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6일 화요일

중국문학(中國文學)

■ 중국문학(中國文學)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어로 썼으며 중국에서 발달한 문학이다. 중국 문학은 중국의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축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랫동안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 나라와 일본 등 주변 국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나 다른 민족, 또는 다른 나라로부터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립된 것이었다. 이것은 세계문학 가운데서도 드문 존재로서, 그 원인으로는 지리적 요인이나 민족성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문학이 이질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20세기 초 문화혁명 이후이다. 중국문학의 언어인 한어는 원래 단음절어이며, 1어가 1음절·1개념을 나타내고 1문자로 표기된다. 그 문자 즉, 한자도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로 발달하지 못한 채, 표의문자로서 복잡하고 다양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언어문자의 특성이 결국은 중국문학의 특성을 규정하게 되었다. 수사에서 대구를 존중하는 것도 그 하나이며, 언어와 문자의 특성은 청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의미 내용적으로나, 좌우대칭의 대구를 만들기 쉽게 한다. 이 대구의 기교는 당나라 율시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데, 그것이 문장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발휘된 것이 사륙변려문이다. 중국 문학은 또한 한자의 수가 많고 복잡하여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자가 소수지식인들의 독점물이 되었고 고전문학이 일부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다. 지식인이 문학의 주체였다는 사실은 중국문학이 현실성을 띠고 정치적인 색체가 짙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문학의 저류를 이루는 사상면에서는,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고유의 유가사상과, 노자 및 장자에 유래하는 도가사상이 주류를 이루어왔으며, 외래사상으로서 큰 영향을 준 것은 후한 때 전래된 불교사상과 근대 이후에 들어온 서유럽의 새사조였다. 이러한 외래사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문제도 문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선진 문학]
중국문학의 근원도 다른 나라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요이다. 즉, 황하강 유역에서 문명을 만들어 낸 중국인들은 농경생활을 하면서 풍년의 기원, 수확에 대한 감사, 노동요 등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중국문학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요는 본래 사람들이 외우기 쉬운 운율과 압운이 있는데 구전에 적합한 그 형태는 문자가 발달하지 못한 단계에서는 중요한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가요들은 후대의 문학형식인 운문에 비유한다면 운율과 압운이 단순하고, 문학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필요에 의해서 생긴 지혜였지만 오랫동안에 걸친 경험을 축적하여 가요형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요집인 <시경>이다. 이것은 대략 기원전 600년 무렵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적의 형태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시경>에 수록된 작품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풍>의 노래는 당시 민중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있어, 후세의 문학가에게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작자의 대부분은 분명치 않다. 이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300년경 <초사>의 문학이 남쪽에서 일어났다. <초사>는 <시경>에 비해서 훨씬 복잡한 형식이었으며, 당시에 그 지방이 초나라였기 때문에 '초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확실하게 문학사에 등장한 것은 선진시대의 말기와 전국시대의 말기에 굴원이 출현하고 나서부터이다. 그의 대표작인 <이소>는 초나라에서 추방된 굴원이 강남의 광야를 헤매면서 노래한 격정의 문학이며, 작자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밖에 <구가>, <구장>, <천문> 등이 알려졌으며, 신화와 공상, 남국의 자연과 비유에 그 특색이 있다. 이 무렵에는 여러 나라의 자유토구의 풍조에 촉구되어 제자백가가 등장하였으며, 사상가들의 산문이 꽃을 피웠다. 맹자와 장자의 문장에는 탁월한 것들이 적지 않다.

[진·한 문학]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를 생매장하는 등 포악함이 심하여 곧 멸망하게 되었다. 이어 일어난 한나라는 점차 문물제도를 정비해 나감으로써 빛나는 문화를 이룩하였다. 문학에서도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한나라에서 애호하였던 것은 남방의 가요였던 <초사>로서 굴원의 뒤를 잇는 많은 작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초사>의 수사를 더욱 발전시켜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는 새로운 문학형식이 생겨났는데 바로 '부'라고 하는 것이다. '악부'란 원래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의 이름인데, 거기서 불리는 가요도 악부라 하였다. 악부라는 새로운 가요의 유행은 당시 시 역사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즉, 서정시에서 서사시로 성격을 바꾸고, 궁전의 장려함과 도시의 번영을 노래하여 한나라의 왕조 문학으로서 크게 인정받았으며, 이 제국이 가장 강대했던 무제 때에 활동했던 사마상여에 의해서 문학적인 토대가 확립되었다. 부는 다시 크게 유행하여 양웅과 반고 등 우수한 작가가 나타났으며,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더욱 발전을 하였다. 악부의 형식은 다양하고 장단구가 섞인 복잡한 형식의 것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오언의 운율이 특히 애호되어 점차 오언시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오언시의 초기 작품은 <고시십구수>이다. 이것은 후한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무상감이 짙은 것은 이 시대의 불교사상이 배경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선진시대 대부분의 문헌은 거의 한나라 때 정리, 재편찬되었는데, 전국시대 제자백가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체계적인 역사서인 <사기>와 <한서>이다. 특히, <사기>는 사마천이 평생을 바친 저술답게, 역사의 기록인 동시에 문장도 뛰어나 산문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삼국·위·진·남북조 문학]
후한말의 정치적 혼란에서 삼국이 분열되고 중국의 북쪽 절반을 이민족이 지배한 남북조를 거쳐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589년까지가 이 시기에 속한다. 계속되는 정권교체와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회가 매우 불안했던 시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특히, 적벽전이나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에는 문학적으로 좋은 소재가 많았다. 위나라의 조조와 조비·조식 등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문화의 중심에도 위치하고 있어서 그들 주위에 수많은 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관심은 전대에 생긴 오언시에 자기의 감정을 담는 것이었고, 결국 개성적인 서정시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또, 위나라부터 진나라(서진 265∼316, 동진 317∼419)까지는 청담이 유행하였다. 위나라의 완적 등 칠현이 죽림에 숨어서 세속을 떠난 이야기로 지냈다는 것은 노장사상에 따른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변화하는 시대에 처하여 새로운 윤리를 확립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의 고뇌를 상징하는 행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진말 도연명의 전원시는 밝고 건강하였으며, 사영운의 산수시도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진초의 육기·육운 형제는 '부'의 기교를 써서 변려문을 만들어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사람들의 행동과 진귀한 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유명인의 일화를 기록한 송나라 유의경의 <세설신어>와, 진나라 간보의 <수신기>처럼 귀신의 세계를 그린 신비주의 경향의 소설이 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해야 할 사항으로는, 문학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문학의 의의를 자각한 언론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비의 <전론논문>, 또는 진나라 육기의 <문부> 등은 종래 중요시하지 않았던 문학의 독립선언과 같은 것이다. 이와같은 맥을 이어 양나라 때는 중국 최초의 문학 평론집인 유협의 <문심조룡>과 시론인 종용의 <시품>이 나왔다.

[수·당 문학]
약 290년 동안 계속된 당나라를 사이에 두고 전후 약 400년 정도의 이 시기는 중국 시문학의 절정기였다. 즉, 당대에는 오언과 칠언의 시를 형식을 완성하였으며, 율시와 절구에 특색을 나타내어, 시 역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당대를 초당기(7세기)·성당기(8세기 전반)·중당기(8세기 후반∼9세기 전반)·만당기(9세기 후반∼10세기 전반)의 4기로 나눈다면, 초당기에는 대개 남조풍의 시문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문학의 요구가 고조되어 시문학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초당기 말의 진자앙이 복고를 주장하며 내용이 없는 수사적인 경향을 비판하였다. 성당기는 초당기의 기초 위에 서서 이백·두보와 같은 시인이 각각 개성있는 작품을 발표하여 중국의 시문학은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왕유의 자연관조의 시나 잠삼·왕지환의 새외시에도 특색이 있다. 중당의 으뜸가는 시인은 백거이인데, 시에 의한 감성의 도야와 평화의 확립하는 등 시에 있어서의 혁신을 꾀했으며, 그의 평이한 표현과 풍자적 수법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가 쓴 <백씨문집>이나 <장한가> 등의 애독자는 국내외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시기에는 또한 남조 이래 경험을 쌓은 운율을 연구하여 근체시의 시형을 완성하여, 그 때까지의 고체시와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만당기의 두목은 즐겨 역사에 취재하여 특색을 나타내었다. 한편, 문장에서는 중당기의 한유와 유종원이 그 때까지의 대구적 수사를 중심으로 한 변려문을 배격하고 선진의 제자나 진한의 사서에 모범을 구한 힘찬 문체를 주장하였다. 특히, 한유의 의론문이나 유종원의 기행문 등의 고문(古文)은 당나라 중기 이후에 성행한 전기소설의 문체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고문의 세력은 송나라 때에 이르러 구양수·소순·소식·소철·왕안석·증공 등의 공명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문단에서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상의 8명을 당송 8대가라 부르는데, 중국의 산문은 그들 이후로 고문의 문체가 지배하여, 근대의 문학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당말부터 음악에 맞추어 노래 부를 수 있는 자유스러운 형식의 '사'라고 하는 일종의 새로운 시가형식이 생겨났다. 각 구의 자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장단구라고도 한다. '사'는 민간의 악부시가에서 기원하여 중당 때 이미 <억강남> 등과 같은 '사'작품이 창작되었으며, 만당에 이르러서는 시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에 발표된 소설은, <수신기> 등에서 비롯된 귀신·괴이의 세계에서 인생의 깅이함을 전하는 세속적 세계로 관심이 옮아가으로써 문장결구도 세련되어지고 세계문학상을 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심기제의 <침중기>, 이공좌의 <남가태수전> 등으의 전기소설이 그것이다.

[송·금·원 문학]
북송과 남송의 300여 년의 시기는 중국고전문학의 한 전환기였다. 즉, 당나라 때의 시는 국민문학으로서의 일반성을 띠었으나, 송나라 때에는 문인 중심의 문학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송나라가 문관을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송나라에서는 과거를 치르는 사람의 문학적인 재능은 정당하게 평가되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보장받게 되었다. 구양 수를 비롯하여 왕안석·소식 등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지식인들이 정계에서도 많이 활약하였다. 이에 따라 송나라 때의 시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일상적인 관찰 속에서 신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었다. 송나라 때 산문은 당나라 때 한유가 제창한 고문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북송에 이르러 고문의 대가인 구양수와 소동파 등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송나라 때의 고문운동은 그 후에도 저명한 역사가이면서 철학가인 사마 광과 이학가인 주희 등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유미주의적인 문학에 반대하고 꾸밈없는 질박한 고문작품에 찬성했다. 한편, 송나라 때에는 시인들이 대부분이 당말부터 생겨난 '사'를 짓는데도 뛰어났다. 이에 따라 사는 일반 문인들과 민간의 중시를 받아 마침내 당당히 송대문학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인으로는 북송의 유영·소동파·주방언과 남송의 이청조·신기질 등이 있다. 이러한 가곡의 유행은 가극의 성립을 촉구했으며 원나라 때에는 과거에 이미 있어 왔던 골계회·참군회·괴뢰회·영자회 등의 기초 위에 인도 등지 희곡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 이것은 한 작품이 4절로 이루어졌고, 노래하는 곡의 부분과 대사를 말하는 백의 부분을 갖추었으며, 이민족의 지배하에서 뜻을 펴지 못하는 문인들이 불타는 정열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관한경의 <두아원>, 마치원의 <한궁추>, 백박의 <오동우>, 왕실보의 <서상기> 등이 유명하다. 원나라 때의 소설은 당·송대와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녔다. 즉, 작품이 전의 작품에 비해 길어졌으며 완전히 백화체를 사용했다.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는 나관중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지었다는 <삼국지통속연의>, <수호전>은 널리 전해 내려오는 중국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가공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다.

[명·청문학]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억압당했던 한민족의 문화를 회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시문이 다시 그 중요성을 되찾았다. 명대의 문인들은 문학에 있어서 복고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였다. 이러한 복고 운동은 모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창의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 성취는 당나라나 송나라에 비해 보잘것 없었다. 고전적 작품의 양식을 본뜨려는 의고주의 문학은 대체로 진한파와 당송파로 구별된다. 이러한 문학 사조는 16세기에 이르러서 공안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은 문학의 진화성을 주장했으며, 훌륭한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성령'을 강조했다. 공안파와 그 뒤를 이은 종성·담원춘이 중심이 된 경릉파의 영향으로 명나라 말기에는 청신하고 미려한 소품문이 창작되었다. 명나라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통속문학인 희곡과 백화소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희곡은 '전기'가 매우 성행했다. 전기는 원래 민간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후에는 문인들의 지지를 받아 잡극을 누르고 희곡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작품으로는 고명의 <비파기>가 가장 유명하다. 명나라 중엽 이후에는 소설 창작도 크게 진전되었다. 우선 장편 백화소설의 대표작으로는 오승은의 <서유기>와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금병매>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이제까지의 통속소설과는 달리, 철저하게 현실 사회를 다룬 사실주의적인 묘사수법으로 중국 소설사에서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청대의 문학은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학술 조류의 영향으로 복고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전 시대의 모든 문화양식이 고루 발전하였다. 청나라의 시에는 당나라의 시를 숭상하는 종당파와 송나라의 시를 숭상하는 종송파로 나눌 수가 있다. 종당파는 왕사정·원매·심덕잠 등이 각기 다른 시론을 내세워 발전시켰으며, 종송파는 전겸익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청나라 말기에는 황쭌센을 중심으로 이제까지의 복고주의적 성향을 탈피하고 전통적인 중국의 내용과 형식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주장은 후대 백화시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는 청나라 때 부흥기를 맞아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산문방면은 고증학을 중시하고 실질을 숭상했다. 특히, 방포·유대괴·요내를 중심으로 한 동성파가 청나라 말기까지 문단을 지배해 그 영향력이 컸다. 청나라 때 소설은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여 많은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 소설들은 대부분이 장편 백화소설이었다. 포송령이 지은 <요재지이>는 중국문언소설을 집대성한 작품이고, 오경재가 지은 <유림외사>는 과거제도로 인해 일어나는 관료정치제도의 모순과 사회의 부패 등을 주로 묘사하여 풍자소설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조설근이 지은 <홍루몽>은 중국 인정 소설의 최고작으로 <홍루몽>에 대한 비평과 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그 밖에 문강의 <아녀영웅전>은 야담의 재미를 살린 소설로서 특색이 있다. 청나라 때의 희곡은 명나라에서 발전한 '전기'를 계승하였는데, 청나라 중기 때 대단히 성행하여 홍승의 <장생전>, 공상임의 <도화선> 같은 명작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새로운 곡조인 피황조가 유행하고 '전기'는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에서는 전대까지의 고전 문학의 수집과 주석에 정열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전당시>, <전당문>, <송시초>, <원시선>, <명시종> 등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전문학의 작품들과 주석은 바로 청나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중국에 전해진 서적 전체를 종합하여 <사고전서총목제요>를 편찬한 것은 청조학술의 빛나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현대문학]
아편전쟁(1841∼1842)의 패배를 계기로 그 때까지 폐쇄된 세상이었던 동진은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중국의 정치·사회·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국내적으로도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는 등 체제 자체의 동요가 심했다. 또한, 이 시기의 신문과 잡지의 발달은 명쾌한 표현을 촉구하였고, 량치차오의 신민체 등 새로운 문체를 성립시켰다. 서유럽 문화의 소개로 큰 영향을 준 것은 옌푸가 번역한 T. H.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및 A.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같은 근대사상과, 린슈가 번역한 뒤마의 <춘희> 및 위고·디킨스 등의 근대문학이었는데, 번역에 사용된 것은 동성파의 고문 문체였다. 중화민국성립(1912)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여 유럽의 근대문화 찬미자로 알려진 후스〔胡適〕가 잡지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를 발표하여 구어문체에 의한 새로운 문학을 불러일으켰다. 문학 혁명을 주도한 천두슈도 귀족적·고전적·산림적인 문학을 타도하고 국민적·사실적·사회적인 문학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문학 혁명은 불와전한 혁명이었던 싱해혁명 이후의 반동에 항거하여 신공화국의 실질적인 문화를 창출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때마침 루쉰이 <광인일기>를 <신청년>지에 발표, 광인의 고백 형식으로 지금까지의 유교적 질서의 기만성을 폭로하였으며, 그 참신한 문체와 심각한 내용으로 모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혁명문학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였다. 문학혁명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 처리에 불만을 느낀 대중들이 1919년 5월 4일에 일어난 5·4 운동과 1921년 중국공산당의 성립을 사상적으로 선도하였고, 문학단체의 결성을 도와 현대문학의 기초를 다졌다. 1920년 초기에 결성된 문학 단체로는 문학연구회와 창조사가 있다. 문학연구회는 저우쭤린·마오둔 등을 중심으로 사실주의적 문학을 제창하면서 <소설월보>를 출판하였고, 창조사는 궈모뤄를 중심으로 <창조계간>을 출판하였으나, 이윽고 창조사는 혁명문학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창조사는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 문학이론을 수용한 문학 단체가 되었다. 1925년 5·30 운동을 거쳐서 국민혁명에 이르는 시기에는 창조사·태양사가 혁명문학의 창작방법과 문학의 대중화 문제를 놓고 진보파를 포함한 기성문단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통일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30년에 중국 좌익 작가 연맹이 성립되었다. 이 연맹은 '문예대중화논쟁' 등의 내부의 논쟁과 '문예자유논쟁'과 같은 외부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1930년대 중국문학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소설로는 둔의 <자야>가 있고, 라오서의 <낙타상자>, 바진의 <집>, 선충원의 <변성>, 예사오쥔의 <예환지> 등이 특색을 보였다. 희곡으로는 차오위의 <뇌우>, <일출> 등이 뛰어나다. 시로는 쉬즈모·량스추 등을 중심으로 한 신월파와 다이왕수를 중심으로 한 현대파의 시인들이 크게 활약했다. 신월파는 시의 음률미와 형식미를 추구하였으며, 현대파는 프랑스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 암시성이 강한 창작 경향을 보였다. 그 후 신월파의 영향을 받은 장커자와 아이칭은 이름다운 음률과 형식 속에 현실문제를 과감하게 투영하여 중국 현대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게 되자, 1938년 문인들도 중화 전국 문예계항적 협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국공합작이 결렬됨에 따라 중국은 국민당 통치구와 공산당 통치구로 나누어졌다. 항일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2년 중국 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였던 옌안에서 마오쩌둥에 의하여 제시된 '문예강화'는 종전이 되었다. 그리고 1949년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문학활동의 기본방침으로 되어 작가들에게는 가혹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문예강화'의 내용은, 문학, 즉 예술이 먼저 노동자·농민·군인에게 봉사하는 것이라야 하며, 질적인 향상보다도 보급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 방침이었다. 이와같은 방침에 따라 등장한 것이 '인민문학'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한 것이 자오수리였다. 그는 문예강화의 정신을 최초로 실현해 낸 작가로, 농촌의 계급투쟁을 진실되게 반영한 <리유차이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또한, 집단 창작극인 <백모녀>는 중국 서북부의 농촌에 전해 오던 '백발선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작품은 해방구의 민중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후부터 토지개혁과, 그 밖의 사회변동이나 새로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이 나왔고 신인 작가도 배출되었다. 1957∼1958년의 반우파 투쟁과 1966년부터 10년 동안 있었던 문화대혁명은 저우양을 비롯하여 마오쩌둥 문예 노선에 충실하였던 인물까지도 숙청을 당하는 등 문학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비판당했던 작가들이 대부분 명예회복되었고, 젊은 세대 작가들이 등장하여 문화대혁명 당시를 비롯하여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품들이 나왔다. 이후 1981년부터는 새로운 시기의 개혁운동을 고취시키는 작품들이 또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다. 즉, 1980년대 중반부터는 개방이라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문단에서도 다양한 창작방법과 조류가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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