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다산의 재발견 - 다산 평전

다산 평전

 
2014-06-0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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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국내도서] 다산 정약용 평전
저자 박석무
출판사 민음사 | 2014.04.18
정가 30,000 원 판매가 27,000 원 ( 10% +10% P)
평점 내용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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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산(茶山)에 대해 체계적인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1999년 출간)에 실린 ‘도덕적 주체의 탄생’이란 글을 통해서이다. 이 책이 내게 전해준 문제의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산을 근대성 형성의 중요한 특이점으로 해석했다. 그는 다산의 경학(經學)을 현대인의 형성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학문으로 분류하며 다산을 전통 사회의 완전 폐지나 서구적 형태의 근대성을 주창하기보다 고대의 사유에 기반해 전통 사회의 개혁을 꾀한 인물로 설정했다.


한형조 교수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1996년 출간)의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완고한 성리학적 관념성에서 실천적 학문으로라는 뜻을 담은 이 책 이후 저자는 자신이 다산을 주자학과의 순전한 단절로 읽은 것은 사태의 일면 혹은 표면일 뿐 전모나 심층이라 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으며 이제부터는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을 했다. 박석무 교수는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여긴 다산의 면모를 전한다.(‘다산 평전’ 130 페이지) 관건은 다산 사상에 내재한 창조적 역동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 - 1800, 재위: 1776 - 1800)와 운명을 함께 한 다산은 우리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적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돋보이게 하는 고매한 인품과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실천적 안목을 함께 갖춘 최고의 지식인이다. 다산은 어려서는 영특했고 글을 잘 알았으며 커서는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다산은 자연의 풍광을 읊고 관조하는 것으로 문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에게 사회 비리와 구조악 척결에 관심을 두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경기 북부의 여섯 개 고을을 시찰한 경험이었다.


다산이 보낸 시대(1762 - 1836)는 백성들이 관의 착취와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달라고 함)에 시달리던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가 19 세기 중엽의 지식인에게 큰 관심을 갖는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다. 다산 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교수는 옛날로 회귀하는 것은 과거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진보와 통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은 1표 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으로 대표되는 다산의 학문적 성과와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의 평전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것이 역량 부족 탓이기에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산 평전을 찬양 위주로 썼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다산의 사상을 얼마나 창조적 역동성의 관점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는 다산의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눈다. 수학기(修學期), 사환기(仕宦期),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정리기(整理期) 등이 그것으로 28세까지의 수학기, 10년간의 사환기,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강진에 묶여있던 18년의 유배기(流配期, 저술기: 著述期), 그리고 18년의 정리기 등을 계산하면 그가 보낸 파란의 개인사의 연수가 나온다.


다산의 삶은 정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산은 정조와의 만남으로 경학(經學) 공부의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요직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 사후 유배에 오르는 쓰라림을 겪었다. 다산이 정조를 처음 만난 것은 진사과에 합격한 1783년으로 그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다산 평생의 핵심적 신념이자 이념은 공(公)과 염(廉)이었다. 공은 공정, 공평 등을 뜻하고 염은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재물 따위를 탐하는 마음이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정조 이전에 다산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인물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자형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을 통해 성호 이익(李瀷: 1681 - 1763)의 ‘성호사설’을 접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맞은 것이다.


다산은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의 대부분은 성호 선생을 따라 사숙했던 데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썼다. 저자는 이를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싸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96 페이지) 다산은 암행어사 시절 임금의 최측근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사도 강력 처벌을 주장할 정도로 강직했고 타협을 몰랐다. 남인 시파(時派: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인해 빚어진 억울한 일이라 주장하는 세력) 중 신서파(信西派: 조선 말기, 서학을 신봉하거나 두둔하던 세력)에 속했던 다산은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을 섭렵하게 되었지만 쓰라린 유배 생활을 감내해야 했고 고난의 유배기에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저자는 다산의 그런 삶을 인생의 비태(否泰: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라 표현한다.(84 페이지) 다산은 이가환, 이승훈, 이벽 등 당대의 진보적 인사들과 교유하며 “당파나 따지고 주자학에 얽매이고 가문이나 신분을 말하는 세속의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마음을 표명했다. 저자는 다산의 평생에 걸친 경학 연구는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의미심장한 것은 다산이 주자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학 체계로 학문의 방향을 잡고 실질적인 학문인 실학으로 학풍을 일으켜 정립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 예견했다는 대목이다.(119 페이지)


나는 이 대목에서 스님이 되어 걷는 자신의 길을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 표현하며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는 자의 전율”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고 했던 한 스님의 글(‘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55 페이지)을 떠올렸다. 다산은 색다른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천주학을 접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다산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이라는 맹자의 학설에 대해 주자와 달리 측은한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인이 되고, 수오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의가 되며, 사양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예가 되고, 시비의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지가 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171 페이지)


다산은 정적(靜的)인 퇴계로부터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무서워하고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한다는 비판을 두렵게만 여긴다면 공부하고 학문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게 아니냐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얻고 감동한다. 다산은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상소문에서 천주교 책에 윤상(倫常)을 헤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늘을 거역하고 귀신을 경멸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천주교를 통해 천문, 역상, 농정, 수리 등의 실용적 기술을 얻고자 했지만 제사를 금지한 교회법을 대하고서는 역적이나 원수로 여기고 완전히 손을 떼고 마음을 끊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집요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다산을 물고 늘어졌고 왕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세력 판도에 눌린 다산은 사직하지만 정조와 남인 영수인 채제공 재상의 연이은 타계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내몰린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정순대비 김씨(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오 할머니)의 수렴청정으로 벽파(辟派)가 득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정순대비가 천주교도들을 역적죄로 죽이라는 법령을 반포했고 다산에게는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몰래 숨어 예전보다 더 깊이 믿었다.”는 혐의가 씌어진다.


다산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은 백성들의 신망과 학자로서 지닌 높은 위신 덕이었다. 다산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의 핵심은 시대와 역사에 대한 변혁 희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교리에 매료되었던 사람들과 서양 과학 사상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다산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스물 일곱의 나이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둘째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모진 고문 후유증과 공포와 불안 등을 견디며 강진에 당도한 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기(저술기)를 보낸다. 저자가 말했듯 공자 같은 성인이나 주자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도 이상과 현실 양면에 역량을 두루 안배했다. 다산의 편견 없는 지혜와 소신 역시 같은 차원의 것으로 관념 유희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학자들에게 다산의 삶과 학문 세계는 그 자체로 경종(警鐘)이었음에 틀림 없다. 처음 장기로 유배된 뒤 7년 20여일만에 서울로 압송된 다산은 감옥에서 그리던 둘째 형을 만난다. 흑산도(黑山島)로 귀양을 간 정약전은 그곳 생활 16년만에 병사한다.


형의 부음을 듣고도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 없었던 유배객 다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억울하고 한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정약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검을 흑 자 쓰기를 두려워했다/ 그에게 黑은 곧 불길함, 죽음의 글자였다/ 흑산을 자산(玆山)이라 했다/ 그는 왜 흑을 두려워 했는가/ 글자가 내뿜는 불안의 냄새를 맡아내는 예민함은 / 그가 밟고 있는 땅 적소(謫所)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黑이란 시를 읽는다. 저자는 “흑산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끔찍하여 내가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편지를 쓸 때마다 현산이라 고쳐 썼는데 현(玆)이란 글자는 검다는 뜻”이란 다산의 글을 소개한다.(444 페이지)


정약용은 정약전을 현산이라 불렀고 정약전은 정약용을 다산이라 불렀다.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가 바른 이름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쓴다.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오직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그것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왜 스스로 포기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길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너희들이 참으로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 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찬양 위주여서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다산이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송강이나 고산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436 페이지) 현산을 두고 나눈 교감을 잇는 형제의 정은 다산의 ‘주역’에 대한 정약전의 평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또한 만족스럽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아! 다산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산은 성선설의 손을 들어줌과 동시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자주지권(자율의지)이 있다는 ”매우 탁월한“ 인간론을 주장했다.(491 페이지)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을 통해 머리털 하나인들 썩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전제한 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다산은 경학(經學: 유학의 경서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은 본론이고 경세학(經世學: 실천적 사회과학)은 각론이라는 입장을 지녔다.(500 페이지) 다산은 유배지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저서들을 해배(解配) 후에 완성했고 유배지에서보다 더 열심히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다산은 자신의 생애를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노라.”고 평했다. 저자가 말했듯 창의적 학자로서의 삶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나온 평가이리라. 다산에 대해 학풍(學風)은 살기(殺機)였으며 주우(主遇)는 화태(禍胎)라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 위당 정인보 선생은 "선생의 학문은 경학이면서 정법“이라고 설명했다.(557 페이지) 그렇기에 경학이 곧 경세학이고 경세학이 곧 경학이라는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당은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615 페이지)


다산의 의도와 심정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라는 제목을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유표(遺表)는 유언으로 남기는 정책 건의서이니 먼 뒷날에라도 그렇게 실현되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는 뜻이며 심서(心書)는 당장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속으로라도 실행하고 싶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유배중이던 다산의 처지가 반영된 말이지만 후세에 큰 귀감(龜鑑)과 동시에 과제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다산의 생생한 경고를 되새기자.(다산의 사상적 한계는 공부가 더 진척된 뒤 행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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