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7일 일요일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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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들어가기 전에 살펴보기
-세계의 미술사조의 흐름-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Cvqj&imgurl=http://cfile208.uf.daum.net/original/1322160849632FA32AA3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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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조:다리파와 청기사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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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개최된 아상블라주 전시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최된 네오 리얼리즘The New Realists 전시회이다.
윌리엄 사이츠William Seitz가 주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콜라주와 사진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정크조각 그리고 전시장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네오 리얼리즘 전시회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으며, 영국의 피터 블레이크, 프랑스의 아르망, 크리스토, 이브 클랭, 다니엘 스포에리, 장 탱글리, 미국에서는 12명이 참여했고, 라우센버그, 존스, 워홀, 리히텐슈타인, 올덴버그, 짐 다인, 인디애나, 로젠키스트, 조지 시걸, 톰 웨설먼 등이 참여했다.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어 누보레알리즘Nouveaux Realisme(신사실주의)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가 1960년 누보레알리즘 선언문을 발표하며 이 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10월 27일 레스타니는 클랭의 아파트에서 클랭의 학교 친구 아르망, 다니엘 스포에리 등 도시의 쓰레기와 찢긴 포스터를 갖고 작업하던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들에 의해 누보레알리즘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레스타니는 선언문을 통해 “어떤 고귀한 장르와 특히 회화에서의 영원한 내재성”에 대한 믿음에 도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창조되는 세계의 사회학이라고 묘사한, 즉 “찢긴 포스터, 오브제의 흔적, 집안의 쓰레기 혹은 부엌의 잡동사니 등”에 관심을 기울게 했다.
누보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표방한 ‘사실주의자 realiste’는 정직한 재현을 뜻하는 전통적 의미의 사실주의와는 무관하다. 이들은 재현적인 회화와 추상 회화 모두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이젤화를 거부하고 대신 실제 현존하는 가공품 및 광선과 같은 신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종류의 미술품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 이 그룹은 북미의 네오 다다Neo-Dada에 상응하는 유럽의 경향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아방가르드의 주도권을 뉴욕으로부터 탈환해 아방가르드 미술의 온상으로 여전히 여겨지는 파리로 되돌리려는 최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비쳐졌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는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동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과는 구별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런 경향의 미학을 추구한 반면 영국과 미국 예술가들은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팝아트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팝아티스트들에게 제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더러는 네오 다다이스트라고 했고, 신사실주의자라고 한 사람도 있었으며, 공공주의자, 속물주의자Vulgarist, 간판쟁이Sign Painter, 새로운 미국 꿈쟁이New American Dreamer, 대중적 사실주의자Popular Realist, 사실존중주의자Factualist 등으로 부르면서 한결같이 유물론자쯤으로 간주했다. 이탈리아 평론가는 팝아티스트를 복수유물론자Polymaterialist라고 불렀으며, 프랑스 평론가는 신사실주의자라고 불렀다. 다만 영국 사람들만 로렌스 앨러웨이를 좇아 팝아티스트라고 불렀다. 네오리얼리즘 전시회는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공식화하는 의미를 남겼다.
http://cafe.daum.net/parkphotos/FZZU/64?docid=1KsZo|FZZU|64|20111212124021&q=%B4%D9%B4%D9%C0%CC%C1%F2 = 다다이즘

다다이즘과 네오다다이즘의 차이
네오다다이즘은 새로운 다다이즘이라는 뜻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추진된 전위예술운동.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로 불려졌다.
네오 다다는 형상을 부활시키면서 특히, 국기, 인쇄물, 달력, 사진 등을 그림에 적용함으로
써 주제를 세속화시킨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네오다다이즘은 모든 전통적 가치나 이성의 우위 및 예술의 인습적 형식에 도전해 미의 가치 체계를 바꾸려고 했다.

초현실주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r_kimpo&logNo=110113154812
추상표현주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3396a
앵포르멜 =http://blog.daum.net/boaca/2821231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의 가장 큰 차이점: 앵포르멜은 프랑스, 액션 페인팅은 미국.
비슷한 시기(2차 대전이 끝난 후), 비슷한 성향(자유롭고 즉흥적인 추상화)을 보인다는 점에서 같은 운동의 다른 명칭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차이점들이 있다.
앵포르멜은 기하학적 추상의 냉정함, 차가움에 반대하여 서정적인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추구했다. 자유롭게 선을 그린다든지 재료의 질감을 살린다든지 물감을 뚝뚝 떨어뜨려 어떤 '정형'을 부정하고 무정형(앵포르멜)으로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액션페인팅 또한 물감을 뚝뚝 떨어트리는 등(대표적으로 잭슨 폴록)의 유사한 기법을 보였지만, 액션페인팅에서 중점을 둔 것은 그림이라는 결과보다는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액션)이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절대주의 다다이즘에 대하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inhancolor&logNo=20144703284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http://cafe.daum.net/aigonzi/45d1/174?docid=Ndj6|45d1|174|20030403003202&q=%BE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elemi&logNo=60064237395&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DE%C6%F7%B8%A3%B8%E1

알프레드 바 Alfred H. Barr는 추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을 때 진정한 '추상미술' 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던 칸딘스키는 인간의 내적 필연성,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추상의 도래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연대신에 인간의 사유작용을 표현하는 것이 추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추상미술은 분명히 20세기의 발명이다.

추상은 1914년 제1차대전이 발발할 무렵인 1910-1913년 사이에 유럽에 감돌았던 전쟁의 기운과 함께 탄생되었다. 러시아의 말레비치와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제1차대전보다는 1917년에 봉기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추상회화를 탄생시켰다. 1930년대를 거쳐 형식적으로 관습화된 추상미술은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다.
표현적 추상은 ' 추상표현주의' 라고 명명되면서 미국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창조자에게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고 또한 관람자에게는 창조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절대논리의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의 유래는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추상표현주의' 용어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유럽에서 일어난 표현적 추상인 '앵포르멜' 운동도 포함되고, 더 넓게는 표현적인 느낌을 주는 추상 모두가 추상 표현주의에 해당된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정으로 미국적인 미술사조이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작가 개개인의 작품의 유사성이나 어떤 공통된 프로그램과 특정한 미술개념을 내보이기 위해 집단화된 미술그룹이 아니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선언서를 발표한 적도 없고 행동지침이나 전체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젊은 미술가들은 미국 미술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고 독자적으로 조형적 형태를 발전시켰다.
액션페인팅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캔버스 기능의 새로운 정의를 의미한다. 캔버스는 실재 혹은 허구의 대상을 재창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 각자의 행동을 위해 제공되는 행동의 장이 되었다. 액션페인팅은 신체를 통해 정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폭발하듯 분출되는 감정과 본능적 직관을 신체행위를 통해 캔버스에 표현하는 것을 '액션 페인팅'이라고 명명한다. 1952년 미술평론가이자 시인이었던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고 그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의도를 갖고 화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우연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위해 행동을 결정하고 화면과 관계를 맺는다.
잭슨 폴록이 추상표현주의의 발전에 미친 결정적 영향은 캔버스를 이미지가 탄생되는 '무한한 장'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회화의 공간은 화가, 물감, 캔버스 간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신체의 제스처에 의해 계속적으로 뿌려지는 물감의 분출은 화면을 바탕과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 복합적인 세계로 만든다. 화가는 화면의 구성을 정교하게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자유로운 신체행위 속에 내재된 무의식에 의해 회화의 공간이 결정되도록 내버려 둔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동양미술에 관심이 깊었다. 흑백의 대담한 색조, 여백의 존중, 힘찬 속도로 그어지는 선 등은 외형적으로 동양미술과의 접근을 가능케 했다. 극동의 서체 역시 팔의 힘과 속도감을 중요시 여긴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힘찬 기백을 보여주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에서 새로운 추상의 조형성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폴록의 격렬한 신체행위만큼 강렬하지만 또 다른 방향으로 액션 페인팅을 발전시킨 주요 작가는 네덜란드 태생의 미술가 윌렘 드 쿠닝이다. 그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1916년부터 1925년까지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26년 미국으로 온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자코메티를 연상시키는 인물화, 초상화를 그렸다. 그 후, 고르키의 친구가 되었으며 고르키를 통해 추상표현주의와 연관될 수 있는 젊은 미술가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1950년경부터 회화에서 주제는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다시 구상적 형상을 채택하였다. 그가 채택한 형상의 이미지는 '여인'이다. 쿠닝의 '여인' 연작은 성의 상징이나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여신을 연상시키며 또한 뭉크의 회화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 형상의 여인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추상표현주의자들 개개인의 양식은 독자적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장식용 회화가 아니라 거대한 캔버스을 사용해서 화가, 관람자, 회화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고 또한 벽화와 같은 개념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바라볼 때, 관람자들은 회화에 둘러싸여 마치 어떤 환경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관람자는 회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화면의 애매한 공간으로 인해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이 같은 추상표현주의 특성은 액션 페인팅과 1950년대에 크게 발전하는 색면파 화가들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색면파 화가들은 액션 페인팅 화가들과 달리 화가의 감정 혹은 본능적. 감성적 반응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정화시키고 절제시키면서 철학적 의미를 회화에 부여하였다. 액션 페인팅과 색면파라는 이 두 개념은 추상표현주의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불리던 뉴욕화파의 커다란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액션 페인팅이 신체의 제스처를 가지고 우리를 회화의 세계로 안내하였다면 색면파 회화들은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색면파의 대표적 화가로는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크리포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 아돌프 고틀리브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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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오면 뉴욕 화단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열기는 시들해지고 대중매체를 이용한 새로운 미술사조인 '팝 아트' 가 일어나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신진 세대들이 합류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탐구된다. 후기 회화적 추상화가들은 화면의 공간으로 착각될 수 있는 어떠한 깊이도 용납하지 않았고, 평평한 표면을 지닌 캔버스와 완전하게 일치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완전평면의 형태들을 지닌 자유로운 색채를 강조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를 계승한 제2세대의 아류들은 아니다. 엘즈위스 캘리 같은 화가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평면적이고 명확한 형태들은 몬드리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
전후에 파리 화단을 중심으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비견할 만한 미술운동이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뒤뷔페, 아르 브뤼라고 불리는 코브라 그룹 작가들, 알레친스키 등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본능을 원색과 거친 재료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찾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르통, 슈나이더 술라주, 마디외 등이 신체 제스처를 이용한 표현적인 붓놀림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표현기법에서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정신의 풍요로운 자유와 본능의 자발성에 의한 무정형의 형태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자 하였다. 그들이 탐구한 미술형식에 '앵포르멜', '타시즘', '다른 미술'이라는 용어가 붙었다.
앵포르멜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 추상의 차가운 면에 대응하여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었고,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타피에가 이를 앵포르멜(非定形)이라고 칭했다. 정해진 형상을 부정하고 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의 효과를 살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하였으며, 이후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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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추상미술의 탄생 - 미래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ss003&logNo=1401392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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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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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미술,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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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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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재로 들어가기
1960년대 이후
입체주의
여러 동향의 꼴라쥬
미래주의 행위예술 ........................................
미술작품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다다의 이벤트에 도전, 사진도 하나의 예술매체로 인정됨

1962년 아트포럼에서 열리는 ‘아상블라주미술’기획전의 새로운 예술에 비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과장 레스터 롱맨교수의 견해를 게재하며 비판함. 아래의 작가들의 작품 경향이 점점 주류문화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 바넷 뉴먼(앞장에서 참고), 이브클랭의 퍼포먼스
http://www.google.co.kr/search?q=%EC%9D%B4%EB%B8%8C%ED%81%B4%EB%9E%AD&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eDYGT4-2EsOciAeIydCWAg&sa=X&oi=mode_link&ct=mode&cd=2&ved=0CBwQ_AUoAQ&biw=1680&bih=855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 ‘모노그램’ ‘침대’
세자르의 조각
장탱글리의 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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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카프로
클레어즈 올덴버그
짐 다인
레드 그룸스 등의 해프닝작품들

-네오다다
로버트 라우센 버그와 제스퍼 존스- 일상에서 주제를 끌어내 특이하게 사용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offjflalfla&logNo=20068333614
그들은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 뒤샹은 그가 선택하고 구입한 미술작품이라 규정했던 대향생산물을 지칭-레디메이드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가장 초기의 레디메이드- 자전거 바퀴, ‘똥개 R. MUTT’라는 서명이 기재된 소변기 샘FOUNTAIN은 최악의 평을 얻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한 목적은 수없이 다양한 작품 들 가운데 미술작품의 고유성이라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술작품에서 찾는 어떤 것인가, 사물에 관련된 작가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아상블라주의 핵심적인 개념 2가지- 어떤 이미지나 사물을 모아 미술작품을 만들어도 원래 속해있는 일상적 속성은 그대로다.
- 작가가 개의치만 않는다면 예술창작과 무관한 재료와 기법들의 자유롭게 사용가능
아상블라주와 레디메이디의 차이
레디메이드는 큐비즘(입체파) 시대에 뒤샹이 도기로 된 변기에 ‘레디메이드’란 제목을 붙여 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이나 장소에서 옮겨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드디어는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만이 남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또는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짐승의 뼈 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으로 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상블라주와 레디메이드의 차이점이라 한다면 둘 다 기성품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아상블라주는 여러 개 잡다한 제품을 한데 모아 작가에 의해 물리적으로 재창조되는 의미가 강하고, 레디메이드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인 기능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정신적인 재창조의 의미다.

1950년대 중반-재스퍼존스의 ‘성조기’ -사물과 상징을 그렸으나 색 선 기하학적 형태의 배열로 봄.
-실제 성조기는 천조각에 여러 색이 칠해진 것으로 존스의 회화보다 더 실제적이거나 3차원적이라 할 수 없다. 사물성을 더 지녔다고 말할 수 없다.
-1950년대 후반
평범한 것에 대한 관심,,우연성을 수용하려는 의지 (인생사는 우연일뿐이라는 인식- 다다이즘의 유산), 시각정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추구 -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라는 두 가지 사조로 이어짐.

-1960년대 초: 라우센버그http://www.google.co.kr/search?q=%EB%9D%BC%EC%9A%B0%EC%84%BC+%EB%B2%84%EA%B7%B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hUAGT9m3KqGTiQfGpu2-BQ&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wQ_AUoAQ&biw=958&bih=847
페인팅작업에 이어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한 이미지+손으로 그린 표시한 연작시리즈 ( 이런 이미지는 미술의 역사, 대중매체로부터 가져온 것, 신문 뉴스의 이미지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됨
팝아트- 1960년대 초엽 인정받는 미술사조
-앤디워홀,
-클레이즈 올덴 버그,
-톰 웨슬리만,
리히텐 슈타인은 만화속에서 하나의 프레임을 선택한 뒤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을 가하여 확대한 다음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하였다. -창조적이기보다 면밀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그려짐. 회화적이고 자유분방한 추상표현주의 방식으로 하지 않고 만화원판에 인쇄된 망점을 캔버스위에 하나하나 옮겨 그렸다. 감정의 배제로 해석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브레드, 나는 네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알고 있다’와 같은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미술에 대한 생각이 확실하다.

--1962년 팝아트 심포지엄
-대중잡지, 클로즈업 영화사진, 빌보드 뮤직쇼 TV를 통해 안방까지 파고든 방송 이미지는 파급효과가 크고 지속적이며 강제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미지로서 사회와 미술가들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
-팝아트가 형식면이나 내용면에서 새로이 이바지한 것이 있는가
-제임스 로젠 퀴스트의 ‘포드와 함께 사랑해’, ‘F-111’에서 보듯이 예술적 상표가 되어 버린 스파게티 통조림은 잭슨폴록의 작품에서 보듯 얽히고 설킨 물감흘리기를 연상한다
-앤디워홀의 수프깡통, 코카콜라 병 화폐 뉴스사진유명인과 같은 모티프의 반복도 존스가 알파벳과 숫자로 이미 시도한 방식이다. 존스는 캔버스의 중심에 핵심이 되는 주제를 위치시키고 나머지는 주변으로 퍼져나가게 놓는 구도대신 캔버스의 모든 부분을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추상표현주의에서 제기된 문제점의 해결책)
-왼쪽모서리부터 오른 쪽 바닥까지 숫자열을 배치하는 방법도 마찬가지
-앤디워홀- P18면의 ‘혼자하세요, 꽃’ 그림은 캔버스 화면을 숫자놀이 세트처럼 그려서 존스를 비꼬았다.
-벽에 걸린 좁은 선반에 켐벨수프깡통을 32개 전시하거나 콜라병, 저금통장용 스탬프 화폐이미지 반복-상품과 같은 미술작품이라는 개념강조 . ‘브릴로 상자’에서 그러한 개념을 확고히 드러냈다.

-1963년 앤디워홀의 인터뷰
죽음에 대한 이미지에 심취되었다 밝힘
-타블로이드판에 실린 재해사진, 자동차사고 희생자, 전기의자, 인종폭동, 북미지역 1급살인 현상수배범, 남편의 사별을 겪은 재클린 케네디의 슬픔, 그 당시 자살한 마릴린 몬로, 그 무렵 몹시 아팠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얼굴은 앤디워홀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이미지였다.
-휴일에 라디오를 켤 때마다 한결같이 400만명이 죽게된 것이라는 식의 소식에 영감이 떠올랐다. 아무리 끔찍한 장면이라도 반복되면 그 장면에 무감각해진다는 것, 반복된 속보는 즉시성이 떨어지고 보도하는 매체로 흡수되어 버린다.
-뉴스와 미디어는 편재하며 평등하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미래에는 누구나 잠깐의 유명세를 누린다.우리 모두는 코카콜라를 마신다. 미국대통령이라 해도 길거리 부랑인보다 더 좋은 코카콜라를 마실 순 없다.
-미술이 수프깡통, 비눗갑, 시리얼 상자와 같이 상품같이 여겨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라 불렀다. 도와주는 조수들을 공장 조업라인에 비유했다.
하지만 리히텐 슈타인처럼 제작방식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행위였다. 이미지 색채선정, 실크스크린인쇄과정에서 나오는 수와 같은 부분을 어떻게 작품 속에서 정확하게 도입시킬까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이는 워홀이었다. 팝아트의 주제가 진부하다는 것은 비평가들에게 하나의 모독이 되었다. 재료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 작품으로 탄생, 미술이 인생에게 주지 못한 것을 준다고 말한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했다.

-팝아트의 형식적 기원-추상표현주의다. 
앞선 동향들과 소통을 위해 앞 세대에 반발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계승하기도하면서 세대간의 긴장관계를 생성해 냈다.
로젠퀴스트의 스파게티 통조림-잭슨폴록 환기
리히텐 슈타인-현대미술의 유산을 재포장하면서 신선함을 재공했다.
http://www.google.co.kr/search?q=%EB%A6%AC%ED%9E%88%ED%85%90+%EC%8A%88%ED%83%80%EC%9D%B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1kMGT_iPI_CSiAf8lpTOCA&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CMQ_AUoAQ&biw=1680&bih=855

-1961년 클레이즈 올덴버그
이전에 상점에 쓰였던 작업실을 다시 상점으로 환원시킴. 철사틀로 토대를 만들고 석고에 적신 모슬린을 붙여 추상표현주의적인 채색모형들을 진열해놓고 그것을 팔았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논의와 조각의 기능성을 논하는 미술동향을 가져왔다. 연재만화를 이용하는 리히텐슈타인도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기존미술의 페쇄된 서술방식을 일상생활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올덴버그 상점에서 팔리는 각각의 품목들은 다루어지는 방식에 따라 올덴버그의 조각작품이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서 집으로 가져갔고 그것들을 마치 조각작품인양 취급했던 것이다. 자잘한 물감얼룩으로 채색된 것이 아니라 색채가 물질 그자체가 되어버린 새로운 조각품들은 그것의 모델이 되는 사물과 실제로 크기도 비슷했다. 그의 실험작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에게도 놀라울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는 외부형태를 꿰매어 만든 다음 그속을 솜으로 채워넣었다. 그결과 전통적인 조각기법이나 조형틀 위에서 모델링하는 기법처럼 바깥쪽에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쪽부터 형태가 만들어졌다. 부드러운 재료르 사용했기 때문에 작품의 최종형태는 작가가 아니라 작품의 무게중심이 결정지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복제물 조각들은 비구성적인 것이었다. 또한 올덴버그는 조각의 부드러운 속성으로 조각에 회화적 요소를 가져왔다. 이는 딱딱한 형태에 희미하게 만들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하기이다.

팝아트는 북미지역의 현상이었다. 일종의 사회적 리얼리티를 다룬다고 볼때 그안의 구성원 그 리얼리티와 함께 전개되는 미국적 세계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팝아트는 미국적이다.
그러나 1950년대 영국에서 이미 사용되던 용어로서 리처드 헤밀턴 에두아르도 파울로치 나이절 핸더슨 피터 블레이크 등의 작품과 연관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에 초점을 두었으나 먼시각에서 미국문화를 바라보고 성찰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미국팝아트의 역동적인 개방성과 비교하여 고루해보인다고 평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업은 팝아트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업들이었다. 그후 영국의 리처드 스미스 애런 존스, 데릭 보시어 , 피터 필립스, 미국출신의 키타이, 데이비드 호크니 등은 매스미디어나 주변도시거리에서 발췌한 조형적 소재를 사용했다.

제니퍼 존스와 데이비드 호크니: 폴 헉슬리 존 호일랜드처럼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동시대 작가들과 가까웠다. 캔버스크기를 최소화할 것을 권장하거나 평면성을 강조한 미국 후기 추상표현주의의 조류에 맞춰 캔버스가 벽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돌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호크니: 추상적 요소와 구상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혼합, 낙서화적인 표시, 십대들의 언어를 이용항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표현했다.-p28 -[서로 달라붙어있는 우리 두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를 통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다녔다.
http://www.google.co.kr/search?q=%EB%8D%B0%EC%9D%B4%EB%B9%84%EB%93%9C%ED%98%B8%ED%81%AC%EB%8B%88&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jEQGT6iuIY-hiQf2zMmgDg&sa=X&oi=mode_link&ct=mode&cd=2&sqi=2&ved=0CB8Q_AUoAQ&biw=958&bih=847
리히텐 슈타인의 [왐wbaam]은 올덴버그의 [상점]처럼 시간과 운동의 문제에 몰두했다. 미사일의 발사와 폭발이 다른 시간대의 사건이나 시간의 이동성이 작품속에서 통합되어 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는 구성주의에서의 일반적인 관심, 나움가보의 초기 움직이는 조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발전했다. 드니르네 화랑을 중심으로 확산, 다양한 문화권의 작가들이 모이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아감,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르 파르크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라파엘소토 스위스의 장탱글리는 동력으로 움직이든 아니든 움직임과 관련된 작품을 제작[p30 –17]. 1950년 말 소토의 [진동구조], 1960년 말 제작된 [모호한 공간을 가진 큐브]에 이르기까지 환경적 영역은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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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컬 아트-옵아트 op옵은 팝아트의 팝pop과 의미상 유사성을 가진다.
패턴으로 된 화면에 대한 관심, 헝가리 출신 빅토르 바사렐리 프랑스인 프랑수아 모렐레, 미국의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치, 뒤샹이 혐오했던 미술, 오로지 망막을 자극하는 미술로 퇴행한 것처럼 보인다. 바사렐리(p30-18의 행성의 민속)의 격자무늬, 라일리의 (p31-19트위스트)작품에서 볼 수 있는 흑백선들에 의한 현란한 효과는 팝아트보다 물리적이다. 옵아트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움직이는 환영이 마치 자신들의 육체적인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키네티즘kinetism 루미니즘luminism은 암스테르담의 헤르만 더프리스, 뒤셀도르트의 하인트 마크, 오토 피에네 귄터 웨케르(p32-20크레이스, 크레이즈)가 속해 있었다.
빽빽하게 못이 박힌 웨케르의 패널작품은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빛이 사라졌다 분산되었다 했다. 이탈리아 루치오 폰타나가 빛과 공간의 예술이라고 정의 내린 전후공간주의 와 유사하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p33-21 두사람)와 마리오 메르츠는 1960년대에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팝아트와 비수하게 거울로 된 평면에 사람들을 콜라주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남자]나 [두사람]과 같은 작품을 볼 때 관람객들은 스스로 묘사된 인물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프랑스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아르망 다니엘 스포에르리 이브클랭, 세자르 니키드 생팔, 장 탱글리의 작업을 영국의 팝아트와 차별화하여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이라고 명명했다. 용어적 구별은 이념적 싸움의 전술이었다. 1950년대 열린 미국 작품 순회전시회들은 뉴욕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이에 레스타니는 팝아트를 포함한 상위개념으로 누보레알리즘이란 용어를 만들어 문화권력의 중심지가 변하지 않았음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의도였다. 그는 심지어 리히텐 슈타인이나 앤디워홀의 눈속임기법을 터무니없는 시도, 용두사미로 끝날 시도라 부르며 2,3년이면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누보레알리즘은 1960년 밀라노전시회를 계기로 생성됨. 탱글리 아르망 클랭, 레옹앵스 자크 드 라 빌글레의 작품들이 생성되었다, 특히 앵스와 드 라 빌글레(p36-24 분노)는 찢어진 포스터 조각으로 꼴라쥬를 제작, 오랜 시간 비바람에 방치된 듯한 흔적을 재생하고자 의도적으로 조작했다. 미국작가와 프랑스작가의 차이는 세자르(p35-23노란색 뷰익)와 존 체임벌린의 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은 모두 낡은 자동차이다. 그러나 세자르는 차량파쇄기를 이용하여 자동차 압축조각을 만들었지만 체임벌린은 쿠화재 혹은 [루시 핑크 양](p35-22 )같은 구부러지고 접힌 철판을 추상조각을 제작하는 데 이상적인 물질처럼 사용하고 있다. 차체금속은 잘 휘어지지만 원형을 유지하며 색깔도 남아 있어 얼마간의 회화적인 효과를 연출해준다.

클랭의 전시회
[텅빔]은 물의를 일으킴, 화랑을 찾은 이들은 텅빈 공간을 직면했다. 2년 후 [꽉참]전시회에서는 유리상자안에 쓰레기를 가득채워 ‘쓰레기통’을 확장하는 의미로 전시장 안에다 여러대의 수레에 담긴 쓰레기를 쏟아붓는 작업을 했다.
다니엘 스포에리의 [다리미]와 같은 아르망의 [덧그림]연작은 위에 쌓인 오브제나 내용물을 그대로 식탁 패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아르망의 많은 아상블라주작품들은 똑같거나 유사한 오브제들로 유리케이스를 채우는 방식이었다.
[아르테리오스 클레오즈p38-26]은 포그와 스푼으로, [철제]는 여러 종류의 가스 버너로 만든 것이다. 야요이 쿠사마의 [항공우편기스티커 p38-25], 워홀의 눈속임기법적인 그림[유리취급주의], 누보레알리즘 작가 마르시알 레스 밈모 로텔라 , 크리스토 잔클로드 의 오브제 포장 작업- 초현실주의 작품의 원형인 맨레이의 [이지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의 맥을 잇는다

-미국에서 해프닝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행위가 환경으로 확장된 것임을 보여준다.

-누보레알리즘에서는 쇼맨십이 강하다. 누보레알리즘에서는 작가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중요하다. 클랭이 특정 푸른 색 안료를 자신의 고유한 색인 인터내셔널 클랭블루라고 지칭한 후 그 푸른 색 물감을 몸에 묻힌 누드여성을 클랭의 지시에 따라 캔버스 면에 몸을 굴리면서 자국을 남기는 작업 [인체 측정학]연작이 있다. 아르망의 분노는 사물이나 도구들이 과격하게 파괴되는 장면을 포착하고자 부수어진 사물의 파편을 화면구성속의 조형요소로 고착시켰다. 폐품기계들로 만든 탱글리의 움직이는 조각은 스펙터클한 효과에 초점을 맞추었고 니키드 생팔은 총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물감을 분사했고 클랭은 불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워 미술가는 자신이 미술가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것이라도 미술로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했던 뒤샹의 주장을 빛내주었다.

피에르만조니모델에 직접서명하여 모델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 자신의 대변을 캔에 담아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판매하기도 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만든 [미술가의 숨결 p39-27]은 유리병을 사용한 뒤샹의 작품[파리의 공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영국의 존 레섬
아르망의 [분노p36-24]에 맞서 스프레이식 분사기에 약한 힘을 가하는 기법으로 순간적인 드로잉작업을 시도했다. 아르망의 작업은 단지 완성된 이미지가 아닌 단지 미니멀리즘적인 사건의 흔적이다. 아르망의 인체측정학을 연상시키는 존 래섬은 책을 사용해 조형구조물과 아상블라주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상불라주 작품의 세부는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여러 형태로 배열할 수 있다. [위대한에스테이트아저씨]는 여러 장의 판으로 이루어진 표면에 책들을 고정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채색된 페이지들이 철사 스프링으로 엮여 넘겨볼 수 있도록 고정되어있어 3가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유동적인 것은 스웨덴의 외빈드 팔스트룀의 ‘다양성의 회화’에서 볼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자석 경첩이 부착된 만화형의 조각들이 표면에서 움직이면서 다른 형태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게임처럼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사항을 팔스트룀은 그림을 만드는 기계장치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우연성과 작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결합시킬 수 있었다.
-팝 아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쓰기 시작하는 데 신문에 실린 재난과 죽음의 기사 화려한 것에 몰두하는 워홀의 태도는 리히터의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 [올림피아 p40-29 ]와 연쇄살인범에 살해된 [8명의 수습간호사]. 리히터와 폴케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아이러니는 독일 미술만의 정치색이 느껴진다.

-독일작가 브레머는
보스텔의 작품과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이미지작품들을 대조하면서 “라우센버그에게 케네디[p13-5]는 얼룩진 색깔뿐이다. 그러나 보스텔의 케네디 [베를린 피베르p45-33]는 정치가이자 정치적 배경속에 자리잡은 인물로 라우센버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라고 말한다.

리히텐슈타인이 피카소와 모네를 시사만화처럼 묘사하고 추상표현주의다운 시도를 할 때 폴케는 [모던 아트 P43-31]를 발표했다. 얼룩과 낙서로 이뤄진 추상적 구성은 흰색의 경계선으로 채색되어 있고 추상화가 아니라 한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그림 맨 밑 부분 가장자리를 따라 작품 제목이 씌어 있다. 작품은 모던 아트임과 동시에 우리가 결국 부딪쳐야할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해주는 소중한 지침이었다. 다양한 천들을 화면에 사용하여 갤러리라는 고상한 공간속에서 감상할 때 실생활을 생각나게 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onodonsu&logNo=100009572474&viewDate=¤tPage=1&listtype=0시그마 폴케

-볼프 보스텔 -
화보잡지에서 사진을 골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기법을 사용했다.[콘트리트스레이브] 정치적으로 분단된 독일과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는 플럭서스 회원이 된다. 그의 [US F-111]은 분단된 정치적 현실을 담은 작품.
나는 일상에서 행동형에 대한 규칙이 어떤 모델의 행동으로부터 얻게 되는지 또 내 안에서 생겨나는 충동이 일상생활에 적용되어 편안함, 어리석음, 억압과 맞설 수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의 전위적인 미술의 한 방향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플럭서스라는 용어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1962년 독일 헤센주(州)의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특히 플럭서스는 처음에는 미술에서 출발하였으나, 곧 예술의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콘서트·이벤트·출판물·선언문 등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脫)장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흐름의 주요 참여자로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등. 미국의 해프닝과 다다이즘의 생각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미술 음악 문확을 넘나들며 작업을 했으며 상황주의 운동과도 긴밀했다. 이사조는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사회적 조건을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의 방법을 꾀했고 자신들의 성격을 드러냈다.
http://www.google.co.kr/search?q=%EC%9A%94%EC%85%89%EB%B3%B4%EC%9D%B4%EC%8A%A4&hl=ko&newwindow=1&prmd=imvns&source=lnms&tbm=isch&ei=LokGT6z3M4idiALC_7RL&sa=X&oi=mode_link&ct=mode&cd=2&ved=0CCEQ_AUoAQ&biw=1280&bih=823요셉 보이스
상황주의 네오다다이즘적인 취지를 담고 있다. 보스텔의 플럭서스활동과 그가 만난 요셉보이스는 노골적인 정치성을 띠고 있다. 리처드 해밀턴은 영국 국내정치를 해부해댔다.

[거대한 런던]은 신문에 실린 믹재거와 마약복용혐의로 체포된 미술상 로버트 프레이저의 사진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과연 그 시기에게 자유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키엔홀츠의 작업은 매춘, 낙태, 궁핍과 같은 생의 어두운 단면들을 중심적인 위치에 가져다 주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ah0502&logNo=130083924014
앤디워홀 [은빛재난: 전기의자 p46-34]에는 단색패널과 이미지를 함께 사용해 추상회화가 계속발전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사회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했다.

모리스 루이스
[펼침]연작에서 느슨한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물감을 대각선방향으로 흘리는 기법을 사용했다. 자르고 펼치는 작업으로 그림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베타엡실론]과 [오미크론 p47-35] 잭슨폴록의 흘리기기법과 색칠을 하지 않는 캔버스에 물감을 침투시킨 얼룩으로 하나의 통합된 평면을 창출해낸 헬렌 프랭컨 탤러의 영향을 받아 철저하게 평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붓놀림이 아니라 중력의 영향으로 물감을 흐르게 하는 기법이기에 내용이 부재한 이미지.http://blog.daum.net/leeys6870/5643307
http://www.google.co.kr/search?q=%EB%AA%A8%EB%A6%AC%EC%8A%A4%EB%A3%A8%EC%9D%B4%EC%8A%A4&hl=ko&newwindow=1&prmd=imvnsul&source=lnms&tbm=isch&ei=losGT5CZOuWRiQLXgbFR&sa=X&oi=mode_link&ct=mode&cd=2&ved=0CCIQ_AUoAQ&biw=1280&bih=823

케네스 놀런드도 [노래p47-36] 평면효과의 강조를 위해 캔버스에 밑칠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붓질은 보이지 않고 새로 나온 아크릴 물감의 밝고 직접적인 색깔을 사용되었기에 추상표현주의의 행위적 색조와는 차이가 있다. 놀란드의 평면적인 추상화는 모더니즘의 궁극적인 자기실현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회화가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을 실현했다, 그후로 회화는 조각의 특징인 3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앤서니 카로는 쓰레기로 만든다 해도 유럽미술에는 순수하게 미술적인 요소가 있었다. 미술에는 어떤 장벽도 없고 규칙도 없다는 것을 미국미술이 보여주었다.
그는 강철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판과 빔, 막대기, 튜브 등을 용접하여 조각작업[ 대초원 p51- 39]에 들어갔다. 추상작업들이며 각부분의 전체적인 형태안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완성된 조각품을 단색으로 채색하는 기법을 통해 단일 형태 강조

루이스와 놀런드의 뒤를 이은 카로는 다채로운 조각들은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 되었다.
카로의 작품은 같은 현대미술사조인 미니멀아트와 공유되는 점으로 작품을 바닥에 직접 설치했다. 전적으로 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조인 미니멀리즘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다른 수단을 이용한 회화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본테쿠는 사각형의 그림틀을 유지했지만 그틀 안에 금속판과 철사로 테두리를 만든 무제평면들을 구성했다.

엘즈워스켈리의 캔버스는 무광택컬러로 뚜렷하게 구분된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렌지/초록 p48-37] 회화인지 조각인지 모르는 것 대신 조각과 회화를 망라했던 피카소 데이비드 스미스 바넷 뉴먼의 노선을 따랐다.

-미니멀리스트는 주로 도널드 주드 로버트 모리스, 댄 플래빈 칼 앙드레 등을 가르켜 경멸적으로 부른 이름이다. 여기에 로널드 블레이든, 로버트 그로스베너, 래리 벨 쥬디 시카고 토니 드랩드를 포함시킬 수 있다..
뒤샹이 사물을 가르쳐 ‘레디메이드’라 칭한 사건과 러시아의 카시미르 말레비치가 흰배경에 검은 사각형 하나를 전시한 사건이 미니멀리즘의 역사적 축을 이룬다.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거부다. 뒤샹은 미술작품의 유일성과 미술작품이 일상사물과 구분된다는 관념을 거부한 것이고 말레비치는 미술은 복잡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한 것이다.‘
도널드 주드는 [특별한 오브제]라는 평론에서 당시 만들어진 작품들은 회화로도 조각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미술을 3차원 작품이라고 불렀다. 그린버그는 미술가들이 3차원에 몰두하는 것은 3차원이야말로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을 나누는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앞선 세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은 감정적이고 표현적인 내용으로 가득차보였지만 미니멀리즘은 단조로운 색상에 제품을 설계한 듯하고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잭슨폴록이나 웰렘 드 쿠닝의 작품을 가르켜 ‘충만해 있다’고 평가했다면 상대적으로 평평한 사각형합판 한 개가 전부인 모리스의 [무제 p55-41, 42]의 황량함이나 벽돌을 바닥위에 늘어놓는 앙드레의 극단적인 단순함, 나무상자같은 구조물에 자신이 좋아하는 붉은 색을 온통 칠해놓은 도널드 주드의 제목없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투박함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주드는 이런 무미건조한 미술의 외양은 기존의 미학적 관점이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작품이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를 띠는 것은 구성적인 효과를 이용하지 않으려 함이다. 구성을 하게 되면 작품 속 부분들 사이의 내부적 관계가 강조되는 나머지 작품이 전체적으로 갖는 효과가 반감된다. 주드는 [무제]에서 가로놓인 막대와 그 아래 일정하게 달린 물체들을 감상자가 하나의 전체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 {게티의 무덤 p55-43]은 화폭에 그려진 검은 띠 모양의 패턴이 캔버스모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게티의 무덤]을 보면 일단 캔버스의 크기 표식들을 구성하는 원리가 결정되면 그 다음 작업은 붓의 한획 한 획 가지런히 맞추어 그림을 제작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엔 합리적이고 내재해있는 질서가 아니라 순서대로 연속된 무언가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질서인 것이다. http://blog.daum.net/misulmun49/15961489
구성적 효과를 배제하는 것은 그 자체에 유럽적 전통구조 가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와 조각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들을 반복한다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지 최신의 진보된 형태를 개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다.

바넷뉴먼은 단색의 평면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지나가는 줄무늬를 표현한 [하나됨]은 형상과 배경의 관점에서 그림을 보았던 기존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의 짚zip이라는줄무늬는 평면을 분할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줄무늬가 공간성을 지니는 한 그 거대한 물리적 크기는 관객을 압도하게 된다. 6미터에 달하는 작품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p59-44]은 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감상자를 둘러싸는 일종의 채색된 환경을 제공한다. 이런 환경적 특성은 1960년대에 점차 중요성을 띤다.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의 뿌리는 미국의 실용주의 전통이라고 보았다.
찰스 실러나 찰스 더무스의 회화와 사진에서는 미국의 공장풍경이나 가족생활 모습에서 영웅주의를 찾으려는 시도가 드러난다.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기법을 쓴 워홀이나 환영주의를 꺼리는 주드의 성향과 맞물려 있다.
주드는 사실에 대해 충실하다. 실용주의에서 진리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물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거나 지시하여 얼마나 비슷하게 묘사했느냐가 아니라 메타토를 맏고 있지 않으며 어떤 형이상학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무제로 불리는 작품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일단 이름이 붙으면 그 이름에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랭크스텔라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니멀리즘은 비구상적 비지시적 추상성 때문에 종래의 미술감상기법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 삐딱한 묵묵함 뒤에는 다른 요소들이 있었다. 작품에 있어. 주드는 철 강철 구리 알루미늄등으로 얇은 두께로 높은 강도를 유지하여 의도한 모양과 크기로 제작하여 정교하게 만들기도 쉬웠다. [영구설치 작품 p63-46] 이들 재료의 표면은 목재보다 다양한 색깔을 띠거나 입힐 수 있었다. [무제p62-47]에 이용된 호박색 유리는 아예 재료자체가 색깔을 띠고 있어 표면에 색을 입힐 필요가 없었다.

댄플래빈은 어디에도 색깔을 입히지 않았다. 플래빈은 1961년 처음 만든 구조물에서 전기 불빛을 이용했고 형광등을 이용했다. 그는 기존관념에 도전했다. 네온관과 부속품을 구입하여 재료에 작가가 개인적으로 손댄 자국이 전혀 남지 않도록 했다.

작가의 ‘부재’는 주드와 솔 르위트 등에 가서는 아예 작가의 주문대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대신 제작하게 하는 방식에 이른다.
작품자체는 유일하지만 작품을 실제로 만든 사람은 작가가 아니다. 네온관과 부속품 등 물리적인 존재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플래빈의 재료는 이들이 발산하는 여러 가지 색의 빛 그 자체이다.[명목p61-45]에서는 형광등을 수직 배열하여 뉴먼의 zip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품제목을 보면 전체는 필연성 없이는 나누어 질 수 없다라는 철학자의 유명한 면도칼 비유를 이용하여 미술 창작의 문제를 순수하고 추상적인 색채라는 기본요소로 환원시킨다.

미니멀리즘은 카로의 구상적 조각과 많은 점에서 다르나 받침대로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마치 회화에서 액자와 같이 조각의 받침대에서 작품을 고립시키고 작품을 어떤 별개의 미적 공간으로 가져가 그것에서만 감상하게 한다. 바닥위에 놓인 작품은 따로 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감상자의 물리적 공간내에 놓인 여타의 물체와 다른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벽돌 목재 금속 재질의 판으로 구성된 칼 앙드레의 작품은 작품과 바닥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작은 물체들을 단순하고 규칙적인 형태로 배열한 앙드레의 조각은 주드가 ‘단순한 나열’이라고 지칭한 비합리적인 질서의 고전적 형태다. 137개의 벽돌을 바닥 위에 한줄로 나란히 놓은 [지레]에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박자는 주드나 워홀같은 팝아티스트들이 즐겨다루었던 주제다. 워홀은 ‘왜 깡통을 그리느냐 는 질문에 내가 많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이십년 동안 매일같이 같은 메뉴룰 먹었다. 똑같은 것을 매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먹었다.

1961년 앙드레는 폴리스트렌조각들을 이용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조각들은 튼튼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간단한 이음매역할만 하는 것을 끼운 채 고정되어 있었다. 앙드레는 이후에는 구성단위를 나란히 단순배열하는 방법을 취한다. p66-49, p67-50]에는
[37점의 작품p67-50]은 36개의 서로 다른 작품을 한데 모아 37번째 작품을 형성한 것으로 대단한 장고나을 보인다. 작품을 몸전체로 경험할 수 있도록 관람객은 이들 평면위를 걸어보도록 되어 있다. 작품의 촉감 금속의 고유한 밀도 소리 걸을 때의 마찰 등이 모두 작품이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요소다.

뒤샹은 망막적인 시각미술에 대해 비난하였다. 종전에 있던 좋다 나쁘다는 평가도 새로운 기준에 의해 내릴 필요가 있다. 주드는 칸트의 합리주의 전통에 반기를 들며 예술 작품은 재미있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은 tv가 흥미를 관람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가고 있다. 예술은 일상적인 사물을 닮아가야할 뿐아니라 관객이 예술을 구경하는 방식도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
주드가 미술작품을 ‘하나의 것, ’전체의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유사하게 모리스도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조각은 게슈탈트적 사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각은 형태가 단순하여 전체적인 모양을 감상자가 즉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blog.naver.com/sotong/40011748864

그림을 들여다보는 경우 감상자는 작품이 제공하는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을 초월했다거나 시간밖에서 일어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 반면 모리스의 [무제 p68-51]앞에 선 감상자에게는 전혀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주장에 반대한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내부를 구성하는 요소간의 관계를 따질 수 없기에 종래의 예술과 같은 방식으로 작품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프리드가 주드나 모리스의 작품을 무의미하다고 비판한 것도 그 상자같은 공허함 때문이기보다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미닐멀리즘의 경우 관객이 아무리 이작품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작품을 들여다보아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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