈적인(digital) 체계로의 전환을 보이고 있다. 제임슨은 발자크가 서사의 전개과정을 통해 독자들을 이러한 수량화된 새로운 세계에 적응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리얼리즘 소설이 주관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것들을 침식하고 분해하며 새로운 것에의 적응을 마련하고 있다면 객관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운 시장자본주의의 현실을 처음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 에서 전통적으로 현실의 '반영'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일어나게 되는데 문제는 반영의 주체와 객체 모두가 역사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던 리얼리즘의 기획 자체가 잘못되었다라던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했다라는 입장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도와 기획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했던 역사적 조건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야콥슨이나 바르트가 리얼리즘을 '현실효과'를 낳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사실상 현실과의 관계를 문제시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제임슨은 리얼리즘을 하나의 정교한 장치와 기법으로 보기는 하되 그 장치와 기법이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라는 기획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된 역사적 상황이 있다는 것을 우선 보고자 한다.

발자크는 발생기 자본주의와 부르주아가 상승하고 있던 시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 때는 아직 부르주아적 주체가 완전히 성립하기 이전의 공동체적 집단이 존재하던 특정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욕망의 대상은 뚜렷하되 단자화된 심리적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으며 '절대적 요구를 가해오는 특수하게 익명적인 상태'로, 즉 욕망 일반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욕망 일반 그리고 욕망 그 자체에 대하여 알레고리컬한 것이 되고, 이러한 욕망이라는 단서 혹은 주제가 자아-장벽(단자화된 주체들의 개인적이고 순전히 주관적인 경험을 밖으로부터 지키며 확인하는)에 의해서 아직 상대화되거나 개인화되지 않은 상황의 이와 같은 환기내용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재정의한 바의 의미에 있어서 유토피아적 충동을 재활성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발자크의 소설창작은 인간존재는 언제나 그 앞에 정확한 대상을 위치시키는 욕망에 의해 동기화된다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구성 원리는 개인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거나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채 모호하고 수동적이며 관조적이 되는 상황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전제를 함축한다. 발자크에 있어서 의식이란 언제나 그것이 여인이건 집이건 지위건 무엇인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서 강제되며 보다 일반적으로 명성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 양적인 측면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돈은 가장 상징적인 것이다. 플 베르의 소설에 이르게 되면 막연히 솟아오르는 불만족이 특징적이 되고 거짓 환상에 의한 욕망, 욕망하고자 하는 욕망(desire to desire)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소위 보봐리즘이다. 즉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본뜨는 것인데,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을 분석하면서 '내면적 간접화'라고 칭한 것이 바로 이것이고, 로베르의 유명한 '자유 간접화법'을 낳게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발자크에 있어서의 욕망은 직접적인 리비도를 소유에 대한 부드럽고도 따뜻한 동경과 유토피아적인 소망성취의 감지할 수 있는 형상으로 바꾸는 데 반하여 플로베르에 있어서의 욕망은 사소하고도 조야한 것들에 대한 굶주림으로 전락한다. 이는 부르주아의 주체가 성립하여 단자화되었으며, 세계가 파편화되고 물화되었기 때문에 즉물적인 대상에 몰입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연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에는 심지어 가치론상의 역설이 존재하게 된다. 예 대 드라이저의 경우 그가 가장 기량을 발휘하는 것은 그가 가장 실패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파편화된 감각의 미세한 움직임을 여실히 그려낼수록 그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을 상실하여 총체성 획득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경우에는 소설언어 속에 작가 개인의 환상이 어우러져 있어서 전기적인 작가 자신과 소설 속의 함축된 작가 그리고 독자의 구별이 불가능하며 나아가 시점이나 아이러니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문제적 주인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시점이나 아이러니는 부르주아 주체가 확립되어 독립되고 닫혀진 단자들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작가와 독자는 동일한 공동체에 속해 있고 동일한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다. 한 개인이 단자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이 한 계급의 운명이며 한 개인의 충동이 사회 전체의 충동이 되는 알레고리컬한 구조가 성립된다. 예컨대 {종매 베트}(La Cousine Bette, 1847)에서 베트는 도시의 성장과 새로운 상업적 환경 때문에 제 자리를 잃은 농민의 정신상태를 지니고 있으며 저장본능에다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라는 보수성이 그녀의 집요한 복수욕, 윌로부인에 대한 증오를 설명해내면서 그것과 중첩되어 있다. 윌로남작만 하더라도 나폴레옹 시대의 인물로서 제국의 흥망성쇠가 그의 개인적 운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실 윌로남작은 욕망의 화신 혹은 욕망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욕망의 본질이 한번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오직 대상의 획득과 좌절이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자크의 소설로 하여금 선악에 관한 윤리적 판단이 끼어든 멜로드라마를 피해가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윌로부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하나의 교훈을 준다. 즉 여자란 정숙한 아내이면서 또한 정부의 역할을 함으로써 남자를 만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한 교훈의 적실성 여부는 잠시 제쳐두고, 어쨌든 교훈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직 사회가 변화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제임슨은 소설구성상에서 조건용법, 즉 '만일에 이러이러하게 행동한다면 이러이러할 것이다'가 가능한 조건이 이러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이 로 갈수록 부르주아 체제가 굳어져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오직 지시적 용법만이 우세하게 되고 자연주의는 그 극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용법에 의한 교훈은 {노처녀}의 경우나 {농민들}(Les Paysans, 1844)의 경우 새로운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소설의 현상적으로 닫혀보이는 공간을 열어놓는 지평인물(horizontal figure)의 설정에 의해서 더욱 두드러진다. {노처녀}에서는 앙시엠 레짐의 귀족적인 것과 나폴레옹적인 에너지를 함께 갖춘 트롸빌 백작이 그이고, {농민들}에서는 주변적 인물이긴 하지만 진정한 귀족성을 지닌 대토지소유자들, 롱꿰롤과 술랑쥬가 그러하다. 이 한 교훈이 실지로 효과를 볼 수 있었는가 하는 실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이제 제임슨이 보는 발자크 자신의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제임슨은 '리얼리즘의 승리'와 관련하여,역사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그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굴절시켜 사회적 역사적인 핍진성의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보고 있는 루카치에 반하여 역으로 발자크의 소망, 이데올로기가 바로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파악한다. 거 게 말하면 루카치의 입장에서는 발자크의 신조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이 가능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발자크의 욕망 '때문에' 리얼리즘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임슨의 견해를 보기 전에 루카치의 언급을 직접 살펴보기로 하자.



발자크의 위대성은 그의 모든 정치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편견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모순들이 발생할 때 청결한 눈으로 그것들을 관찰했으며 또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데에 있다. 그가 그 모순들이 "문화"와 "문명"에 대해 파괴적이며, 자신의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보았고 또 그려내었다.---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에 까지 멀리 이르는 비전의 깊이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예술가로서 그(발자크)는 언제나 그 자신이 보고, 배우고 겪은 것만을 그려냈으며 자신에 관하여 그가 본 사물들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이념들과 모순되는가의 여부는 문제삼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리얼리즘의 승리'가 태어났으며, 그렇다면 발자크의 예술적 목표들이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통찰력있는 표현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졸라의 입장은 전적으로 다르다. 졸라의 사회적*정치적 관점들과 그의 작품의 사회비판적 경향 사이에는 발자크의 경우만큼 그렇게 넓은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루카치의 견해에 의하면 왕당파인 발자크와 예술가인 발자크가 분리되어 예술가로서의 발자크가 승리하는 것으로 되지만 예술가란 여기서 객관적 당파성(Parteilichkeit)의 구현자라고 볼 때,이것은 객관적인 상황 자체가 이러한 분리를 강요한 것이고, (이를테면 졸라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분리 자체가 리얼리즘을 낳게 했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예술가로서의 발자크의 정직함이 자신을 왕당파로 만들었고, 따라서 상승하는 부르주아의 모습과 대비되는 귀족의 몰락상과 농민의 비참상을 여실히 그려내는 한편 미래에 대한 비전도 성취할 수 있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진보적인 의식적 당파취함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도 존재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톨스토이와의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루카치 자신에게서 제임슨의 이론적 입장에 유리하도록 이끌어낼 수도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발자크의 리얼리즘을 볼 때 발자크의 욕망과 이데올로기가 작품과 무관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제임슨의 입장이다. 그는 발자크의 예술에서 발자크 자신이 천명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문학에는 보다 근본적인 현실을 왜곡시키는 외양만큼이나 외양의 진실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발자크의 경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 그리고 생각한 것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역사의 어떤 계기들에 있어서는 독자들이 그를 믿었다라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발자크는 그의 주인공들 못지않게 분명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넓게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좁게는 가족의 영향하에서 형성되었다. 발자크는 농부 출신이지만 혁명기와 나폴레옹시대에 땅투기로 치부한 집안과 옛 상업 귀족 집안 사이의 결혼에서 아버지가 53세 때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발자크보다 동생을 편애해서 그는 많은 괴로움을 겪었고 그것이 이후의 여성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진다. 발자크가 성숙하면서 자아를 위치시킬 환상적 해결책은 군주제 그리고 토지귀족의 보수주의였고 특히 장자제도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욕망은 꿈이나 백일몽 그리고 환상에 있어서의 소망성취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꿈은 전적으로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백일몽이나 환상(프로이트의 경우 백일몽과 환상은 거의 차이가 없다)에 있어서는 그 서사 가운데 의식적으로 자아를 위치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환 은 논리적 구성능력이 생긴 다음에야 일어나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두 가지 과정이 존재한다. 즉 쾌락원칙에만 종속되어 상상적인(imaginary) 해결만을 구하는 단계와 현실원칙을 받아들여 욕망을 현실에서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의 정교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상징적인(symbolic) 해결에까지 이르는 단계이다. 상 적인 단계란 방해받지 않는 어머니와의 합일이 목표이고 상징적인 단계에서는 타자 즉 아버지의 존재로 인하여 사회질서에 눈을 뜨게 되면서 현실원칙에 맞지 않는 것은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들어가고 의식은 좀더 현실원칙에 알맞는 소원성취를 구하게 된다.

제임슨은 상상적인 단계의 특징으로서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들고 있다. 상상적 단계에서는 안과 밖, 자아와 타자라는 단순한 구도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폭력이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타자는 모두 악이며 자기편은 모두 선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선악의 구분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산출이 일어난다. 제임슨은 타자성에 기초한 이론 및 운동들이 대부분 상상적인 단계에 있다고 진단한다. 예컨대 소집단운동 같은 경우이다. 그 라캉을 빌어 정식화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즉 이데올로기란 '개인들이 존재의 현실적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이다'라는 데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상상적인 단계의 이데올로기가 상징적 체계 안에 들어가 현실과 역사에 의해서 극복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상징적 해결로서의 온전한 작품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적 단계의 환상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제임슨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환상이 실현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즉 발자크의 욕망은 매우 구체적인 것, 의회에도 진출하는 부유한 토지귀족의 삶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로서 군주제, 그리고 장자제도와 같은 정치적인 원칙들에 기초한 왕당파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발자크의 경우 이러한 상상적인 환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예컨대 {노처녀}에서 지평인물로서 나타나는 '귀족성과 나폴레옹적 에너지를 함께 갖춘' 트롸빌 백작, 그리고 {흙탕물을 일으키는 사람}(La Rabouilleuse, 1842)에서와 같은 조셉의 경로가 있다. 조셉은 명백히 발자크의 분신처럼 나타나는데, 어머니가 형 필립만을 편애하다가 오히려 배반을 당한다던가 필립이 왕정복고 때에 부르봉 왕가에 대한 모반에 연루된 적이 있으며 7월 왕정 당시 알제리아 전쟁에서 죽어버리는 반면 조셉은 화가로서 성공하여 행복한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다분히 작가 개인의 소망성취인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제공하는 사적인({종매베트}의) 그리고 정치적인 교훈들({농민들}에서 보이듯이) 또한 상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적인 해결책은 작가의 이데올로기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의 최선의 유토피아적인 해결책이다. 그레마스의 기호론적 4각형의 각 항이 이데올로기의 한계점들이라면, 그 항들 가운데에서 최선으로 조합된 논리적 해결책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즉 발자크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항들인 구제도(앙시엠 레짐)와 나폴레옹적 에너지를 결합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면 발자크의 리얼리즘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지평인물들을 플롯에서 소외시키며 조셉의 이야기를 필립 이야기의 복잡한 사회정치적 맥락과 함께 놓아야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제임슨은 발자크의 환상이 상상적 단계를 극복하고 상징적 단계에 들어서서 현실의 무게를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의 욕망은 너무도 분명하고 또한 강렬하여 그에 걸맞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산출했으나, 또한 환상에 있어서 너무나 있을 법하게 시나리오(서사)를 구성하다 보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었고 이 현실은 역으로 욕망에 대한 한계가 되어 "욕망은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발자크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로서 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현되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여기에서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역으로 보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욕망의 진정성을 믿고 환상에 충실했던 '정직한' 예술가였다. 즉 현실의 강렬한 저항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환상가였다는 말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역사는 상처를 주는 것이며, 욕망을 거부하며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실천에 가혹한 제한을 가한다. 역사의 '간지'는 욕망과 실천에서의 명백한 의도를 무시무시하고도 아이러닉하게 반전시킨다."

이런 맥락하에서 제임슨은 발자크의 욕망, 구체적이면서도 욕망 일반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욕망이 현실을 현실답게 그려낼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현실 자체가 발자크 시대의 현실, 말하자면 환상을 허용하는 현실이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 앞에서 발자크의 욕망이 좌절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욕망이란 영원히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추구한다는 식의 실존주의적인 추구의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시한다는 맑스의 명제는 욕망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즉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욕망을 가지며, 발자크의 경우에는 그 욕망에 충실했던 만큼 위대한 문학을 낳았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임슨은 {정치적 무의식}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는 만큼 루카치와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닐지 모른다. 제임슨 자신이 플로베르의 보봐리즘이나 기싱의 분한(憤恨, ressentiment) 내지 부정의 부정이라는 욕망의 형태를 분석하는 가운데 이 또한 역사가 그 시대에 허용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임슨을 따라가 앞을 내다보면, 발자크의 리얼리즘이 부르주아 주체가 아직 형성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공동체에 근거한 욕망 일반에 의한 것이었다면 부르주아 주체의 해체를 겪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우리 시대는 다시 새로운 문화혁명을 예고하면서 새로운 리얼리즘, 새로운 욕망 일반을 탄생시키는 전초지대가 될 것이다.

2014년 9월 8일 월요일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 (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고유섭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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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서(작품) 
  • 대표관직(경력) 
 
 
정의
1905∼1944. 미술사학자.
개설
호는 우현(又玄)인천 출신.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에 입문한 고유섭은 리글학파와 뵐플린학파의 실증적인 학문에 매료되었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중국미술사, 일본미술사 등의 미술사강의를 접하면서 조선미술사 연구에 대한 포부를 키웠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중국, 일본, 인도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한국의 불교조각과 탑 연구, 고구려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유물의 자료수집과 연구, 유적의 답사, 유물의 실견에 매진하였고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 그의 미술사 연구의 초점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석탑에 대한 연구였다. 삼국 중 백제와 신라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였다. 사후 그의 연구결과를 모아 책으로 간행한 것이 『조선탑파(韓國塔婆)의 연구』(1948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造形)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파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자 역작이다.
고유섭은 석탑뿐 아니라 불교미술의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불교조각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1940년 발표한「한국의 조각」에서는 처음으로 조각을 중심으로 미술사적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각 시대별 조각의 양식적 변화와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 1930년경부터 회화사 연구를 시작하여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회화에 관한 문헌을 발췌하는 작업을 5∼6년간 진행하였고, 이는 사후에 『조선회화집성』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사연구는 화론(畵論)의 집성에서 시작하여 안견(安堅)강희안(姜希顔)정선(鄭敾)김홍도(金弘道) 등 화가별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는 한국회화사의 기틀이 되었다. 고려시대 회화에 관한 연구들은 지금도 능가하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2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고유섭은 이밖에도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미술사 기초자료 수집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44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이던 황수영(黃壽永)·진홍섭(秦弘燮)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1963년)·『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1965년)·『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1966년)·『송도의 고적』(1977년) 등으로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우리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고유섭과 한국회화사 연구」(김홍남,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의 도자인식」(장남원,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과 탑파연구」(박경식, 『미술사학연구』248, 2005)
  • 「고유섭의 생애와 학문세계」(김영애, 『미술사학연구』190·191, 1991)
  • 「고유섭의 생애와 학문세계」(김영애, 『미술사학연구』 190·191, 1991.9.)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옌롄커 -풍아송, 사서

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1 | 옌롄커 선집 | 양장본

옌롄커 지음 |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02월 20일 출간

목차

한국어판 서문 넘쳐흐르는 글쓰기와 열독(閱讀)

제1권 풍(風)
관저(關雎)∥한광(漢廣)∥종풍(終風)∥탁혜(?兮)
제2권 송(頌)
유고(有?)∥양사(良?)∥희희(噫?)∥반수(泮水)
제3권 아(雅)
출거(出車)∥도인사(都人士)∥시월지교(十月之交)∥면만(綿蠻)∥백구(白駒)
제4권 풍아송(風雅頌)
제5권 풍(風)
식미(式微)∥신풍(晨風)∥염가(??)∥동문지분(東門之?)∥비풍(匪風)
제6권 아(雅)
청청자아(菁菁者莪)∥사간(斯干)∥사제(思齊)∥백화(白華)∥소명(小明)∥남산유태(南山有台)
제7권 송(頌)
희희(噫?)∥신공(臣工)∥동(?)∥유필(有?)
제8권 풍아송(風雅頌)
제9권 아(雅)
대전(大田)∥거할(車轄)∥습상(?桑)∥점점지석(漸漸之石)∥소변(小弁)∥상유(桑柔)∥백구(白駒)∥원앙(鴛鴦)
제10권 송(頌)
반(般)∥천작(天作)∥시매(時邁)∥유고(有?)
제11권 풍(風)
동산(東山)∥초충(草蟲)∥감당(甘棠)∥환란(?蘭)∥갈류(葛?)
제12권 풍아지송(風雅之頌)

부록
저자 후기 1, 2, 3
옮긴이의 말
옌롄커 연보

책 속으로

“리 부총장님, 저의 저서 『풍아지송?「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이 있는 한, 저는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셈입니다. 더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부총장님께서 정말로 마음속으로 잘못을 깨닫고 이 양커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싶으시다면, 저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첫째, 저는 사상이 해방되지 못한 사람이니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둘째, 저는 신식 관념을 갖춘 사람이 아니니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사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갑자기 슬픔이 솟구쳐올라와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얼굴이 눈물로 잔뜩 젖었을 때 마음 한구석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귀신에게 홀리듯(또한 마음속 느낌에 따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청천벽력처럼 그의 면전에 무릎을 꿇었다(아주 힘차게,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옆에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내 아내 자오루핑을 바라보았다. 내가 반복해서 말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첫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둘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셋째, 무릎을 꿇고 간청하건대 제발 다음부터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본문 22~23쪽)

깊은 눈 속에서 무릎을 빼내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쓸쓸히 걸어갔다. 새로운 시성과 『시경』에 누락된 옛 시와 노래를 찾으러 갔다. 이곳 시성보다 훨씬 더 멀고 귀신도 모를 외진 곳으로 가다보면 이곳보다 훨씬 더 휘황찬란한 『시경』의 고성과 시편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공자가 『시경』에 수록하지 않고 삭제해버린 시가 거의 삼천 수 정도 되는데, 내가 이곳에서 찾은 것은 겨우 이백 몇십 수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실된 채 찾지 못한 시 수천 편이 어디선가 외롭게 또는 호호탕탕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내가 외롭게 그것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렇게 떠났다. 홀로 그림자만 남기고 떠났다. 흰 눈이 교교한데, 옛 시성은 연기처럼 사라지듯이 내 뒤로 멀어져갔다.(본문 586~587쪽)

여기 후기에서 한 가지 일을 또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그 일이 이 소설의 구상과 앞으로의 내 글쓰기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2004년 늦겨울과 초봄 사이, 팔순의 큰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서둘러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출상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 아침 출상 과정에서 백 명이 넘는 우리 효자들이 상복을 입고 허리에 삼끈을 맨 채 눈보라를 무릅쓰고 삼배구고의 예를 행하고 있을 때, 여동생 하나가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뒤쪽 사촌 동생의 영붕 안에 안치된 두 개의 관 위로 화려한 색깔의 나비들이 무수히 날아와 가득 내려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방금 사라져버린 희한한 광경 속에 멍하니 서서 생각해보았다. 혹한의 날씨에 눈송이마저 흩날리는데 이 나비들은 대체 어디에서 날아온 것일까? 또 어디로 날아간 걸까? 왜 내 동생의 영혼혼례를 치르고 있는 영붕 안에만 내려앉고 바로 옆 큰아버지 장례를 위해 마련된 순백의 영붕 안에는 내려앉지 않은 것일까? 중년이 되어 이미 뚜렷한 인생관과 세계관, 문학관이 형성되어 변하기 어려운 이 시기에, 어째서 내가 이처럼 ‘진실이 아닌 진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장면을 만나게 된 것일까? 이 한 컷의 진실과 기이한 장면은 앞으로 나의 세계관과 문학관에 어떤 형태의 영향을 미치고 어떤 기능을 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나의 글쓰기가 더이상 갈 곳이 없는 미궁에 빠져 있을 때, 하늘이 내게 처음으로 열어준 문학적 깨달음인 것은 아닐까? ―「저자 후기」 중에서(본문 594~595쪽) 닫기

출판사 서평

『풍아송』(옌롄커 선집 1)∥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중국 지성계를 발칵 뒤집은 화제작,
초월주의적 리얼리즘, 황탄 현실주의, 괴탄 사실주의로 불리는
중국 부조리 서사의 대가 옌롄커의 결정적 한 수!


내 생명 전체를 관통하는 글쓰기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작품, 이 책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다.
―옌롄커

천쓰허가 ‘괴탄怪誕 사실주의’ 작가로 명명하고 류짜이푸가 가장 독보적인 중국 작가로 손꼽은 옌롄커! 주요 작품마다 숱한 쟁의를 불러일으킨 현대 중국문학사의 이슈메이커, ‘중국에서 가장 폭발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소설가. 옌롄커 부조리 서사문학의 결정판 『풍아송』.
이 책은 “베이징 대학을 겨냥했다”는 비난과 “중국 당대當代 문학에서 최초로 지식인계를 전면적으로 다룬 소설”이라는 신화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공자가 채록했다고 하는 중국 최초의 시가 모음집 『시경』과 거기에서 제외된 사라진 시들을 찾아 연구한 양커 교수, 공들여 쓴 오십만 자 분량의 원고를 완성해 집으로 돌아오지만, 자신의 침실에는 아내이자 동료 교수인 자오루핑과 곧 대학 총장으로 부임할 리광즈가 함께 뒹굴고 있는데……

나는 암암리에 『풍아송』의 출판이 불러오게 될 엄청난 매도와 욕설을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죽어가는 생명 위에서 춤추듯 날아다니는 분홍색 나비를 보았다. 눈송이가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는 것도 보았고, 눈이 내린 뒤 맑게 갠 하늘도 보았다.
―옌롄커

옌롄커의 바람대로, 이 작품이 “그젯밤에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그 돌이 어디서 인간세계로 왔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눈에 익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오래오래 곱씹히는 소설로 읽히기를 바란다.
―김태성

【출판사 세부 소개】
제1, 2회 루쉰문학상과 제3회 라오서문학상을 수상한 옌롄커,
중국 당대 최초의 지식인 소설로 불리는 문제작

중국 내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폭발력 있는 작가, 쟁의가 가장 많은 작가로 손꼽히는 옌롄커. 그의 국내외 수상 경력과 여러 나라 대학이나 학회에서의 화려한 문학강연 활동을 보면, 이제 그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적 작가임에 틀림없다. 1996년 중편 『황금동黃金洞』으로 제1회 루쉰문학상 수상, 1997년 『연월일年月日』로 제2회 루쉰문학상 수상, 2005년 『레닌의 키스受活』로 제3회 라오서문학상 수상 등 자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쓴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2012년 『딩씨 마을의 꿈』으로 타이완 ‘독서인상’ 수상, 전지구 화어華語 10대 양서 선정, 영국 ‘맨아시아문학상’ 최종후보, 『파이낸셜 타임즈』 ‘올해의 책’ 선정과 더불어 『사서四書』로 프랑스 ‘페미나문학상’ 최종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옌롄커의 장편 『풍아송風雅頌』(2008)은 출간 당시 “베이징 대학”을 겨냥했다는 비판과 더불어 대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중국 당대 문학에서 최초로 지식인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또 한번 ‘중국에서 가장 쟁의가 많은 작가’라는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국어판에는 저자가 직접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과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저자 후기」 세 편이 실려 있어 이 작품의 창작 과정과 출간에 대한 저자의 변을 맛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신간 『풍아송』에는 저자로부터 직접 받은 자료를 토대로 기존 번역서에 없던 「옌렌커 연보」를 상세히 수록해 한국 독자의 관심을 북돋웠다. 옌롄커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부조리하다. 글을 쓴다는 건 인생에 대한 도둑질, 죽음이 엄습한 곳에서 생명을 도둑질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이 책 『풍아송』 집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이 책이 출판되고 나서 당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쳤을 때…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나 자신에 대한 따돌림이자 비판이라고만 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내 생명 전체를 관통하는 글쓰기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작품이 되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중국 최초의 시가 모음집 『시경』의 체제를 차용한 현대판 부조리 서사문학의 백미
이 책의 제목 ‘풍아송’은 원래 『시경』에 나오는 내용별 분류 체제를 가리킨다. 즉 ‘풍風’은 남녀의 애정을 주로 다룬 여러 제후국의 민요?민가이며, ‘아雅’는 조정의 의식에서 주로 불린 시가이고, ‘송頌’은 선조의 덕을 기리는 종묘 제의용 악시다. 옌롄커는 이 체제를 차용해 자신의 소설 형식을 변주했다. 이 소설은 돌림노래처럼 이 세 개의 악장이 돌아가며 반복된다. 『시경』의 각 시에서 빌린 제목의 낱낱의 장들은 밀도감 있는 심리 묘사와 빠른 이야기 전개로 한 편의 완결된 시적 정경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맨 첫 페이지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양커 교수가 자신의 연구 저작을 두고 한 이 묘사가 곧 옌롄커가 이 책을 쓰며 가닿고자 한 글쓰기의 지향점임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나는 『풍아지송』이 아주 위대한 저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시경』이라는 경서經書의 기원과 요체를 새롭게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이 없는 민족에게 새로운 정신의 뜨락과 기댈 수 있는 산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담긴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금옥처럼 귀하여 땅바닥에 던지면 소리가 난다.”(본문 13쪽)

『시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이자 중국인들의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경전이다. 약 2000여 년 전, 즉 서주西周에서 춘추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공자가 민간에 떠돌던 시 삼천여 편 가운데 삼백다섯 편을 골라 채시한 시가집에서 옌롄커는 이 소설의 주요한 형식과 내용의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기존에 문화대혁명 시기의 현실 정치에 들이댔던 날선 비수를 이제 중국 문화정신의 근간을 이룬 이 경전의 고대적 시간과 무게에 들이댄 건지도 모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자 후기」와 「한국어판 서문」에서 자신이 겨눈 비수의 대상을 솔직히 짚어내고 있다.

『풍아송』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에 대해 쓴 작품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오늘의 중국과 중국인들을 보며 이구동성으로 ‘중국인들이 어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풍아송』 초고를 읽고 나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옌롄커, 당신은 중국 당대 지식인들의 환한 얼굴에 혐오스러운 가래침을 뱉고 그들의 누추한 바짓가랑이에 죽기 살기로 발길질을 해대고 있군요.”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게는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그럴 만한 힘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저 자신의 얘기를 쓸 뿐입니다. 저 자신의 겉돌고 있는 속마음을 묘사할 뿐입니다. 저는 항상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느껴 왔습니다.” ―「저자 후기」 중에서.

이 소설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인공 양커 교수의 행보는 아주 문제적이다. 바러우산맥의 시골 출신 그는 현재 입신양명하여 베이징 유명 대학의 교수이자 『시경』을 연구한 권위자이다. 오 년 간 공들여 쓴 오십만 자 분량의 연구서를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침실에는 자신의 아내이자 동료 교수 자오루핑이 훗날 총장으로 취임할 리광즈와 뒹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래폭풍에 휩쓸려 쓰러져가는 대학건물을 지키려던 대학생들과 우연한 계기로 함께하다 정치적 교수사회의 표적이 되어 뜻밖에도 정신병원 환자로 둔갑된다. 대학 내에서 배척되던 그의 강연 기회는 황당하게도 정신병원 환자들과 홍등가로 변모한 고향 천당 거리의 여자들에게 베풀어진다. 또한 공자가 채록에서 빠뜨리거나 삭제된 사라진 시편을 찾으려는 그의 학문적 이상은 고향 바러우산맥에서 자신만을 사랑했고 그 사랑의 체념으로 죽어간 링쩐이라는 여인과 그녀의 딸 샤오민에 대한 일그러진 사랑의 양태로 변모한다. 그는 과연 자신의 붕괴된 학문적 이상을, 누락되어 사라진 시들을, 황폐해진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귀향에 대한 염원과 지식인의 정신적 고향 상실에 대한 유쾌한 대답! 

나는 ‘귀향’이 단지 마음속으로만 오랫동안 겉돌았던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과 정말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은 아주 오랜 세월 내 마음속에 뿌리내려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소설의 토양은 바로 오랫동안 유지해온 ‘귀향에 대한 염원’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

지식인으로 자부하는 이들 앞에서 양커 교수는 매번 숱한 유혹과 갈등의 시험대에 오른다. 그의 선택과 행동이 곧 지신인의 실천이자 정신의 지표인 셈이다. 그가 부딪히는 심판의 문들 앞에서 해나가는 그의 선택이 이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가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이들에게 오히려 무릎을 꿇는 행동은, 지식인으로서의 무기력과 나약함을 반증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단속이자 타인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기도와 같다. 이 주객이 전도된 자세란 얼마나 부조리한가. 자오루핑과 리광즈의 불손한 결탁 아래 펼쳐지는 교수사회의 횡포로부터 도망한 고향도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고향은 그에게 환락과 살인과 위선과 무기력과 허무의 얼굴로 뒤범벅된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고향에서 그는 링쩐과의 영혼혼례식에서 환상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환상처럼 링쩐의 관에 몰려든 한겨울의 나비를 본다.(이 경험은 「저자 후기」에서 옌롄커가 밝혔듯, 작가의 실제 경험이 녹아든 이 소설의 주요 장면이자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작가적 메시지가 담긴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고향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과 진실 이면 사이에서 방황하던 양커는 이제 진짜 시의 고향을 발견해내기 위해 떠난다.
특히 이 소설의 기이한 마지막 결말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고향 인근 황하 유역의 시성詩城에서 공자가 누락한 이백여 편의 시가 흩어진 바위와 돌을 발견해낸 양커 교수와 여기저기서 왜곡된 현실로부터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세계를 꿈꾸며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교수들과 아가씨들이 벌이는 오줌 갈기기 시합은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부조리(荒誕)하고 그로테스크(怪誕)한 서사미학의 결정이다. 그리하여 옮긴이 김태성은 “리광즈와 자오루핑이 만든 지식의 권력과 그 기제를 양커(어쩌면 옌렌커 자신)가 발견한 『시경』의 진실로 극복할 수 없는 아연한 현실에 대한 좌절을, 서른 명의 교수와 스물일곱 명의 창녀들이 만드는 그로테스크한 조합과 이들이 벌이는 오줌 갈기기 시합으로 ‘시원하고 방자하게 발길질한’ 것이 이 작품인지도 모른다”라고 일갈한다.
중국 언론에서는 ‘가오싱젠高行建이 중국 부조리극의 최고봉이라면 옌롄커는 중국 부조리서사의 정상이다.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형이라면 옌롄커의 이 작품은 중국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형이다’라는 말로 상찬했다. 일례로 중국 최고의 평론가이자 상하이 푸단대학의 교수 천쓰허陳思和는 옌롄커 문학에서의 부조리한 세계상에 관한 심미적 포착을 '괴탄怪誕 사실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옌롄커 특유의 서사, '부조리(absurdity) 현실주의'로 규정되는 옌롄커 문학세계의 결정적 한 수가 바로 이 작품 『풍아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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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옌롄커 장편소설 

양장본
옌롄커 지음 |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04월 30일 출간

목차

한국어판 서문 : 글쓰기의 반역

제1장 『하늘의 아이』
1. 『하늘의 아이』 p13~p16 / 2. 『하늘의 아이』 p19~p23 / 3. 『하늘의 아이』 p39~p43 / 4. 『하늘의 아이』 p43~p48

제2장 『옛길』, 『죄인록』
1. 『옛길』 p1~p2 / 2. 『옛길』 p7~p10 / 3. 『죄인록』 p9 / 4. 『옛길』 p17~p22 / 5. 『옛길』 p22~p32

제3장 『하늘의 아이』, 『옛길』
1. 『하늘의 아이』 p59~p69 / 2. 『하늘의 아이』 p91~p97 / 3. 『옛길』 p43~p51 / 4. 『하늘의 아이』 p98~p103 / 5. 『하늘의 아이』 p105~p111

제4장 『죄인록』 
1. 『죄인록』 p53 / 2. 『죄인록』 p64 / 3. 『죄인록』 p66 / 4. 『죄인록』 p70~p71

제5장 『옛길』, 『죄인록』, 『하늘의 아이』
1. 『옛길』 p69~p81 / 2. 『죄인록』 p129~p130 / 3. 『하늘의 아이』 p111~p115 / 4. 『옛길』 p100~p108, p133~p139 / 5. 『옛길』 p139~p145

제6장 『죄인록』 
『죄인록』 p140~p141

제7장 『옛길』, 『하늘의 아이』
1. 『옛길』 p187~p197 / 2. 『옛길』 p198 / 3. 『하늘의 아이』 p181~p183 / 4. 『옛길』 p199~p210 / 5. 『하늘의 아이』 p200~p205 / 6. 『하늘의 아이』 p209~p214

제8장 『옛길』, 『하늘의 아이』, 『죄인록』 
1. 『옛길』 p300~p309 / 2. 『하늘의 아이』 p261~p262 / 3. 『하늘의 아이』 p263~p269 / 4. 『죄인록』 p181~p183

제9장 『하늘의 아이』, 『옛길』
1. 『하늘의 아이』 p270~p275 / 2. 『옛길』 p317~p327 / 3. 『하늘의 아이』 p275~p281

제10장 『하늘의 아이』
1. 『하늘의 아이』 p282~p300

제11장 『하늘의 아이』, 『옛길』
1. 『하늘의 아이』 p305~p311 / 2. 『옛길』 p340~p347 / 3. 『하늘의 아이』 p312~p320 / 4. 『옛길』 p350~p359

제12장 『옛길』 
1. 『옛길』 p381~p386 / 2. 『옛길』 p386~p391 / 3. 『옛길』 p392~p400 / 4. 『옛길』 p401~p419

제13장 『하늘의 아이』
1. 『하늘의 아이』 p340~p350 / 2. 『하늘의 아이』 p391~p396 / 3. 『하늘의 아이』 p397~p406

제14장 『옛길』 
1. 『옛길』 p425~p431 / 2. 『옛길』 p431~p438 / 3. 『옛길』 p439~p457 / 4. 『옛길』 p457~p463 / 5. 『옛길』 p464~p475 / 6. 『옛길』 p476~p487 / 7. 『옛길』 p487~p493

제15장 『하늘의 아이』
1. 『하늘의 아이』 p416~p419 / 2. 『하늘의 아이』 p423~p427 / 3. 『하늘의 아이』 p427~p433 / 4. 『하늘의 아이』 p434~p440

제16장 『시시포스의 신화』

책 속으로

아이가 손에 닿는 대로 몇 권을 집어 들었다. 『외침』, 『파우스트』, 『파리의 노트르담』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정신현상학』에 불을 붙였다. 『신곡』, 『요재지이』에도 불을 붙였다. 여러 권을 불태운 아이가 발자크의 소설에 불을 붙이려다가 다시 책 더미로 던져 넣었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태우려다 책 더미로 다시 던졌다. 『죄와 벌』도 던져 넣은 뒤 두 청년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머지는 내 처소로 옮겨놔. 겨울에 불쏘시개로 쓰면 딱 좋겠어.”
책을 한 뭉치 옮길 때마다 아이가 중간에서 한 권씩 뽑으며 목청을 높여 물었다.
“이 책은 누구 거지? 자, 우리 99구에서 무당 600근을 달성하겠다는 게 많은 건가?”
또 한 권을 뽑아들고 물었다.
“600근이라고 책정한 게 높으냐고?”
이번에는 두꺼운 표지의 양장본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반동 중에서도 반동이군. 무당 밀 600근을 생산할 수 있겠냐고?”
정오 무렵이 되자 아이는 책을 전부 들었다 놓았고 질문도 끝냈다. 사람들이 모두들 기계를 들고 밭으로 나가 씨를 뿌렸다. / (『하늘의 아이』 36-37쪽)

위신구는 당시 감옥의 옥사와 분포도에 따라 일망무제의 황허 옛길에 본부와 지부를 설치했다. 그런데 각 지부와 토지는 1000무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1만 무가량 되는 곳도 있고, 죄인이 총 1만 8700여 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만 3300여 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화가 필요한 죄인이 총 몇 명이고 토지가 얼마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대략 2만 명이라고 추산되는 교화 대상자들은 90퍼센트가 교수, 학자, 교사, 작가 및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정부 지도층과 고위 관료였다. 우리 제99구의 경우 총 127명에 95퍼센트가 지식인이었다.
99구는 본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변경의, 가장 황허에 인접한 곳이었다. 황허 바로 옆이다 보니 도망자를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거친 황무지를 밟으며 10리, 20리를 가봐야 다른 위신구의 죄수들을 만날 수 있을 뿐, 외부 사람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위신구에서는 도피 혐의가 있는 죄수를 신고하면 1개월, 도망자를 잡으면 3개월의 가족 방문 포상 휴가를 주었다. 도망자 세 명을 잡으면 석방돼 원래 도시와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위신구의 모든 죄수들은 누군가를 고발할 기회를 기다렸다. / (『옛길』45-46쪽)

91구에서 돌아온 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 때도 이전과 달리 밥그릇을 든 채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과묵해졌겠습니까? 바로 91구의 혁명 공연이 아직도 더 많은 개조가 필요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에서 그들 모두에게 갱신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학자, 그는 강철 제련에 동의했다며 아이가 꽃을 줄 때 그 작은 꽃을 건네받은 뒤 기쁜 표정 대신 비꼬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멀어지기도 전에 들고 있던 꽃을 구겨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밟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누구 눈에도 띄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제가 그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꽃을 던져버린 뒤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고 그의 사상이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와 늙은 죄수 언어학자와의 아래 대화를 살펴보십시오.
“정말 믿을 수 없군요.” 언어가 오늘 공연에 대해 길게 탄식했습니다.
“미쳤어요! 이 나라가 미쳐가고 있어요.” 학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습니다.
“누군가 상부에 편지를 써서 이런 행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자 학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습니다. “제가 쓸 테니 서명하시겠어요?”
늙은 죄수는 국가언어연구소의 옛 소장으로 전 국민이 사용하는 사전과 자전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언어를 멀리했습니다. 의견을 묻는 학자의 눈길에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학자와 언어학자는 더 이상 한 마디도 섞지 않았습니다. / (『죄인록』 99-100쪽) 닫기

출판사 서평

중국 내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하고
전 세계 20개국에 판권이 팔린 비운의 걸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딩씨 마을의 꿈』 『나와 아버지』
옌롄커의 최신 장편소설!
“잊혀버린 역사 그리고 죽었거나 살아 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옌롄커)

중국 내 발행 및 판매, 게재, 비평, 홍보의 전면 금지. 21세기 중국판 금서(禁書)
옌롄커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독일, 베트남, 이스라엘, 싱가포르, 스페인, 일본, 스웨덴, 대만,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에 작품이 번역되었으며 사회와 불화하며 억압받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적극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가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중국의 혁명 전통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문예지 게재 즉시 중앙 정부에 의해 전량 수거당하고 발행과 판매, 게재와 비평, 홍보의 전면 금지, 소위 5금(禁) 조치를 당한 화제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통해 중국문학의 거장 옌롄커의 작품 세계가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된 이후 4년이 지났다. 2012년 봄, 옌롄커의 최신 장편소설 『사서(四書)』가 드디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 역시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있었던 정부의 지식인 탄압을 다루는 체제 비판적 내용으로 인해 2011년 탈고 이후 자국 내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하고 일본, 대문, 홍콩, 프랑스, 독일을 비롯해 해외 수십여 개국에 비평가와 에이전트들의 극찬을 받으며 판권이 수출된 비운의 작품으로 이번 자음과모음에서 출간하는 한국어판은 『사서』의 첫 외국어판이기도 하다.
작가 옌롄커조차도 ‘서랍 속 원고’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결국 쓸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이 장편소설의 무엇이 왜 그를 금지된 작가로 만들었는가? “중국에는 인민을 해방시킨 진짜 혁명도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처럼 미친 혁명도 있었다. 문학은 이런 잘못된 혁명에 대해선 질문하고 해체하고 비판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는 그의 이번 작품에는 ‘문화’를 개조한다는 명목하에 국가가 자행한 다양한 형태의 비극과 그로 인해 밑바닥까지 훼손당한 인간성의 절규로 가득 차 있다. 옌롄커의 문학 세계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린 채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사회비판적인 시선 속에 그대로 드러내되, 다채로운 상징과 비유 속에 그러한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서사를 펼쳐보인다. 이러한 그의 문학은 중국 당대문학이 결여하고 있는 현실적 비극에 대한 참회의식을 구현해내면서 오늘의 중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말살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어느 지식인의 처절한 글쓰기
문화대혁명 당시 황허 강변의 황량한 땅에 자리 잡은 강제노동수용소 99구가 배경이다. 이곳은 종교인, 교수, 예술가, 작가, 과학자 등 전국의 지식인들 중에서 ‘사상이 불충하다’는 중앙 정부의 판단하에 건전한 육체 노동을 통해 당에 충성을 배우고 사상을 개선하도록 보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99구의 감독은 아직 사춘기 티를 채 벗지 못한 공산당원 ‘아이’다. ‘아이’는 99구 죄인들을 서로 감시하고 밀고하기 위해 ‘홍화오성제’라는 제도를 도입한다. 99구 죄인들끼리 서로 감시하여 당에 불충한 행동을 했거나 금서를 지니고 있거나 그러한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아이’에게 밀고할 경우 붉은 종이꽃을 1송이씩 주는 제도다. 그 꽃을 125송이 모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증거”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 이후 ‘작가’는 종이꽃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죄인록』이라는 밀고서를 쓰는 한편 ‘아이’에게 『죄인록』을 쓰라고 받은 종이와 잉크를 일부 빼돌려 남몰래 자신의 최대 걸작 『옛길』을 쓰기 시작하는데……
옌롄커는 이 작품 안에서 말 그대로 사서, 즉 네 권의 책(『죄인록』 『옛길』 『하늘의 아이』 『시시포스의 신화』)을 액자 소설처럼 배치하여 각기 다른 등장인물과 각기 다른 글쓰기 장르를 넘나들며 서사를 진행시키고 있다. 미완의 장편소설, 일부 삭제된 정부 보고서, 미완의 철학 연구서 그리고 신화적 상징을 내포한 한 편의 장편소설을 겹쳐가며 문화대혁명 시기에 부정되었던 지식인의 존재 가치가 어떠했는지,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반문하고 파헤쳤다. 이 작품은 ‘문화’를 혁명한다는 이름으로 국가 차원에서 금지당하고 부정당했던 인민들의 기억과 기록을 문학적 언어로 복원하고 그들을 대신해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려는 작가의 노력과 믿음, 야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작이다.

| 『사서』 한국어판 저자 서문 중에서
저는 늘 제가 처한 ‘환경’에 맞는 출판이 아니라 제 ‘현실’을 반영하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소망해왔습니다. 그리고 『사서』는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모든 구애에서 벗어나려 했던 제 도전의 산물입니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아 자유롭다는 말은 잡다한 내용을 적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글을 쓸 때 정말로, 철저하게 어휘와 서술에서 자유로워져 새로운 서술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서술 질서’ 속에서 저는 필묵과 출판의 노예가 아닌 글쓰기의 황제가 됩니다. 저는 그렇게 ‘중국식 글쓰기’의 황제이자 반역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글을 마치자 예상했던 대로 이전 저작과는 완전히 다른 찬사를 받는 동시에 이전 저작보다 더 강하고 빈번하게 거부를 당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사서』 원고를 스무 곳도 넘는 중국 출판사의 동료들, 책임자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나왔습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단호하게 거부했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글을 쓰기 전부터 또 다른 ‘서랍 문학’이 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오히려 홀가분해졌습니다. 아무런 원망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제가 편집자자라도 이 변절적 성향의 소설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중국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중국식 현실일 것입니다. (옌롄커)

[책속으로] 추가

시시포스가 그렇게 불안에 휩싸인 채 매일 아침마다 정상에서 바위를 힘껏 밀어 내리면 거대한 바위는 황혼 무렵 다시 저절로 굴러 올라갔다. 하루하루 긴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더 이상 머리가 깨질 듯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힘껏 밀어 내리는 끝없는 순환과 반복에 적응하고 반대의 징벌을 성실하고 불평 없이 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형벌이 그의 육체와 영혼에 녹아들고 어우러졌다. 상호 간의 적응은 죄와 벌이 가진 힘과 냉혹함, 황당함, 그리고 죽음까지, 또 기름 떨어진 등불 같은 적막과 절망까지 변화시켰다. 그러다 지난번 길에서 아이를 만났던 것처럼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꼭대기에서 밀어 내리던 어느 날, 허리를 굽힌 채 힘을 주다가 시선을 바위 꼭대기 저편으로 옮겼고 산 밑의 초목과 집, 마을, 밥 짓는 연기와 어느 사원 입구에서 노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는 신의 형벌 너머로 산 아래 사원과 속세의 밥 짓는 연기를 보았다.
그는 사원과 속세의 밥 짓는 연기가 담긴 풍광을 사랑하게 되었다. / (『시시포스의 신화』 535-536쪽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생각의 시대’ 발간한 철학자 김용규 - 시·추리소설은 ‘생각의 도구’로 아주 유효”

[저자와의 대화]‘생각의 시대’ 발간한 철학자 김용규

글 정원식·사진 김정근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앞으로 필요한 건 지식 축적보다 사유능력… 시·추리소설은 ‘생각의 도구’로 아주 유효”

“지식의 종말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겁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사유 능력입니다.”

정보혁명으로 지식은 폭증했다. 지식은 지식인과 전문가의 손에서 빠져나와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갔다. 지식이 폭증하고 유통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식의 수명은 단축됐다. 지식이 접속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변하면서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점점 무의미한 일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지식들을 종횡으로 엮어내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1991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중을 위한 철학서를 써온 철학자 김용규씨(62)는 <생각의 시대>(살림)에서 “지식은 늘 새로 생겨나 자꾸 불어났지만 몇 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되어 왔다”며 앞으로의 교육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생각의 도구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사유 능력을 제공해주었던 생각의 도구들, 그리고 이후 2500년 동안 누적된 지식을 만들어온 시원적 도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리스일까. 저자는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그리스에 주목한다. 그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는 이집트인, 고대 바빌로니아인, 수메르인들보다 전반적인 문명의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시기에 ‘생각의 도구들’을 발명함으로써 앞선 그 어느 문명도 도달하지 못한 이성과 합리의 시대를 열었다.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국 문명은 학문보다는 종교적·도덕적 관심사에 집중했어요. 개인의 의견보다는 공동체의 화합을 중시했습니다. 반면 그리스에서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워 논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헤게모니를 잡는 풍토가 생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학문적 지식이 다른 지역보다 잘 발달했습니다.”

김씨가 말하는 생각의 도구란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를 가리킨다. 모두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발명했다. 책에 따르면, 서양의 모든 문명은 이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 역시 이 도구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이 최근의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교육심리학의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생각의 도구들 중에서도 으뜸은 메타포라(은유)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파악함으로써 생겨나는 은유는 사고와 언어의 근간이다. 김씨는 인지과학자 레이코프의 말을 인용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시간은 돈이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 표현에는 ‘시간은 소중하다’는 관념이 들어 있는데 이 관념은 다양한 은유적 문장들로 확장된다.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을 아끼다’ 같은 일상적인 표현들은 모두 은유에 기반하고 있다. 김씨는 은유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를 낭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시를 읽으면 감성을 기를 수 있다고 하지만 시 읽기는 단순한 감성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뇌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시를 암송하면 은유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뉴런 네트워크가 생깁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아르케(원리)는 우리가 자연과 사회 현상들을 예측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학문은 어떤 현상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원리를 찾아내는 훈련이 돼 있어야만 성립한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직각삼각형의 세 변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피타고라스처럼 하나의 정리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김씨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가추법’이다. 가추법이란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어떤 합리적 예측을 내놓는 것이다. 그는 가추법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리소설은 그 자체가 주어진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과 합리적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을 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씨는 생각의 도구를 연마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세 번째 생각의 도구인 로고스(문장)와도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 문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제 결론은 반대로 문장이 정신을 만든다는 겁니다. 한국 교육에서는 시나 추리소설을 공부 방해 요소쯤으로 생각하지만 ‘생각의 도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인 사고력을 기르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글 정원식·사진 김정근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판을 바꿀 한 곡이 없네

대중음악 블라블라


[임진모칼럼] 판을 바꿀 한 곡이 없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82104035&code=990100

며칠 전 몇 명의 음악관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 사람이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대중가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곡은 뭔가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조용필의 ‘바운스’, 아이유의 ‘좋은 날’, 엑소의 ‘으르렁’, 이승철의 ‘마이 러브’, 소유와 정기고의 ‘썸’ 등 제법 많은 곡들이 거론됐다. 누군가가 “그럼 그중 다시 듣고 싶은 노래는?”하고 묻자 곡 숫자는 확 줄었고 다시 그가 “후대에 남을 곡은 뭐죠?”라고 했을 때는 모두들 ‘글쎄’하면서 “생각해보니 정말 곡이 없네!”하고 혀를 찼다.

사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 곡이 후대에 기억될지, 역사에 남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나의 노래가 전설의 위상에 오르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먼저 대중들의 인지도가 있어야 하고 예술성, 화제성,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 전문가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동료 혹은 이후 세대 음악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중요하다. 당대에 크게 히트했다고 명곡으로 남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나도 극소수만 아는 곡은 배제를 당하고 시대정신을 담은 곡이라도 음악성이 떨어지면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 출처 : 경향신문 DB 


발표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후배 가수들이 자꾸 불러 현재시제를 확보한 곡은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는 이수영의 리메이크 히트로 다음 세대에게도 친숙해졌고 최근 아이유가 김창완과 함께 부른 산울림 왕년의 곡 ‘너의 의미’는 지금 음악인구와의 접점을 마련하면서 더욱 생명력을 높였다.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 있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하나 이상의 결정적인 곡을 보유하고 있다. 

신중현 하면 ‘미인’, ‘아름다운 강산’이고, 가왕 조용필은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등 지금도 팬들 기억에 확실히 자리한 대표곡들이 수두룩하다. 존 레넌은 ‘이매진’과 직결되고 이글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노래한 ‘호텔 캘리포니아’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굿 바이브레이션스’를 만들고 나서 “신이시여, 정말 제가 이 곡을 만들었나이까?”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중음악가에게 명곡은 명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곡 하나가 새로운 기원과 흐름을 만든 사례도 많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핫브레이크 호텔’과 함께 어른 주도에 종지부를 찍은 청춘의 로큰롤 시대가 활짝 열렸고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는 대중음악가들로 하여금 고전음악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으로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70년대 후반, 영국의 섹스 피스톨스는 무정부 상태를 갈망한 ‘아나키 인 더 UK’라는 곡으로 음악적 포스트모던의 탄생을 알렸다. 이 때문에 음악관계자들은 판세의 전환을 위해서는 확실한 곡 하나가 요구된다고 입을 모은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예로 들면 누구나 이 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한 국악 밴드의 리더가 지난해 미국을 방문해 한 음반사 간부를 만났다. 그와 대화 도중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느냐고 의견을 구했더니 그는 1초의 주저함이 없이 “원 그레이트 송!” 즉 좋은 곡 하나면 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앨범이 아니라 디지털 싱글이 대세다. 단 한 곡이 중요해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엄청난 수의 싱글들이 공개되고 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곡, 다시 듣고 싶은 곡, 후대에 남을 곡은 별로 없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한철도 아닌 며칠 장사의 풍조에 함몰되어버린 탓이다. 이러니 대중음악을 누가 예술이라고 치장해주겠는가. 서둘러 판세를 바꾸기 위해 작곡자와 제작자는 하나의 좋은 곡 생산을 위해 더 땀을 흘리고 소비자들도 피로감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양질의 곡에는 기꺼이 응답하는 수고가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릴 찰나의 곡들만이 판치는 이 허한 현실을 바꿀 길이 없다. 국면을 전환시킬 ‘원 그레이트 송’을 기대한다.

임진모 |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