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7일 수요일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보는 중국문학, 전형준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보는 중국문학


전형준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06월 30일 출간

목차

머리말

제1부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와 중국문학
같은 것과 다른 것: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1920-30년대 한·중 프로문학운동의 비교: 조직 문제를 중심으로
한·중 문학과 동아시아 문학: 정체성과 전통/근대의 문제
한설야 소설 속의 루쉰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본 세 편의 '고향': 치리코프, 루쉰, 현진건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와 동아시아적 시각
동아시아의 근대와 20세기 중국: 천쓰허와의 대담

제2부 중국문학의 안과 밖(1)
'신문학운동' 시기의 언문일치론
'예술의 정치화'론과 중국현대문학사 기술의 문제
루쉰과 근대적 체험으로서의 고향 상실
시원을 찾아가는 상상적 여행기: 가오싱젠의 '영산'에 대하여
<폐도>의 분석과 해석
20세기 말의 문언문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

제3부 중국문학의 안과 밖(2)
신사실소설의 풍문과 실제
중국문학의 최근 10년: 신상태와 신해석
중국문학에서 북방이란 무엇인가
폭력을 어루만지는 해학: 박선석의 <쓴웃음>에 대하여
루쉰, 혹은 투창과 비수의 정신
동아시아 근대의 고뇌: 루신과의 가상 대담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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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과 함께 한 인간의 본편적 삶에 대한 성찰, 전형준,  2005-05-24

1.『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본 중국문학』에 들어가기에 앞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대학교 중문과교수로 재직 중인 전형준이라고 합니다. 경영자 독서모임 같은 이런 모임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여기 강의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이런 모임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대단히 기뻤다는 것,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여러분들의 높은 눈높이에 맞추어서 제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당할까? 하고 망설여졌습니다.

 이 기쁨, 걱정, 망설임 중에서도 이 모임의 여러분들이 과연 중국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건지, 아니면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부르신 건지 거기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 책 중에서 3부에 실려있는 글 중에 신사실소설의 풍문과 실제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도 쓰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만 흔히 문학이 가진 능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문학을 많이 이해하는 분들은 ‘한 나라 사람들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통로가 문학이다. 가령 통계 수치라든지 그 밖에 각종 숫자에 의지한 자료들에 의해서 삶의 실제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감의 삶과 그 총체적인 면모는 문학을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중국문학을 통해서 중국인의 삶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고마우신 말씀인데, 그런데 거기에서 염려되는 바가 생기는 거지요. 그건 뭐냐 하면 중국문학이라는 것을 중국을 알기 위해서만 보는 것이냐 라는 의혹이 생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문학이라는 것이 갖는 보편적인 차원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가령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명작이라고 부르는 톨스토이, 도스도예프스키라든지, 이런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었다기 보다는 문학보편의 감동을 얻기 위해서 읽은 것이지요. 우선 첫 번째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중국문학이니까 당연히 중국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겠습니다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기까지를 염두에 두셨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습니다. 

2.주요강의내용 

중국문학을 보면서 그것이 남의 나라 문학이 아니라 마치 나 자신이 속해 있는 문학인 것처럼 동질감을 느끼고, 그 동질감 속에서 내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연구하는 그런 마음이 들게 됩니다. 조금 현실적으로 말을 바꿔서 이야기를 하자면 독일문학이나 불란서문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또 다른 괴로움이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독일문학이나 불문학의 이론적인 높이나 문학적인 깊이, 연구자들의 수준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잡기가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국문학의 경우는 특히, 20세기 현대중국문학의 경우에는 중국쪽에서 연구하는 중국인 학자들이나 한국에서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의 역량이 비슷합니다.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중국학자들 자신이 중국문학에 대해서 스스로 이야기하기 보다 더욱더 진전된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80년대 이후에 젊은 세대들이 중국현대문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상당한 자신감들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동질감이라는 것이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를 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그 발전속도가 워낙 엄청 나니까요 그에 상응해서 중국의 사상적인, 지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이런 움직임들이 처음에는 서서히 그러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새로운 중화주의적인 색채를 띄기 시작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념적인 담론에 있어서 그것이 나타난 것은 이미 한 10여 년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자들의 경우에도 이 신중화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주어졌고, 이제는 중국현대문학과 한국현대문학사이 차이에 대해서 좀 더 주목하는 이러한 형세로 공부하는 분위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중국현대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대략 살펴봐야 그 다음이야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정통적으로 행해지는 시대구분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삼분법이라고 부릅니다. 그 명칭을 근대와 현대, 당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근대는 보통 아편전쟁 때부터 1917년까지 혹은 1911년까지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는 1917년 신문화운동부터, 사람에 따라서는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1911년 신해혁명 때부터 1949년까지를 현대라고 합니다. 당대는 1949년 중화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건국되고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당대라고 부릅니다. 당대를 자세히 나누면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이른바 신시기가 시작이 되는데, 신시기는 다시 비공식적으로 일부 학자들이 1989년 부터를 후신시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후(後)는 중국쪽에서 사용하는 용어로는 아주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 경우에는 후(後)라는 말을 안씁니다만 영어로 치면 post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른바 post구조주의, post식민주의, post모더니즘 이렇게 이야기할 때, 중국에서는 전부 후(後)자를 붙여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신시기라고 부르는데, 물론 이것은 89년에 있었던 6.4 천안문사태 이후에 중국상황이 크게 변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분기로 보고 있는 것이죠. 물론 당국에서는 후신시기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대, 현대, 당대라는 말은 사실상 말의 원 뜻으로 따지자면 지금처럼 이렇게 사용을 해서는 적절치가 않습니다. 근대, 현대, 당대는 사실 똑같은 말이지요. 당대라는 말은 contemporary의 역어가 될 것이고, 근대나 현대는 modern 이라는 말의 역어가 됩니다.

원래 이 modern이라는 말이 서양에서 사용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그 두 가지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중 한 의미를 강조할 때 우리는 그것을 근대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현대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근대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현대라고 부릅니다. 어떤 차이인가 하면, 절대적인 가치내용을 갖는 개념으로 쓰일 때는 근대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상대적일 때는 현대라는 말을 씁니다. 근대라는 것은 마치 고대, 중세라는 시기가 역사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하고 이것은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도 고대, 중세인 것처럼 근대의 실제적인 내용을 갖는 개념입니다. 현대는 그렇지가 않죠. 말하자면 중세 때에도 그 때 살던 사람들 자신은 자기들의 시대를 현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시대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시대를 현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와 현대가 ‘=’ 인 상황. 다시 말해서 근대라는 역사적 시기 속에 지금 우리가 아직도 살고 있을 때 근대와 현대가 같은 것이 되는 것이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나올 때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이제 근대시대라는 것은 끝나고 근대 이후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혹은 도래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명칭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근대는 아니니까 그래서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당대라는 말은 물론 동시대, 현대와 같은 말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또 하나의 다른 용어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와 현대를 상대적으로 정도의 차이를 갖는 그런 용어로 사용을 해서 조금 오래된 모던은 근대라고 부르고 조금 가까운 모던은 현대라고 부르는, 이런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 이러한 경우 근현대사란 말을 쓰는데 그것은 앞서서의 근대화, 뒤의 현대를 합쳐서 부르는 방법이 되겠죠. 중국에서 근대, 현대, 당대로 나눌 때 근대, 현대는 정도 차이에 따른 앞서 있는 것이 근대고 그 뒤가 현대다. 이렇게 보고 쓴다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대입니다. 당대를 왜 현대와 똑 같은 말의 뜻인데, 그것을 구분해서 쓰느냐? 이것은 물론 중국공산당의 정치적의도가 작용을 한 것이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서 그 이전 구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당위적으로 시대구분이 되어야 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념적인 것을 근거로 해서 칼같이 자릅니다. 그래서 현대와 당대는 완전히 다른 시대로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중국에서 전통적인 3분법은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비판적인 지식인들 중에서 이 3분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기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1984년에 젊은 연구자들과 비평가들이 모여서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제출한 논문을 ‘20세기 중국문학론’이라고 부르는데요. 20세기 중국문학론은 1898년 강유이와 양계초가 입헌군주제를 시도했던 그 무술변법 때부터 지금까지를 하나의 연속되는 정체성으로 파악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약간의 문제가 있지요. 84년 당시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현재는 21세기가 됐는데 지금에 와서 20세기중국문학이라는 명칭은 이상한 명칭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의 정체성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명칭을 찾아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하나의 정체로 본다고 하더라도 1917년 이전 1898부터 1917년까지는 확실히 1917년 이후와 구별 됩니다. 그 구별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 자신이 과도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중국문학론에 대해서는 저 자신이 10여 년 전에 분석을 하고 비평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가지고 있는 근대주의적•발전제일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가 해체해서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중국에서는 3분법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입장이 아직까지는 되고 있습니다. 1917년이 중요한 분기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전에는 문학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 언어라는 것은 중국용어로는 문언문과 백화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한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언문이지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들 중에서도 상당수들은 한문과 중국어를 구별하지 못하십니다. 한문이라는 것은 사서삼경에 나오는 문장이 한문이지요. 이 한문은 구두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글로만 쓰는 것이지요. 실제로 말하는 것을 옮겨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을 상당히 압축하고 변형시켜서 만든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문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을 때 상대방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다만, 한문을 함께 공부한 사람은 알아듣겠지요. 다시 말해서 서면어인 것입니다.

백화문이라는 것은 중국어로 쓰여진 문장입니다. 실제로 구두로 사용하는 말을 사용해서 쓴 문장이 백화문인 것이지요. 백화라는 것은 말로 하는 그 자체의 말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백화로 쓴 문장이 백화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디테일 해지는데 조금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1917년 이전에는 백화로 쓴 글은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가령 유학계통의 책 중에서도 ‘주자’같은 것들, 송나라 때 나왔던 어록 류의 책들은 중국어를 사용해서 쓰고 있고, 송나라 이후에 백화문으로 된 문학이 크게 발전을 합니다. 주로 일반 민중들의 문학이었지만,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사대기서가 백화문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사대기서도 조금씩 다릅니다. 삼국연의 같은 경우에는 한문위주로 되어있고, 수구전 같은 경우에는 거의 백화로 되어있습니다. 1917년 이전의 백화문 문학과 1917년 이후의 백화문 문학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법도 변화가 생겼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어휘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고 표현법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주로 그것은 근대적인 사유, 개념, 문물. 이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1917년 이후에 생겨난 백화문이라는 것은 이 전의 백화문이 얻지 못한 근대성을 가진 백화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언문일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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