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6일 화요일

중국문학의 특징 - 시대별 중국문학

중국문학의 특징

브리태니커
중국어로 씌어진 중국민족의 문학.
중국문학은 문화적인 접촉을 통하여 다른 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일본·베트남의 문학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국가들은 중국어를 그들의 문언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작가들은 중국어로 문학작품을 짓기도 했다. 중국어의 기록 측면상 도화적(圖畵的) 특성은 중국문학과 그것의 전파에 다음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중국문학, 특히 시가(詩歌)는 독자들에게 청각은 물론이고 시각적으로 심미적인 호소를 하는 데 뜻을 두었다. 둘째, 이러한 시각적 호소는 중국에서 서예의 지위를 높여주었는데, 서예는 최소한 지난 1,600년 동안 회화에 비견되는 훌륭한 예술로 여겨지고 있다. 셋째,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기록체계는 교육과 글자의 보급에 장애가 되어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수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색인 : 문자해독률). 넷째, 중국의 문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주변지역의 동화된 이민족 집단을 포함한 수많은 중국민의 문화적 단합을 계속 유지시키는 잠재역량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색인 : 한자).
중국어의 발음 역시 중국문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단일 발음을 갖고 있는 각각의 글자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많은 동음이의(同音異義)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글자의 도움 없이는 말하거나 읽을 때 오해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은 발음상 성조(聲調)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중국어의 이러한 음조상의 특징은 시가와 음악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다. 중국시가의 모든 주요한 형식은 근본적으로 음악을 곁들여 노래되었다. 중국시가는 음률을 맞추기 위해 운율(韻律)과 협운(協韻)에 의존하는 것 외에 함축성과 간결성이 그 특징이다(→ 색인 : 보격). 중국시인은 서정성을 강조할 때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환희, 영감의 높이와 슬픔, 연민의 깊이를 나타낸다(→ 색인 : 서정시). 일반적으로 대명사나 접속사는 생략하고 1~2개의 단어로 매우 복잡한 사고나 상황을 언급하곤 한다.
중국문학은 산문과 시가 사이의 한계선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보다 훨씬 불분명하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의 3가지 문학양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①  (賦)는 시가와 산문의 경계선상에 있으며 그 양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리듬과 음운, 그리고 드물게 대구(對句)를 사용하는 동시에 산문적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서 '시적인 산문', '산문시', '서사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색인 : 부). ② 변려문 (騈儷文)은 대구의 문장구조와 균형잡힌 음운 양식이 특징이다. 시가와 비슷한 음악적인 효과와 산문적인 설명 및 의론이 동시에 들어 있다(→ 색인 : 변려문). ③ 팔고문 (八股文)은 이러한 특성을 특이하게 변형시킨 것으로 대구의 구조와 대비적인 음운 양식을 최대한 활용했는데, 단어와 단어, 구와 구, 문장과 문장을 대응시켜 긴 문단을 이루는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지금은 문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과거 수세기(1487~1901) 동안 과거시험생의 지침으로서 중국문단을 지배했다(→ 색인 : 팔고문중국문관제도).
중국산문은 크게 고문(古文:文言文)과 백화문(白話文:語體文)의 두 부류로 나뉜다. 고문은 고대 작가들이 수립한 문장규범과 풍격을 따르고 유가의 경전과 성현의 저술을 근거로 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수요와 문화상의 성취로 인해 전통적인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고문은 대부분의 산문작가들이 사용하는 어문(語文)의 도구가 되었다. 백화문은 고문과 판이하게 달라 작자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로 지은 문장이다. 이러한 문체는 전통적으로 낮게 평가되어오다가 송(宋)나라 말엽(13세기경)부터 비로소 소설가와 희곡작가들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되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j0020b001

청대의 중국문학

브리태니커
중국어로 씌어진 중국민족의 문학.

개요(1644~1911/12)

청은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역대 군주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학술·문학 등을 옹호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청대의 문학은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학술 조류의 영향으로 복고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전 시대의 모든 문학양식이 고루 발전했다. 특히 고전문학에 대한 정리와 연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시문

청대의 시단에는 전체 문학의 복고적인 조류 속에서 여러 유파가 생겨났으나, 대체로 당시를 숭상하는 종당파(宗唐派)와 송시를 숭상하는 종송파(宗宋派)로 나눌 수 있다. 오위업(吳偉業)이 창시한 종당파는 그후 왕사정(王士禎)·원매(袁枚)·심덕잠(沈德潛) 등이 각기 다른 시론을 내세워 발전시켰으며, 종송파는 전겸익(錢謙益)이 주도했다. 또한 이러한 유파와는 달리 자신의 창의와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풍을 세우려던 시인들도 있었다. 청말에는 황쭌셴[黃遵憲]을 중심으로 한 '시계혁명'(詩界革命)이 일어나 이제까지의 복고주의적 성향을 타파하고 전통적인 중국시의 내용과 형식을 개혁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대 백화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는 청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여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사에 관한 이론·평론도 활발했다. 초기에는 납란성덕(納蘭性德)이 사단을 대표했고, 그후로 주이존(朱彛尊)·진유숭(陳維崧)·장혜언(張惠言) 등이 각기 다른 사풍의 작품을 지었다. 산문 방면은 당시의 학술 조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고증을 중시하고 실질을 숭상했다. 특히 방포(方苞)·유대괴(劉大)·요내(姚鼐)를 중심으로 한 동성파(桐城派)가 청말까지 문단을 지배해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소설

소설은 청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발전했는데, 일부 문언소설이 창작되기도 했지만 그 주류는 역시 장편 백화소설이었다.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요재지이 聊齋志異〉는 중국 문언소설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여우·혼령·신선·기인·동식물·꿈 등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431편을 모은 것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물들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어서 친근감을 주기도 하며, 봉건예교와 정치를 완곡하게 비판한 것도 있다. 오경재(吳敬梓)가 지은 〈유림외사 儒林外事〉는 55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제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관료정치제도의 모순과 사회의 부패 등을 주로 묘사하여 풍자소설의 걸작으로 꼽힌다.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홍루몽 紅樓夢〉은 총 120회이며, 관료집안인 영국부(寧國府)와 영국부(榮國府) 두 가문의 몰락과 가보옥(賈寶玉)을 중심으로 12명의 미녀들이 펼치는 애정고사를 묘사한 것으로 중국 인정소설의 최고작이다. 〈홍루몽〉에 관한 비평과 연구는 대단히 활발하여 '홍학'(紅學)이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이다. 청말에는 주로 조정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을 신랄하게 질타하는 이른바 '견책소설'(譴責小說)이 유행했는데,유악(劉鶚)의 〈노잔유기 老殘遊記〉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희곡

희곡은 명대 전기의 발전을 계승, 청대 중엽에 대단히 성행하여 홍승(洪昇)의 〈장생전 長生殿〉,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 桃花扇〉 같은 명작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후로는 새로운 곡조인 피황조(皮簧調)가 유행함에 따라 곤강에 의거한 전기는 급속히 쇠퇴하고 여러 지방희(地方戱)가 대두했으며, 이를 통합·발전시킨 경극 (京劇)이 마침내 탄생되었다.

번역문학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서유럽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서양의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이 들어와 번역되기 시작했다. 서양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번역소개한 사람은 옌푸[嚴復]였다. 특히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천연론 天演論〉은 당시의 지식인과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문학작품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린수[林紓]인데, 그는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의 구술에 의지해 무려 170여 권에 달하는 각국의 작품을 번역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문의 명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번역서는 모두 미려한 고문으로 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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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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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학(中國文學)은 황하 유역의 북방과 장강 이남의 남방을 포괄하는 지역에서, 한자로 기록된, 고대 신화에서 현대 문학에 이르는, 산문, 시, 희곡, 수필 등등의 글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중국문학은 역사적 연속성을 띠고 있다. 현대문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문학사는 수천년에 걸쳐 비슷한 문학적 흐름이 지속되었다.[1] 다른 특징으로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현실적이고 산문적인 북방적 기질과 환상적이고 시적인 남방적 기질이 반영되었다. 이중적인 계층 구조는, 중국문학이 사대부 문학으로 불리는 상류층 문학과 민간문학이라고 불리는 하류층 문학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했다.[2]

역사[편집]

4천 년의 중국문학은 굽이치는 황허, 대륙적인 민족기질, 방대한 산하를 배경으로 한자의 특질을 살려 성장하였다. (詩)를 주류로, 소설·산문을 지류로, 서정과 자연영탄(自然詠嘆)을 본바탕으로 삼고, 서사와 사회 고발을 그 운영으로 삼아 온 것이다.[3]

시(詩)[편집]

고대 중국의 문학 형식은 시가(詩歌)로서 그 대표가 주대(周代)에 씌어진 시경(詩經)이다. 풍(風)·아(雅)·송(頌)의 세 가지 체재와 부(賦)·비(比)·흥(興)의 세 가지 작법을 운용한 305편은 대부분 연애·수렵·농작과 제사·전쟁을 주제로 했다. 주로 사언체(四言體)의 소박한 형식으로 씌어진 시경이 ‘사무사(思無邪)’란 중국 시의 본질적인 사실주의·낭만주의 전통을 수립했다.[3]
시경이 북방 문학으로 토대를 닦은 뒤 춘추 시대 이후로는 양쯔강 이남의 새로운 시가인 초사(楚辭)가 시경에 상대적인 문학으로 등장했다. ‘혜(兮)’, ‘사(些)’, ‘지(只)’ 따위 어조사를 곁들여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식인 초사는 비로소 사언(四言)의 구속에서 벗어났고, 정열과 환상 그리고 충정과 비분의 사상을 응합(凝合)시킨 작품들은 중국 시상(詩上) 최초의 서정시인 굴원이 남긴 것이 가장 많다.[3]
한대에 이르러 변체시(變體詩)가 생겼으니 하나는 조정(朝廷) 문학으로 민중을 떠나서 가송적(歌頌的)인 부(賦)가 있었고, 하나는 악부(樂府)다. 시경과 초사의 전통을 이은 악부는 민가(民歌)로서의 상화가(相和歌)·청상곡(淸商曲)·잡곡(雜曲)과 외국에서 전래한 고취곡(鼓吹曲)·횡취곡(橫吹曲)과 사대부들의 교묘가(郊廟歌)·연사가(燕射歌)·무곡(舞曲)들로 엮어졌고, 무엇보다 음악을 배합한 신형식은 오언시(五言詩)의 기초를 세웠다.[3]
한말(漢末)에서 (魏) 초기에 정형된 오언시는 이미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와 조씨 부자(曺氏父子)·건안칠자(建安七子) 등의 시와 최장편 서사시인 공작 동남비(孔雀東南飛)에 점숙(漸熟)됨을 알 수 있다. 위진(魏晋)과 남북조(南北朝)는 정치적으로는 혼란했으나, 문학상으로는 대조적으로 찬란하여 문학이 학문과 분리되었고 유가(儒家)의 교조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자연을 제재로 한 성정(性情) 문학이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 또 하나의 공헌은 칠언체(七言體)의 성립이겠고 그 시대의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는 도연명·사령운 등이 있다.[3]
중국 시의 전성기는 역시 당대(唐代)이다. 그 시체(詩體)도 오언(五言) · 칠언(七言) · 고체(古體) · 근체(近體) · 절구(絶句) 따위로 분망했거니와 2천 2백여의 많은 시인에 의해 4만 9천 수(首)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제왕의 제창과 불교가 개척해 준 시의 의경(意境)으로 극성한 원인도 있겠지만 당대를 통하여 드물게 보는 천재적 시인 이백·두보를 비롯하여 고적(高適) · 잠삼(岑參) · 왕창령(王昌齡) · 맹교(孟郊) · 장적(張籍) · 원진 · 백거이 · 왕유 · 이하 등의 군출(群出)이 세를 북돋우었다.[3]
(宋)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식·황정견·육유·왕안석 등 시인이 불교적이면서도 주지적인 시를 써서 시사(詩史)의 명맥을 이었지만 전고(典故)를 애용하면서 실속 없이 겉만 아름다운 폐단을 면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詞)의 흥성(興盛)으로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성당(盛唐) 때 싹튼 사는 송에 이르러 위장(韋莊)·이후주(李後主)·온정균(溫庭筠) 등을 중심으로 그 사용 음조(音調)가 칠궁 십이조(七宮十二調) 사패(詞牌)가 9백여 종에 다다랐고 그 풍격(風格)도 완약(婉約)과 호방(豪放)으로 갈라져 각각 음악의 시로 흥성케 했다.[3]
·에 이르러 시는 모방의 길에서 진전하지 못한 채 답보했고 원대에는 오히려 ‘곡(曲)’으로 시사(詩詞)의 전통이 옮겨졌다. 역시 완약과 호방의 풍격을 지닌 곡은 ‘노래하는 희곡’으로 널리 불렸으니 마치원(馬致遠), 관한경(關漢卿), 정광조(鄭光祖), 백박(白樸)을 비롯하여 작가가 187인에 이르렀다.[3]
명대(明代)의 시는 전후칠자(前後七子)를 중심으로 성당시(盛唐詩)를 모방한 복고풍이 짙다가 청대(淸代)에 와서는 전대의 시를 총집성하여 각 시체(詩體)가 부흥하였다.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를 중심으로 한 시인들은 여러 시형식과 풍격을 시도했다. 시작과 시이론이 겸출했던 청대에는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과 거기에 반동했던 심덕잠(沈德潛)의 격률설(格律說), 옹방강(翁方綱)의 기리설(肌理說)과 원매의 성령설(性靈說)이 특기할 만하다. 청말(淸末) 황쭌셴(黃遵憲)은 시의 생활화·자유화를 제창했고, 외국시의 번역에 힘입어 또 하나의 시대의 문학으로 신시(新詩)가 혁명적으로 등장했다.[3]

산문[편집]

중국의 산문은 시에 비해서 순문학의 본질상 적은 편이며 대부분이 설리적(說理的)이거나 기사적(記事的)인 것들이 많다. 설리적인 것이 사상가로부터 나왔다면 기사적인 것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 그 최초로 상서(尙書)와 좌전(左傳)을 들 수 있으며, 철리적(哲理的)인 것으로는 논어와 도덕경을 들 수 있다. 양한(兩漢)에 이르러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등이 불후의 작품으로 남았지만, 비교적 순문학성을 띤 것은 당송팔대가의 산문을 들 수 있다. 비록 복고적인 경향을 면할 수 없었지만 예술성을 띤 영주팔기(永州八記 ― 유종원), 적벽부(赤壁賦 ― 소식),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 한유), 추성부(秋聲賦 ― 구양수) 따위를 남겼다. 산문(散文)에 소조(蕭條)한 명대를 거쳐 청대에는 방포(方苞), 유대괴, 요정 등을 중심으로 한 동성파(桐城派)는 문도합일(文道合一)을 주장하는 고문 부흥에 경주케 되어 결국은 산문이 역사적·철리적 굴레를 끝내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의 소설은 훨씬 늦고 더딘 것이다. 고사성(故事性)을 띤 소설들이 형성된 것은 당대의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다. 물론 한대에도 설원(說苑), 신서(新序), 열녀전(烈女傳)이 소설의 전신임을 발견할 수 있고 더구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의 열이전(列異傳), 박물지(博物志), 수신기(搜神記), 신선전(神仙傳), 술이기(述異記), 십유기(拾遺記) 등의 신괴소설(神愧小說)은 허구성이 있으나 그 구성이 잡기(雜記)식인 졸렬을 면치 못했다. 그것은 중국이 일찍부터 소설을 ‘가담항어’의 ‘도청도설’이라고 경시하여 왔고 과거(科擧)에도 씌어오지 않았다는 데 원인이 있다. 당대의 전기(傳奇)는 소설로서의 체재와 인물묘사, 스토리의 구성 등에 있어 오늘날의 소설에 접근했으나 그 내용은 연애·검협(劍俠)·신괴(神怪) 등에 불과했다. 대표작품으로 고경기(古鏡記)·유의전(柳毅傳)·잡혼기(雜魂記)·이왜전(李娃傳)·유씨전 (柳氏傳)·장한가전(長恨歌傳)·침중기(枕中記)·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등이 있다.
송대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몰락하고 또다시 ‘평화(平話)’로 대체되었는데 평화는 평민화한 전기로 남에게 읽히고 들려주던 것으로 은자아(銀字兒)·설공안(說公案) 등과 같은 탐정류와 강사(講史)와 같이 역사성을 띤 허구류(類)가 있었다.
원대에는 비록 잡극(雜劇) 시대였지만 수호전삼국지연의와 같은 백화(白話)로 된 장회소설(章回小說)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명·청대의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를 이룩하게 했다.
명대는 장회소설의 발달기였다. 봉신연의(封神演義)·서유기 따위의 신괴소설을 비롯하여 기서로 알려진 금병매를 빼놓을 수 없다.
청대는 소설의 전성기다. 그 제재나 기교가 뛰어나, 유림외사(儒林外史), 노잔유기(老殘遊記)·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따위의 사회풍자소설이 있고 야수폭언·경화연(鏡花緣) 등의 이상소설(理想小說)이 있고 홍루몽(紅樓夢)을 대표로 내놓을 수 있는 애정소설이 있고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삼협오의(三俠五義) 등의 무협소설이 있다. 청말에 이르러 임서를 비롯 구미 소설의 번역물이 쏟아져 나오고 한편 어문(語文)일치운동의 물결을 타고 장회소설(章回小說)의 허물을 벗고 신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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